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1

[나탐 NAtAm] 자유의지가 있을까?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우주의 존재 원리와 관찰자 한방에 이해하기 |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한다? 안 한다?

Buddhastudy 2023. 7. 31. 19:45

 

 

 

인간의 자유의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논쟁거리 중에 하나입니다.

 

지난 영상에서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할 수 없는지에 대해 알아봤죠.

이번 영상에서는 왜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할 수 없는지

그리고 여러 가지 가능성의 미래가 있다면 운명을 바꿀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자유의지를 이해하시라고 이번 영상에

신과 인간, 그리고 이 우주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우주의 원리에 대한 설명을 한 방에 다 넣어 보았어요.

 

자유의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관찰 대상과 관찰자인데

이를 쉽게 이해하시라고

현실에서의 체험을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으로 비유하겠습니다.

 

우리가 생생하게 보고 느끼고 체험하게 되는 모든 현상은

우리의 마음이 투사되어서 나타납니다.

영화관 스크린 위에 영화 장면은

필름이 투사되어 나타나는 것과 같은 원리에요.

이 우주 전체는 스크린 위에 투영되어 있는 홀로그램과도 같습니다.

 

 

--현실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

현실이 체험될 수 있으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나요?

의식, 마음, 관찰대상, 관찰자, 관찰이 함께 작용할 때 현실이 체험됩니다.

 

일단 의식이 켜져 있어야 하고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영화를 볼 수 있으려면 영사기가 켜져 있어야 하고, 필름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죠.

또한 영화를 내가 마치 직접 겪고 있는 것 마냥 생생하고 실감나게 볼 수 있으려면

-관찰 대상에 해당하는 영화 속 주인공을 포함한 영화 장면이 있어야 하고

-그 영화 장면을 보는 관찰자가 있어야 하고

-관찰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빠진다면 현실은 체험되지 않아요.

 

만약에 영사기가 켜져 있지 않다면 영화는 상용되지 않고

영사기가 켜져 있어도 필름이 없다면 영화는 상영되지 않습니다.

또한 관람 대상인 영화 장면이 없다면 영화를 체험할 수 없고

관람자가 없거나 관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영화를 체험할 수 없게 되면서

영화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현실이 체험되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본다, 듣는다, 냄새 맡는다, 맛본다, 만진다, 움직인다, 이동한다, 말한다, 생각한다, 느낀다 등의 인식과 체험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당연히 내가 무엇이다라는 인식이 일어날 수가 없으니까

자아가 존재하지 않고 시공간이 존재하지 않죠.

 

여러분 자아의 이름을 아무개라고 해볼게요.

안녕하세요

여러분이 방금이 소리를 인식했다면

현재 여러분의 의식은 켜져 있고

마음이 투영되어 나타난 박수 소리를 듣는 아무개라는 관찰 대상을

관찰자로 관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박수 소리를 듣는 아무개 자아는 관찰 대상입니다.

관찰자는 인식되는 영역 너머에 있습니다.

 

현실 체험 시 관찰 대상과 관찰자는 따로 존재하거나 분리될 수 없고

항상 세트로만 존재합니다.

자전거를 탈 때 앞바퀴와 뒷바퀴가 함께 굴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왜 자유의지가 있다고 할 수 없는가? (관찰 대상)

, 본격적으로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건데요.

우선 지난 영상에서 설명드린 내용인

왜 인간에게 자유지가 있다고 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짚어본 다음에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여러분의 아무개 자아가

초코우유와 딸기우유 중에 무엇을 마실까 고민하다가

초코 우유를 선택하게 된다면

보통은 나는 이 인간 아무개고 내가 내 의지로 직접 초코우유를 선택한다고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인간 자아에 국한된 관점이 아닌

좀 더 넓은 범위의 관점에서 이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아무개가 초코우유를 선택하는 장면은

인식되는 것으로 관찰 대상입니다.

관찰 대상에게 자체적인 의지라는 것이 있을까요?

이는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 속 게임 캐릭터에게

자체적인 의지가 있는가를 떠올려보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게임 캐릭터의 행동은 저장된 게임 데이터 내용대로 나타납니다.

