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나는 누구인가 4.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Buddhastudy 2023. 7. 19. 18:25

 

 

 

빨갛게 잘 익은 사과를 손에 쥔 상상을 해보자.

꽤나 먹음직스러운 사과인데

이것은 과연 실제 하는가?

 

상상 속의 사과가 실제하기 위해서는 상태를 나타내는 물리학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질량이나 위치에 대한 측정값이라든지

아니면 그것이 다른 물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떤 에너지 같은 것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런 것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실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물리학적 데이터가 없는 상상 속의 사건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실제한다고 확신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도 없다.

왜냐, 어떤 정보에 대한 현상만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상상 속의 사과는 유라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무라고도 할 수 없다.

유인 동시에 무인, 다시 말해 유와 무를 동시에 만족하는 그 무엇이다.

 

한마디로 비유비모한 제3의 존재 형태라는 얘기인데

과연 그런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다행히 1935년에 독일에서 발간된 <자연과학>이란 잡지에

비유, 비무와 맥락을 같이 하는 기상천외한 고양이가 등장한다.

 

 

<슈레딩거의 고양이>

 

뉴턴에서 아이슈타인에 이르는 고전역학에서는

관측자에 상관없이 미래는 정확히 결정되어 있으며

어떤 측정값만 정확히 알면

인과 법칙에 의해 미래를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기계론적 우주관이라 한다.

 

그런데 진보된 과학이 소립자의 세계를 다루게 되면서

그와 같은 믿음은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어떤 조건을 정확히 구비한다 해도 그에 따른 미래의 현상은 여러 가지가 있게 되고

그것은 철저히 확률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불확정성의 원리가 물리학 깊숙이 파고들게 되었다.

 

기존의 과학자들이 발끈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그 선봉에 아인슈타인이 있었다.

그는 포도스키, 로젠과 함께 [ETR역설]을 발표했고,

슈레딩거가 1935년에 [슈레딩거의 고양이]를 발표하는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슈레딩거의 고양이란

방사성 원소가 들어 있는 철로 이루어진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고양이를 말한다.

언뜻 보면 일반 고양이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기괴하기 짝이 없다.

 

방사성 원소가 붕괴하면 고양이는 죽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고양이는 살게 된다.

그 확률은 5050이다.

그런데 문제는 양자 역학의 실험에 의하면

산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를 나타내는 파동함수가 중첩되어 나타나게 된다.

이는 생사를 동시에 만족하는 고양이가 존재하는 꼴이 되고

바로 이 점을 슈레딩거가 짚어 코펜하겐 해석의 모순을 비판한 것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수많은 고전 물리학자들이 코펜하겐 해석의 모순을 지적했지만

양자 역학자들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갈릴레이가 숱한 종교적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외친 것처럼.

 

특히 닐스 보어는 거장 아인슈타인과의 논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지속된 반론을 조목조목 받아쳐 화제를 낳았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실험 결과물들이 차곡차곡 쌓이자

양자 역학은 온갖 저항을 물리치고

마침내 명실상부한 현대 물리학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사를 동시에 만족하는 슈레딩거의 고양이는 과연 존재하는가?

 

실험에 따르면 그런 해괴한 고양이가 나오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여러 가지 해석이 따라붙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코펜하겐 해석

생과 사가 중첩된 고양이로 존재하다가

관측하는 순간 둘 중 하나로 결정된다.

 

*앙상블 해석

생과 사가 중첩된 고양이를 수만 번 관측하면

결국 50%의 확률로 가리는 것처럼 통계적으로 따져 해석해야 한다.

 

*에버렛 해석

고양이가 살아있는 우주와 죽어 있는 우주가 공존하며

측정하면서 그중 하나가 선택된다.

 

현대 물리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이상의 해석을 보게 되면

도대체 과학이 맞는지 의심부터 일 것이다.

실험과 검증한 바를 수학적 언어로써 분명하게 해석하던

기존의 과학과는 판이 아닌 말이다.

이처럼 현대 물리학이 시작되면서부터는 과학의 영역에 철학이 개입하게 되었다.

그만큼 불확실하고 모호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소립자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상태중첩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해석이 난립하고 어느 한 가지로 통일되지 못한 것은

그만큼 기괴하기 때문이다.

생과 사를 동시에 만족하는 고양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런데 우리가 사고를 180도 바꿔보면 어떨까?

상태가 중첩된 것이 본질이고

그중 하나를 선택한 것이 환영이라면

다시 말해 생사가 중첩된 슈레딩거의 고양이가 실제이고

측정 이후 생사가 결정된 고양이가 가상이라면 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가지고 고뇌한 철인이 있다.

장자의 재물편에 보면 꿈 이야기가 나온다.

 

장자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즐겁게 날아다니다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는 나비와 장자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나인지에 대해 고심하게 됐다.

도대체 누가 실제이고 가상인지를 혼란스러워 했다는 얘기인데

우리도 장자처럼 모든 것을 백지로 돌려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될까?

 

도대체 슈레딩거의 고양이와 측정 이후에 고양이 가운데

어느 것이 실제이고 가상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차원의 문제를 면밀히 짚어봐야 한다.

, 2차원 평면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장소는 피라미드의 밑바닥이다.

3차원 생물 중에 2차원을 가장 잘 이해할 법한 지렁이가 되었다고 연상해도 좋을 것이다.

 

피라미드의 밑바닥 세계는 언제나 사각형의 물체를 접할 수 있다.

그런데 태양이 떠오르면서 사태가 돌변했다.

