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나는 누구인가 5. 空이란 무엇인가? 공으로 푸는 존재의 비밀!

Buddhastudy 2023. 7. 20. 18:50

 

 

 

앞서 정보에 대해 알아봤다.

그런데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다.

그것은 정보라는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쉽게 생각을 떠올려보자.

생각은 정보의 일종이다.

그런데 그것을 만들어내는 뇌가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느냐는 점이 문제이다.

 

앞서 예를 들었던 정의롭다 역시 같은 맥락이다.

정의롭다라는 정보가 홀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만일에 독존이 불가능하다면

결국 정보란

물질처럼 실체를 지닌 어떤 것들이 만들어내는

파생적 피조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따른 정보의 가치는 급락할 것이다.

 

 

정보와 물질 가운데 어느 것이 실제 하는지를 따져보자.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런 시도 자체를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관념과 같은 추상적인 정보를 가지고

물질과 겨룬다는 발상 자체가 모순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나 해보자.

우리가 보고 느끼는 물질이라는 것이

실제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돌멩이를 하나 집어들자.

돌맹이가 없다면 손에 닿는 아무것이나 하나 잡아도 좋다.

과연 그것은 실제하는가?

질량이 있고 거칠거리는 촉감이 있다.

이것을 손으로 툭 치면 약한 통증이 전달되어 오니

분명히 뭔가 있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한자로 하면 이다.

 

다시 한 번 묻자.

돌맹이가 유가 맞는가?

 

이런 질문은 천 번 만 번 해도 유가 맞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 질문에 예상하기 힘든 답을 내놓은 이가 있다.

2500년 전에 살았던 노자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기록한 도덕경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있음과 없음이 함께 있어야 존재할 수 있고

어렵고 쉬운 것이 함께 있어야 문제가 이루어지고

길고 짧은 것이 함께 있어야 비교가 되고

높고 낮음이 함께 있어야 경사가 생기고

내뱉는 소리와 들어오는 소리가 함께 있어야 소리가 어우러지고

앞과 뒤가 함께 있어야 순서가 생긴다.”

 

노자는 이상과 같이 홀로 성립될 수 없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서두를 유와 무로 장식했다.

유와 무는 길고 짧은 것처럼

어느 한 가지만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피력한 것이다.

 

노자가 친절하게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했음에도

이것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왜냐?

유와 문은 그 뒤에 나오는 모든 대칭 명제들을 포괄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위가 크다고 해서 상대적 원리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유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뭐가 함께 있어야만 한다.

 

유처럼 보이는 어떤 물체에 무가 공존한다는 개념이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을 것이다.

무는 수학의 0과 같으므로 생략하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취하면 족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게 대충 편리한 대로 유아 무를 취급해서는 안 된다.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것들은 대부분 실제 모습과는 판이하다.

 

잠시 착시 현상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상의 그림에 나오는 선은 모두 직선으로 된 평행선이고

붉은 원은 같은 크기이다.

그리고 체크 무늬 그림에서 점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검은 점은 모두 흰색이다.

 

이는 모두 주변 환경에 따른 착시 현상으로

한낮에 태양이 석양보다 작게 보이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이처럼 우리가 측정의 도구로 삼는 감각은

주변 상황에 따라 왜곡되기 십상이다.

외계의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뇌에서 편의대로 꾸미기 때문에 실제 모습을 파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감각만 왜곡에 시달리는 건 아니다.

그것보다 더 큰 왜곡은 관념에 있다.

우리는 4차원의 한 단면에서 살아간다.

 

그 단면에서 비롯되는 관념의 왜곡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유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물어보자.

긴 것이 존재하는가?

긴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그 옆에 짧은 것이 함께 있어야만 존재가 성립된다.

 

유도 같다.

유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에도 존재한 적이 없고

미래에도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

유란 무와 한 덩어리로 둥글어 갈 때에만 비로소 그 존재가 성립된다.

 

--

[존재?]

그 후보는 셋밖에 없다.

바로 유와 무

그리고 유와 무를 동시에 만족하는 제3의 존재 형태이다.

세 번째를 간략히 표현하면 공이다.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 , 공 가운데 어느 것이 실제 하는지 따져보자.

 

과연 무엇이 실제일까?

누차 말했지만 유를 고집하는 것은

긴 것 하나를 가지고 길다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길고 짧음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하면서도

유와무를 같은 개념이라고 하면 놀라거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는다.

유와 무 역시 길고 짧은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돌멩이는 유가 아니다.

돌멩이가 유가 되려면 무라는 개념이 동시에 겹쳐 있어야 한다.

, 무가 겹쳐 있고 그 종류의 면을 부각하여 유라고 해야 한다.

연필 두 개 중 한 개를 가리켜 길다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재차 말하지만 산이 높다라고 하려면

반드시 그 주변에 낮은 산을 포함시켜야 한다.

마찬가지로 유라고 하려면 무와 한꺼번에 엮어서 유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공, 이것만 존재한다.

이것 외에 다른 존재는 없다.

공은 제1 원인의 문제를 간단히 해결한다.

유가 아니기에 자존할 수 있고

무가 아니기에 창조할 수 있다.

유와 무가 아니기에 공간이 끝이 있고 없고의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유가 아니기에 우리들은 피조물에서 벗어나 조물주가 될 수 있고

무가 아니기에 영생과 열반을 누릴 수 있다.

 

전지와 구원의 해법은

기도나 신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이 공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깨닫는 데 있다.

 

그렇다면 다시 돌멩이를 주어들자.

필자의 말대로라면 이 돌멩이는 유가 아니라 공이 돼야 하는데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단언컨대 공이 맞다.