게임 스토리상 밭에 작물을 심기로 되어 있는 게임 캐릭터가

갑자기 명령을 거부하고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든지 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죠.

 

만약에 게임 캐릭터가

작물 심기를 거부하고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면

그 역시도 데이터의 내용입니다.

 

나를 인간 아무개 자아 그 자체라고 정의한다면

그런 내가 하는 행위는 무의식의 프로그래밍 된 대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아무개에게 주체적인 의지가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의 주체와 자유의지

근데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게 있죠.

[현실은 마음의 반영이다.]

 

그렇다면 현실에 초코우유를 선택하는 장면이 나타난 바탕에는

내 마음이 있는 것이네.

내가 초코우유에 대한 마음을 품고

내가 초코우유에 대한 마음을 냈으니까

초코우유를 선택하는 장면이 나타난 거지.

 

내가 내 삶에 원하는 결과 A

원하지 않는 결과 B중에

A를 열심히 끌어당김 하고 무의식 정화해서

결국 A를 이루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창조하는 현실이니까

내가 내 의지로 그것을 이루게 되는 것이 아닌가, 헷갈리죠.

 

마음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A에 대한 마음을 품는다

A에 대한 마음을 내는 나

A에 대한 현실을 창조하는 나는 자아입니다.

관찰 대상입니다.

게임 캐릭터는 게임 스토리상 A에 집중하기로 프로그램이 되어 있기에

현실에 A에 집중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내 마음이라고 할 때 이 마음은요, 잠시 빌리고 있는 것입니다 .

여러분이 삶을 사는 동안 육체가 내 것인 것처럼 느껴지니까

내 몸이라고 표현을 하잖아요.

하지만 여러분은 몸이 사라져도 그대로 존재합니다.

육체는 현실 체험을 하는 동안 잠시 빌리고 있는 것이고

죽어서는 가져갈 수 없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여러분 마음이 사라져도 여러분은 그대로 존재합니다.

마음은 현실 체험을 하는 동안 잠시 빌리고 있는 것인데

이때 이 마음이 내 것인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내 마음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내 것인 적은 없습니다.

 

마음은 우리가 숨을 쉴 때

폐 안을 들락날락 거리는 공기와도 같아요.

들숨에 공기가 내 안에 훅 들어오면

잠시 공기를 나의 일부인 것처럼 느낄 수는 있죠.

또한 날숨에 이 공기가 내 코를 통해서 훅 나가면

나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느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공기가 내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내 마음을 내가 주체적으로 생성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나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현실 체험에 있어 내 것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화관 스크린에 투영된 영화 주인공이나 영화필름을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요.

 

스크린에는 빛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몸도 내 것이고 이 마음도 내 것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환상 속에 살뿐입니다.

이 세상에는 마음의 주인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기의 주인이 없는 것처럼요.

 

공기와 물을 세상 만물이 다 같이 쓰고 정화하듯이

마음도 다 같이 쓰고 정화할 할뿐입니다.

 

날숨에 초코우유를 먹고 싶은 마음이 훅 나온다면

이는 정확한 인과법칙으로 나타나고

집단이 붙든 마음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납니다.

 

초코우유를 먹고 싶다는 욕구가 나타나는 바탕에는

과거에 단 것을 즐겨 먹었던 경험에 의해서일 수도 있고

당뇨병을 겪었던 조상 밑에 태어나서

나 역시도 미래에 당뇨병을 걱정하게 될 예정이어서일 수도 있고

우리 회사가 붙든 초콜릿 판매량을 늘리고 싶은 집단 무의식에 의해서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 폐 안에 미세먼지 공기가 머물게 된다면

이 미세먼지 공기는 내가 자체 발생시킨 것이 아니라

산업시설, 자동차, 난방, 산불 등의 수많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나는 것이잖아요.

숨을 쉬고 살아가는 동안은

언제라도 미세먼지 공기가 내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공기의 주인은 바로 나야 나

내가 이 공기를 생성하고 발생시킨 거야라고 할 수 없기에

나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자유의지가 없다고 할 수 없는가? (관찰자)

본론으로 들어와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지에 대해서 알아볼게요.