사각형이던 물체에 겹쳐서 삼각형의 그림자가 길게 생겨난 것이다.

그러자 평면 세계 사람들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각형인 줄 알았는데 삼각형의 성질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사각형과 삼각형을 동시에 만족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란 생각만 들 뿐 해답을 찾을 길은 요원했다.

 

만일 평면 세계 사람들이 3차원 세계로 올라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들이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었던

삼각형과 사각형을 동시에 만족하는 사각뿔을 보게 될 것이다.

3차원 세계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차원을 낮춰 2차원에서 그것을 보면 불가능한 것이 된다.

 

같은 원리로 우리 역시 3차원에서 보기에

생사 공존의 고양이가 기괴하게 보이는 것은 아닐까?

4차원에서 보면 그것이 사각뿔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만일 소립자들이 질량을 잃어버리게 되는 과정에

일부나마 4차원이 투영된다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거시 세계의 물리 법칙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4차원의 굴절에 의해 기괴한 현상이 줄을 있고

그것이 인과관계를 무너뜨리면서 불확정성의 원리를 도출하게 된다.

결국 저마다의 해석이 달라지고

형이상을 다루는 철학을 과학에 수혈하는 긴급 사태까지 발생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양자 역학의 현주소가 아닐까?

 

2차원 평면 세계 사람들이 사각뿔을 접할 때처럼

우리 역시 서로 상반되는 두 성질이 중첩되는 현상을 접하고 있다.

입자와 파동을 동시 만족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우리가 실험실에서 어떤 입자의 위치를 측정하면 운동량이 모호해진다.

역으로 운동량을 측정하면 위치가 불확실하게 된다.

마치 2차원 평면 세계에서 사각뿔의 한쪽 면을 접하면

다른 한쪽 면이 숨는 것처럼 말이다.

2차원에서 삼각형과 사각형을 동시에 취할 수 없는 것처럼

3차원에 살고 있는 우리는 4차원의 그림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선택할 때 비로소 그 실체가 분명해진다.

여기서 실체가 분명해진다는 것은 3차원의 질서 안으로 들어온다는 뜻이다.

 

그럼, 이제 철학적 결론을 내릴 때인 것 같다.

 

우리는 선택이 끝난 후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렇기에 선택이 유보된 슈레딩거의 고양이 같은 상태 중첩이 낯설고 기괴하게 다가온다.

2차원 평면 세계 사람들은 사각뿔의 한쪽 면만 결정하여 받아들인다.

삼각형을 취하든 사각형을 취하든

그들에게 있어서 두 개를 동시에 만족하는 사각뿔은 환상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3차원에 사는 우리들 역시 입체적으로 결정된 상태에서 살아간다.

우리 세계에서는 생과 사를 동시에 만족하는 슈레딩거의 고양이를 볼 수 없고

그렇기에 소립자 세계에서 발생하는 상태 중첩 현상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삼라만상 모든 것이 상태중첩으로 되어 있고

그것이 어느 한쪽으로 결정되면서

3차원 세상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면 안 될까?

 

이런 제안은 2차원 세계 사람들에게

[삼라만상 모든 것은 입체로 되어 있고

당신들은 그것의 어느 한쪽 면만 본다

다른 쪽 면도 한꺼번에 받아들이면 안 되겠는가?]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3차원 세계에 살고 있기에

2차원 평면 세계 사람이 사각뿔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역시 4차원 세계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냐?

본의 아니게 3차원의 벽에 꽁꽁 갇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슈레딩거의 고양이에 거부감을 갖는 것은

상태 중첩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모르는데 기인한다.

그렇기에 선택 시에 우주가 쪼개진다느니

경우의 수를 수만 번 늘려 확률로 접근해야 한다느니

숨은 변수가 드러나면 인과론이 적용된다느니 하는 해석들이 덧칠해진 것이다.

3차원 입체 세계는 질량이라는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4차원에 중첩된 상태에서 3차원의 입체적으로 결정된 것을 의미하며

그렇기에 무언가 실체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한쪽 면을 선택함으로써 생겨난 착시 현상이다.

장님이 코끼리의 코를 더듬으면서 뱀같이 생겼다고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태 중첩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우리의 이해 범죄로 끌어오기 위해서는

[정보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정보를 모르면 상태 중첩을 알 수 없고

나아가 참되게 존재하는 방식에 다가설 수 없다.

 

정보란

[변화의 방향성]을 말한다.

쉽게 말해 변화의 설계도 같은 것인데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기에 변수가 무수히 있게 된다.

 

정의로워야 한다는 정보를 예로 들어보자.

이 정보는 실체가 모호하다.

이것이 실체로 나오려면 결정을 해야 한다.

어떤 이는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으로서 결정할 것이다.

다른 어떤 이는 나쁜 사람을 혼내주거나 혹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이 교도를 테러하는 것으로서 결정할 것이다.

이처럼 정보는

결정하기 전에는 상태가 공존하여 모호하고,

결정된 뒤에야 비로소 어떤 상태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슈레딩거의 고양이 역시 정보이다.

정보이기에 생과 사를 동시에 만족한다.

이것이 관찰과 동시에 3차원으로 쪼그라들면서 어느 한쪽으로 결정되고,

우리가 친숙하게 보고 느끼는 것들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정보로 이루어진 세상!

정보가 관념의 벽을 넘어 물리 법칙과 실제 생활에 자연스럽게 적용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 4차원 세계일 것이다.

그래서 4차원 세계는 시공을 초월한 초입체의 구현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