공을 아래에 글자처럼 쓴다고 해서 공이 아닌가?

글씨가 한쪽으로 찌그러져도 본뜻에는 상관이 없다.

 

마찬가지로 돌멩이는 공에서 유력 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상태이다.

무력 역시 있지만 힘의 비중이 유쪽에 치우쳐 있고

그래서 유처럼 보이는 것뿐이다.

 

이것을 부수고 쪼개면 결국 텅 빈 공간에 에너지 다발만 나오고

거기서 한 발 더 들어가면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공만 나온다.

 

우리가 접하는 질량과 에너지를 지닌 모든 것들은

유처럼 보이게 하는 것뿐이지

유는 아니다.

유를 표현하려면 뒤에 힘을 붙여야 한다.

 

[유력] 이것은 유처럼 보이게 하는 힘으로 유는 아니다.

유력은 정보를 일으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을 만드는 환유의 집행자이다.

 

공은 정보이다.

정보를 , , 신 등으로 바꿔 부를 수 있다.

어느 것으로 부르든지 상관없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제3의 존재 형태라는 점만 분명히 기억한다면

 

--

[차원이란?]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곳, 이곳을 수학적 기술로 표현하면 3차원이다.

그런데 정말로 3차원이 맞는지 의문을 가져보자.

 

2차원 면과 1차원 선을 보면 그것은 3차원과 다른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2차원과 1차원은 3차원을 구성하는 일부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종이나 선을 집어들면서 별개의 차원을 떠올리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2차원 면의 세계에서 사는 생물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3차원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결코 하지 못한다.

세상은 오로지 평면만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을 초월한 3차원은 아득한 피안이나 관념의 대상으로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4차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의문을 확대하면 4차원 너머에 있는 5차원

즉 공에 속해 있는 것으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5차원 공의 한 단면에 4차원이 있고

다시 그것에 한 단면에 3차원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차원을 높여보면 5차원 공만 있고

그 밑에 차원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만일 존재한다면 그것은 4.3.2.1의 차원이 존재한다고 믿는

착각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3차원에 살고 있는 우리들 입장에서는

반론이 없을 수 없다.

주변에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은

3차원적 대상뿐이다.

 

세 축으로 이루어진 입체를 뛰어넘는 초입체를 단 한 개라도 봤어야

4차원을 운운하고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 무언가를 목격했어야

5차원 공을 입에 담을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한여름 밤이 되면

<전설의 고향> 같은 드라마에서

4차원에서 살 법한 귀신 얘기가 솔솔 나오긴 하지만

그것 역시 증명된 바는 없다.

 

그런데 사실 이런 부류의 항변은

차원에 갇힌 존재의 신세타령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2차원 평면 세계에 사는 생물이 있다면

꼭 그와 같은 논리를 꺼내 들 것이다.

그들 역시 사방팔방 모든 것이 2차원 면으로 되어 있는데

어떻게 입체를 이해할 수 있느냐며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주변 탓을 하면 한도 끝도 없다.

주위 환경에서 눈을 떼고 본질을 보자.

오로지 어떤 것이 실제 할 수 있는지를 면밀히 따져 실존에 다가서자.

그러다 보면 3차원 입체 세계 너머에 있는

[고차원 정보 세계]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선 차원의 실제 여부를 알아보자.

1차원 선이 있다.

이것은 실제 할 수 있는가?

 

높이와 면적이 없는 선은 실제 세계에 있을 수 없다.

유가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렇다고 선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관념 속의 정보로서 존재한다.

그렇기에 무라 할 수 없다.

 

2차원 면 역시 같다.

이것 역시 높이를 지니고 있지 않아

실제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

우리가 늘상 만지는 종이 같은 것은

사실은 높이를 지니고 있는 납작한 입체일 뿐이다.

 

 

이제 3차원 입체를 떠올려보자.

이것은 실체 하는가?

 

두 개 이상의 밑변의 높이를 지녔으니 그 형체가 뚜렷하게 그려질 것이다.

하지만 입체를 구성하는 선과 면의 실체가 없는데

무엇으로 입체를 쌓아 올릴 수 있겠는가?

 

이것은 0을 끌어모아서

집을 짓고, 다리를 놓고, 비행기를 만드는 것과 같다.

차원의 구성 원리로 보면 3차원 입체 세계 역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상태가 된다.

다시 말해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공이라는 얘기이다.

우리가 [공의 한 단면]만을 보면서 유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다행히 양자 역학이 발전하면서 이와 같은 의문을 일정 부분 해소해주고 있다.

하지만 유예 논리에 흠뻑 빠져 지내고 있는 3차원 인간들에게

그것을 이해시키는 것은 여전히 난해한 일이다.

 

요컨대 모든 것은 정보로만 되어 있다.

점과 선과 면이라는 정보가 결합하여 뭔가 있는 것처럼 그럴듯하게 꾸며놓았다.

이것이 3차원 입체의 세계이다.

그 입체의 세계를 공간에 자유롭도록 개방한 것이 4차원이고

여기서 더 나아가 시간에 자유롭도록 몽땅 지워버린 것이 5차원 공이다.

 

--

[5차원 공이 홀로 독존하고 있다.]

...

이놈의 나이나 크기, 모습 등은 따질 필요가 없다.

그런 건 유가 성립될 때나 들이대는 잣대이기 때문이다.

 

또 이놈이 어떻게 해서 삼라만상을 만들어냈는지도 따질 필요가 없다.

그런 건 무가 성립될 때나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비무한 공은 절대이고

그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