 

여러분은 단순히 관찰 대상인 아무개 자아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현상을 주시하는 관찰자로도 존재합니다.

자전거에는 앞바퀴뿐만 아니라 뒷바퀴도 있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자전거 너머에는 너머라고도 할 수 없지만 참나가 있습니다.

, 참나, 진아, 전체, 의식, 절대계, 하나님, 부처님, 창조주

뭐라고 부르시든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니까 자유롭게 부르시고요.

 

신에 대한 이야기는 막판에 하고

일단은 관찰자에 대해서 알아볼게요.

여러분은 지금 관찰자로 여러분의 아무개 자아가

이 영상을 보는 장면을 관측, 관찰, 주시하는 상태입니다.

물론 관찰자는 그저 주시할 뿐입니다

그 순간에 관찰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은 관찰 대상입니다.

 

관찰자란

어디선가 날 지켜보는 분리된 존재 같은 거 아니고요

여러분 안에서 관찰을 하고, 관찰이 되는 상태가 동시에 일어납니다.

안 이라고도 표현할 수 없지만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려다 보니

관측, 관찰, 주시 등의 표현을 쓰는 것일 뿐

관찰자에게는 눈이나 위치 행위 등이 없습니다.

 

눈으로 보는 거 아니고요

현실 장면을 통으로 보되 본다는 인식 없이 봐 보세요.

눈을 떠도 감아도 관찰은 그저 일어납니다.

 

이번에는 현실을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에 비유해 볼게요.

비유하자면 모니터상에 나타난 게임 캐릭터와 게임 세상이 관찰대상이고

그 모니터를 주시하는 자가 관찰자입니다.

 

게임의 바탕이 되는 게임 파일 속 데이터는 마음과도 같습니다.

관찰자에게 눈은 없지만 설명을 해야 하니까

영상에는 눈으로 표현을 해 볼게요.

여러분이 모니터 밖에서 모니터상에 나타난 시뮬레이션 게임을 주시하는 위치에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자아를 갖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상태는

모두 화면 속에서만 일어나고 있고

여러분은 그걸 그저 주시할뿐입니다.

이때 관찰 대상인 게임 캐릭터는

데이터 내용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에 자유지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게임을 주시하는 관찰자는 어떠할까요?

관찰자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할 수 있는 영역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즉 관찰자는 자유의지가 있다 없다,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아요.

즉 관찰자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관찰자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관찰자를 사람처럼 보시면 안 되고요

관찰자에게는 자아가 없습니다.

관찰자에게는 몸도, 마음도, , , , , 손 등이 없어요.

관찰자에게는 ‘TV 채널 뭐 볼까?’ 하면서 리모컨 눌러댈 손이 없어요.

게임 캐릭터야, 밭일 그만하고 장보기 해라하고 명령할

키보드, 마우스 두드려 댈 손이 없습니다.

 

이 영화 재밌네하면서 팝콘 집어먹을 손과 입과 눈이 없어요.

이런 관찰자에게 선택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관찰자는 관찰대상이 어떻게 펼쳐지든 그저 주시할 뿐입니다.

 

여러분 꿈꿀 때 꿈속 현실이 어떤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펼쳐지든

관찰자는 그거를 참견하지 않고 그저 주시하고 있어요.

관찰자는 선택이라는 것이 가능한 영역에 있지도 않고

선택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영역에 있지도 않습니다.

 

 

--중간 결론

그래서 중간 결론은 뭐다?

관찰자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관찰 대상에게는 자유지가 있다고 할 수 없다.

나라는 것을 관찰 대상 그 자체로 규정할 수 없고

관찰자 그 자체로도 규정할 수 없기에

나에게 자유의지가 있다 또는 없다의 한쪽 결론을 내리는 순간

틀린 결론이 된다.

 

 

 

 

--인생에 여러 가지의 길이 있는가?

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선택이라고 할 만한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아닌가?

게임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결말이 다양하듯이

인생의 방향에도 여러 가지 시나리오의 가능성이 있다면

다른 시나리오를 겪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 운명이 바뀌는 것이니까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알아볼게요.

