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1

[Pleia] 감정을 과하게 느낄 때의 부작용–감정이 전하는 메시지 이해하기

Buddhastudy 2024. 7. 10. 19:10

 

 

우리 사회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관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예외가 아니죠.

 

어린 시절 감정을 내보인다는 이유로

부모님에게 혼이 난 경우가 많기에

우리는 은연 중에 감정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

혹은 감정은 나를 곤란하게 한다

심지어 부정적인 감정은 가져서는 안 된다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오랜 역사를 가진 종교에서도

감정은 단지 고통의 원인이라 치부하여

감정은 내가 아니다. 관찰하고 흘려보내라라는 가르침으로

우리가 감정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금기시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의식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시기를 맞아

이제는 감정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이라 하여 억누르고 회피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심리와 정서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감정을 억압받은 에너지의 반작용인지

감정에 대한 지나친 해석과

그 역할에 대한 오해도 많이 나와 있는 듯합니다.

 

그 예가 감정을 느껴주기만 하면 사라진다와

감정은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되며

계속해서 느껴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감정이 생기는 메커니즘과 감정의 역할을 간과한 것입니다.

 

또한 에너지적으로 봤을 때

감정을 억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서와 현실에 심각한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감정에 대한 억압과 집중은 같은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감정은 계속 느끼기만 하면 해결된다라는 말은

이제는 감정을 허락해도 된다는 해방감을 줄 수는 있습니다.

2차적으로 감정 자체에 대해 가지는 저항감이 없어지기에

억압하는 것보다는 감정을 수용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 방법은

감정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도

현실을 해결하는 방법은 더더욱 아닙니다.

감정을 느끼는 데서만 그치면

우리는 감정을 정당화시키는 데서 끝이 날 확률이 큽니다.

 

감정을 정당화만 시키고 멈춘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습니다.

또한 더 이상 내 내면을 살피는 수고를 하지 않으려는

안일함은 아닌지도 함께 봐야 할 것입니다.

 

감정은 지금 내가 창조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창조하게 될 현실의 바탕이 되는

믿음과 정의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살펴보는 동안은

우리의 에너지는 부정적이 아니라

중립을 띠게 됩니다.

 

감정을 가진다는 의미는

무언가에 대한 판단, 정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것이 없다면 감정은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돈과 돌에 대한 감정이 다른 것은

그것들에 대해 내리는 나의 정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여기 내가 믿고 내리고 있는 정의가 내 진정한 자신과 어긋나 있다.

이것을 살펴보아라하는 것입니다.

즉 감정은 코스 변경을 유도하는 내비게이션입니다.

감정이 생기면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느끼도록 허락합니다.

절대 억압하고 회피하고 부정하지 않고 내 것으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이 상황이나 대상 혹은 나 자신에 대해

무엇을 사실이라 믿고 있기에 이런 감정이 생기게 되는 것인가?

내가 정의하고 믿고 있는 것은 과연 사실인가?”

 

감정은 우리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안내자일 뿐이기에

그 역할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우체부가 우리에게 편지를 전달하고 나면

그 편지를 봐야지

우체부를 계속 붙들고 있지는 않습니다.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역할은 보지 않고, 감정 자체만 느끼는 것으로는

감정을 충분히 활용한 것도, 내가 배워야 할 무언가를 인정한 것도

아니게 됩니다.

 

한 번 생긴 감정이라 해서 바꿔서는 안 되고

필요 이상으로 매달려서 느끼고 느끼고, 또 계속 느끼고 하는 것은

감정에 대한 오용이고

에너지적으로도 엄청난 역효과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저항하는 에너지와 집중하는 에너지는

모두 내 현실에 남게 돼 있는 것이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어떤 믿음과 정의가 있는지 알아보게 되면

이것을 선호하는 쪽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것을 내가 믿고 있었단 말인가?” 라고

알아보게 될 수도 있고,

이럴 때는 저절로 그 믿음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믿음을 바꾸지 않는 이유는

이 부정적 믿음이 다른 긍정적 믿음보다

나에게 더 도움이 된다라는 또 다른 믿음 때문입니다.

 

그 믿음을 내려놓게 되면

감정도 따라서 변하거나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물론 어떤 대상을 잃은 슬픔 등에서

누군가를 잃을 수 있다라는 믿음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안다고 해도

인간인 우리에겐 물리적 정신적 상실감이

쉽게 지워지지 않기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떠한 감정이든

스스로에게 필요한 만큼의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하겠지만

필요한 정도를 넘어

감정을 절대적인 존재로 취급할 이유는 없습니다.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이 두려워 울고 있는 아이에게

그래, 내가 믿고 있는 게

엄마가 너를 버리고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이지?

네 감정이 그렇다면 나는 그걸 바꾸려 하지 않겠어.

너 역시 감정을 바꾸지 말고

그 두려움을 계속 느끼고 또 느끼고 느끼고 있어라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엄마는 금방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아이를 안심시키지 않을까요?

물론 아이는 당장 그 믿음을 바꾸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엄마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봤을 때

그 감정은 사라지게 됩니다.

 

엄마가 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그에 상응하는 감정도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의 감정을 바닥까지 느껴 깨달은 것도

결국은 그 감정의 원인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아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감정에서 헤어나오게 된 것이죠.

 

이러한 극적인 상황을 선호한다면

그것 역시 해볼 가치가 있으나

모두에게 이런 과정이 필요한 것도 또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감정은 증상이지 원인이 아닙니다, 결코.

원인이 있는 한 이것은

계속 내 현실에 나타날 것이고 되비쳐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 원인인 믿음과 정의를 알아볼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