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이란
한마디로 나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반드시
나 아닌 것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나와 다른 것이 있어야
나를 비추어
나인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니까요.
그래서 의식이란 다시 말해
나인 것과 나 아닌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 동물들에게는
나라는 의식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고
적인 줄 알고 으르렁거리는 게
그 증거라고 하죠.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동물들은 거울이라는 도구가 무엇인지 이해를 못하는 것이기에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이 자신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다른 대상이라 생각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나 아닌 다른 것이 있다’라고 알아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무엇인지 역시 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에 대한 인식과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알아보게 되는 인식은
공존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의식만큼 복잡 다양하지는 않지만
동물들 역시 자신에 대한 의식이 있습니다.
동물뿐만이 아니라 식물, 광물에게도
그보다 훨씬 단조롭지만
자신에 대한 의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돌은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비치는 의식으로
자신들에 대한 의식을 가진다고 합니다.
즉 내가 이 돌과 저 돌을 구별하여 바라볼 때
이 돌은 ‘내가 저 돌이 아니라 이 돌이구나’라는 의식을
인간을 통해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물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나름의 지성이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 세상은 의식으로 만들어졌으며
의식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의식이 없으면 나도, 세상도 없습니다.
의식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입니다.
또한 의식을 비출 다른 무언가가 없다면
즉 경험할 것이 없다면
의식이 있어도 자신에게 의식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의식이란
나를 알고, 나를 경험하는 모든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근원의 의식에서 기원하였기에
신, 근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식으로 교체해도 좋을 동의어라 하겠습니다.
우주적 지성인 근원은 의식이며
의식은 근원입니다.
이러한 의식에도 모양이나 형태가 있을까요?
원의 모양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다른 우주는 차치하고
우리 우주에서 여러 힘과 압력의 작용으로
가장 안전하게 효율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둥근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질량이 무거운 천체들뿐만 아니라
비눗방울과 물방울 등도 모두 원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시다시피 표면장력이라는
에너지를 최소화하려는 작용 때문이죠.
이러한 원형을 갖기 위한 공통적인 환경은
안과 밖,
서로 다르게 작용하는 내부와 외부의 힘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
둥근 모양의 경계가 나오는 것입니다.
즉 모양이 있다는 말은, 경계가 있다는 것이고
경계가 있다는 것은, 한정돼 있다는 것입니다.
한정과 경계는
여기에 속하는 것과 속하지 않는 것,
그리고 안과 밖의 구별을 만듭니다.
근원에게 모양이 있다는 것은
근원이 한정돼 있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근원에게 속하지 않은 것이라거나 근원 밖이라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경계와 모양, 안과 밖이라는 게 있을
공간이란 것이 없습니다.
공간이란
경험을 하기 위해 창조된 환상입니다.
공간은 근원이 창조한 것이기에
근원의 의식이 존재하기 위해
공간이라는 환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간혹 개별적 의식으로 분화한 영혼들이
가장 릴렉스한 상태로 휴식을 취할 때
둥근 에너지 모양을 띠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영혼이 만드는 프로젝션일 뿐
실제 모양은 아닙니다.
영혼은 원래 의식이며
의식에는 모양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의식은 형태나 모양을 표현할 수는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그 어떤 모양이나 형태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식은 하나에서 나왔지만
그 진동과 주파수를 달리하여
각 차원과 모든 우주의 다양함을 창조하였습니다.
다이아몬드의 각각의 면들처럼
의식 역시 각각 다른 측면으로
혹은 무지개처럼 여러 겹으로 표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의식에는 여러 다양한 층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차원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물질계도 의식의 다양한 표현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에너지라 부르는 것 역시
의식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의식이므로
우리는 의식을 떠날 수 없으며
나 자신도 의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의식이 분화하여
개별적 의식으로 나타난 것을
‘영혼’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개별화된 의식이 특정한 진동으로 결정화시킨 것이
몸과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도 그중 하나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보다 큰 의식 안에 들어 있고
우리의 마음 역시 의식의 한 부분입니다.
바닷속으로 작은 어항을 넣고
그 어항 안에 물고기를 넣었을 때
그 작은 어항에도 바닷물이 차게 되겠지요.
어항 뚜껑을 닫으면
그 안에 물고기들은 그 작은 어항만큼의 바닷물만
자신들의 세상이라 여기고 살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마음만큼만 의식이라고 여기겠지만
우리가 가진 의식은
더 큰 의식이 만들어내고 있는 여러층들의 의식 중 하나로
아주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의식이라는 바다 안에 들어 있습니다.
소위 높은 의식을 가졌다라는 건
어떤 의식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얼마나 부정적인 믿음 체계가 적으며
자기 사랑을 실현하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의식이 소위 높아질수록
믿음보다는 앎으로
감정보다는 존재의 상태와 가까워진다고 하겠습니다.
존재의 상태란
조건 없는 사랑, 기쁨, 환의, 감사, 평화입니다.
이것은 차원의 진동과 파장에 정비례하고 있습니다.
즉 차원이 올라갈수록 의식 역시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의식은 결코 두뇌의 산물도 아니고
두뇌에 한정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두뇌는 우리 의식을 반영하는 기관이며
특정한 전자기장을 물질로 해석해 내는 도구입니다.
두뇌는 두뇌 자체의 의식은 있지만
나라는 존재를 나타내는 의식은
두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두뇌에서 의식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은
TV 속에서 사람들을 찾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TV는 전파를 수신하고 반영하는 것이라는 걸 안다면
TV 속에서 영상의 실체를 찾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감으로 인지하는 것 역시
우리 의식의 작용이고
오감을 느끼는 재료를 선사하는 것 역시
의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의식이 어렵게 여겨지는 것은
의식을 부분으로만 보고
한정된 곳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의식은 우리를 만들었고
우리를 감싸고 있으며,
우리가 하는 모든 작용이라는 것을 안다면
무엇이 의식이고, 무엇이 의식이 아닌지에 대해선
더 이상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듯 합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의식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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