 

일단 인생게임 중에 겪을 수 있는 시나리오가 여러 가지인 것은 맞아요.

여러분이 겪을 수 있는 현실의 수가 몇 가지나 되는지

그리고 그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알아볼게요.

 

옛날에 인기 있었던 게임인 프린세스 메이커 아시나요, 여러분?

캐릭터를 육성하는 게임인데 이 게임 데이터에는 수많은 스토리가 들어 있습니다.

캐릭터가 도달할 수 있는 인생의 방향으로

건축가, 광부, 철학자, 장군, 사채업자, 농부, 모험가, 상인, 스포츠 선수, 도둑, 귀족

노예, 예술가 등 수많은 길이 존재요.

더 세부적으로 캐릭터가 A와 결혼을 해서 펼쳐질 스토리

B와 결혼을 해서 펼쳐질 스토리 등이 모두 들어있어요.

프린세스 메이커 5편에는 총 50개의 스토리가 있다고 해요.

이게 우리 인생 체험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내용은

게임 CD 혹은 게임 파일 안에 저장된 데이터와도 같습니다.

게임 캐릭터는 게임 파일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불가능하죠.

마찬가지로 무의식은 인식되는 영역은 아니지만

만약에 이를 인식할 수 있다면

마음 데이터로 표현될 수 있는 현실의 개수는 얼마나 될까요?

무한대입니다.

여러분이 경험 가능한 현실의 개수는 무한대에요.

 

이를 아주 간단하게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마음속에 원 하나를 그려보시고

그 안에 각기 다른 색깔의 점을 최대한 많이 찍어보세요.

그 안에 찍을 수 있는 각기 다른 세계의 점들의 개수는 얼마나 될까요?

무한대입니다.

 

그리고 원 전체를 각기 다른 각도에서 보는 눈들이 있다면

최대 몇 개의 눈이 있을 수 있을까요?

무한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아무런 한계가 없이 무한하게

창조될 수 있는 우주의 수 역시도 무한합니다.

여러분 마음 안에 이미 무한한 모든 시공간대 우주가 통째로 저장되어 있어요.

 

아무개가 공책에 숫자 0을 적을 경우, 0.1을 적을 경우, 0.12를 적을 경우 등

무한대의 각기 다른 스토리의 데이터가 여러분 마음 안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아무개가 초코우유를 선택하는 경우

딸기우유를 선택하는 경우

아무 우유도 고르지 않을 경우 등의 모든 데이터가 저장되어 있는 거예요.

이러한 상태를 [다중우주]라고도 표현할 수 있고

양자역학에서의 [양자 중첩]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죠.

 

나타날 수 있는 현실의 수는 무한대이지만

이를 관측하지 않는 한은 현실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모니터를 보고 있지 않으면

게임 현실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죠

관측하는 순간에는 한 가지 경우의 현실 장면만 나타나게 됩니다.

 

경험 가능한 현실이 무한대라고 해도

게임 캐릭터 입장에서는 단 하나의 스토리만 경험하게 되기에

선택이라는 것이 있다고 할 수 없죠.

 

저장된 스토리가 50개라고 해도

관측할 때는 한 가지의 스토리만 나타나게 됩니다.

이를 우리가 쉽게 체험해 볼 수 있는 것이 꿈 현실입니다.

 

꿈 현실도 이 현실과 창조 원리가 동일해요.

꿈 현실에서도 여러분은 관찰자로 꿈 현실을 생생히 체험하는 관찰 대상을

관찰하는 상태로 있습니다.

꿈 현실에서 시공간이 끊임없이 변화하죠

꿈 현실에서 학생이었다가도 직장인이었다가도 하면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겪습니다.

여러분의 물질 자아는 새 직장에 다니는데

꿈 자아는 여전히 전 직장에 출근하기도 하죠.

 

여러분의 마음 데이터에는

아무개가 전 직장을 계속 다녔을 경우의 내용

아무개가 전 직장을 그만두었을 경우의 내용이 이미 모두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가능한가?

, 마음 데이터에 저장되어 있는 스토리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우리가 TV 화면으로 볼 수 있는 채널의 수는 무한대에요.

근데 이때 내가 보고 싶은 채널을 선택해서 보는 것이 가능한가?

이 체험에는요 선택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체는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하나인 것이 찰나이자 영원한 상태로 모든 가능성의 우주를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TV 채널이 총 50개라면 하나인 것이 50개의 채널을 다 보는 겁니다.

시공간이 없는 차원에서 보면 50개의 채널을 통째로 한 번에 찰나로 보는 것이고

시공간이 있는 차원에서 보면

1번부터 50번까지 보고, 1번부터 다시 50번까지 보고, 다시 1번부터 50번까지 보고

이거를 무한 반복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여기에 선택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까요?

 

쉽게 예를 들면

여러분이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너무 사랑해서

혼자 31가지 맛을 찰나이자 영원히 다 맛보는 겁니다.

31가지 맛을 다 사랑하는데

어떤 맛은 선택이고 어떤 맛은 선택이 아닐 수가 있을까요.

 

여러분은 물방울이자 물 전체입니다.

나를 굳이 무엇이라고 칭한다면

나는 물이자 흑이자, 개미이자, 강아지자, 삼세이자, 남자이자, 여자이자, 아기이자

노인이자, 초코우유를 고르는 아무개이자, 딸기우유를 고르는 아무개이자

기원전 400년도에 노예였던 아무개이자

1300년도에 귀족이었던 아무개이자

4천년도에 외계 행성에 사는 아무개이기도 한 것입니다.

 

 

--무한하고도 텅 빈 우주 (환상게임)

컴퓨터가 켜져 있을 때는 하나인 것이

무한대의 자아로 무한대의 시공간 우주를 경험합니다.

하지만이 무한대의 시공간 우주의 모든 데이터는

결국 하나의 게임파일 안에 들어있듯이

모든 시공간 우주는 이미 통째로 한 덩어리이기에

시공간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컴퓨터가 꺼져 있거나 모니터를 주시하지 않을 때에는

게임 데이터 게임 파일이나 수많은 게임 세계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듯

의식을 켜고 관찰하지 않는 이상은

마음 데이터와 무한대의 우주라는 것은 실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대체 무엇을 나의 의지이고 나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시 한번 우리는 내가 주체적으로 나의 의지로 무엇을 한다는 환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

그래야만 이 현실 체험의 실감 나니까요.

 

주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

체험이 실감이 나겠습니까?

내가 직접 키보드 두드리고 게임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개임을 시작한 적도 끝낸 적도 없고

게임은 그저 자동 플레이되고 있었을 뿐이고

그동안 게임을 직접 한 것 같은 환상

그리고 게임 세상이 진짜인 줄 알았던 환상 속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면

게임을 하는 게 의미가 있겠느냐는 말이죠.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

하지만 그래도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당연히 우리 자아 입장에서 삶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소중합니다.

그걸 느끼려고 이 게임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여러분의 마음 데이터에는

아무개가 평생동안 인정받지 못하고 삶을 마감할 시나리오 A

아무개가 삶의 어느 시점에서 인정받지 못한 나를 받아들이고

인정받는 경험을 하게 되는 시나리오 B가 모두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시나리오 B를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이런 영상을 이해하시는 분은

주인공이 집 나오니(개체로서의 분리)

역시 신난다고 뒤도 안 돌아보고 싸돌아다닌 결과(체험을 너무 많이 함)

결국 집 나와서 개고생하고, 힘들다고 엉엉 울고

그제서야 다시 집이 어디였는지를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있는 영화를 보는 중에 있습니다.

 

주인공이 고통을 겪게 되면서 마음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저항하던 것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카르마가 바뀌고 현실이 바뀌죠.

 

(인정받지 못함 A)로 향해 있던 삶의 방향이 (인정받음 B) 방향으로 틀어지게 됩니다.

그거를 운명이 바뀐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마음을 들여다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냐면

게임 캐릭터가 게임 너머에 관찰자를 인식하고

관찰자를 넘어 참나를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앞바퀴만 있는 줄 알았는데 뒷바퀴도 굴러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관찰 대상과 관찰자가 합동으로 자전거를 굴리게 돼요.

관찰자로서의 주시와 알아차림이 이루어지는 스토리가 펼쳐지게 되고

생각, 감정을 관찰 대상화시키게 되죠.

게임 캐릭터가 접근할 수 없었던 영역인 마음 데이터가

현실에 그대로 떠올라 관찰 대상이 됩니다.

 

그럼, 자아는 데이터의 내용을 파악하게 되면서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그리고 마음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현실이 바뀐다, 운명이 바뀐다,

현실을 원하는 대로 창조한다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이 역시도 뭐다?

역시도 수많은 시나리오 중에 하나입니다.

 

집 나가서 개고생하고(고통받고) 다시 집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는 것이

데이터상의 내용이죠.

 

여러분은 음악가 캐릭터도 관찰하고, 수학자 캐릭터도 관찰하고

마음 탐구자 캐릭터도 관찰하는 겁니다.

마음 탐구자는 마음 데이터를 돌보지

않고 개체로서 분리되는 과정을 겪어보았기에

마음 데이터를 돌보고

하나로써 합쳐지는 과정을 겪는 중이죠.

 

여러분의 삶의 방향을 평생 인정(사랑)받지 못하는 시나리오 A에서

인정받는 시나리오 B로 바꾸고자

하거나 바뀌고 있는 것 같다면

여러분은 이미 A로서의 선택지를 수도 없이 살아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지금 이렇게 단 한 번만 사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모든 개체로서 모든 삶을 살아보는 꿈을

찰나이자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상태로 꾸고 있는 겁니다.

꿈에서 깨면 사라질 것들이지만요.

 

 

--우리가 현실에서 체험하게 되는 것 (해피엔딩)

걱정하실 필요는 없는 게

여러분이 무한대의 게임 스토리 중에 어떤 스토리를 겪게 되든

내용은 각기 다 다르지만

보게 되는 엔딩은 항상 같아요.

 

집 나온 주인공이

무한대의 옵션으로 놀다가

결국에는 집으로 들어가게 되는 스토리입니다.

집에 돌아가고자 한 이상은

어떤 길을 선택해서 가든

모든 길은 같은 집 방향으로 통합니다.

 

어떤 캐릭터로 어떤 스토리를 겪든

여러분이 마음속에 원하는 그것을 체험하게 된다는 이야기에요.

 

사랑이자, 모든 것이자, 하나이자

항상 존재했었고, 항상 존재할 것이고

지금 그저 존재하고 있는

진정한 나에 대한 체험을 하는 것이죠.

 

원 안에 찍힌 점의 수는 무한대이지만

원 전체는 사랑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또한 이 현실 게임의 특징은요

내가 직접 게임을 하는듯한 느낌이 있도록 디자인이 되었습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서 선택을 내리는 느낌

나에게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다는 느낌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게임을 켰다 껐다 할 수 있다는 느낌

내가 현실을 창조한다는 느낌을 느끼게 되어 있어요.

비록 그런 것이 모두 한편에 꾸미자 환상일지라도.

 

여러분이 체험을 하는 동안은 자유의지가 있는듯한 느낌으로

미래는 언제나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듯한 느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만이 가진 축복입니다.

 

 

--결론

그래서 이번 영상의 결론은

자유의지가 있든 없든

현실이 나타나든 사라지든

관찰자 관찰 대상이 나타나든 사라지든

실제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나는 그저 존재합니다.

 

여러분 모두는 지금

이 순간 참나로 그저 존재하고

자유의지 유무 배틀은

참나를 비추는

거울 속에서, 환상 속에서, 꿈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탐이가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을 자유의지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탐구해 보는 꿈을 꾸고 있는 겁니다.

자유의지 따지기는 그저

참나를 인식하는 과정 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 중에 겪는

수많은 꿈속 현실 중의 하나인 겁니다.

 

답은 이미 여러분 안에 있고

여러분 안에서 무엇을 찾게 되든

그 자체가 바로 사랑입니다.

 

시청 감사합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그럼, 다음에 만나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