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09)

즉문즉설_법륜스님(제17회) 완전한 출가와 수행생활

Buddhastudy 2010. 11. 17.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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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출가한 제자가 많을까요? 재가한 제자가 많을까요? 재가자 제자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니까 저 분은 부처님의 제자를 출가한 스님들만 제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한 거 같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마음의 눈이 떠졌다 이게 불자입니다. , 무지가 깨어지면서 마음의 번뇌가 사라지고 고뇌가 사라져서 행복해져야 불자입니다. 절에 다닌다고 불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법을 이해하고. 그래서 법을 경험하고. 내가 해탈과 열반의 맛을 보아야 된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내가 기뻐져야 되요. 전보다 기뻐지고 전보다 자유로워져야 되요. 전보다 더 마음이 넓어져야 되. 그런 사람. 부처님을 만나서 당시에 법문을 듣고 다 그렇게 됐어요. 그런 사람 중에 집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완전하게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을 출가대중이다. 출가수행자라고 불렀어요. 또 법문을 듣고 마음의 문이 열린 사람 중에 자기 일상생활을 하면서 수행을 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 사람들이 제가수행자들이다 이거요.

 

5비구 다음에 첫 번째로 출가하신 분이 야사비구거든요. 야사비구는 지금의 바라나시, 당시의 가시국의 제일가는 부잣집 아들이었어요. 그런데 세상살이에 온갖 쾌락을 누리고 살다가. 거기에 탐닉해 있다가. 어느 날 그 모든 쾌락이 곧 고임을 깨달았어요. 낙이 곧 고임을 깨달았다. 여러분들은 인생이 고다. 일체가 고다하면, 왜 고만 있습니까? 락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불교는 염세주의다. 이런 말을 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에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고락이 있는 세상인데. 그 바로 락이 고로, 고가 락으로 늘 돌고 돌기 때문에 이걸 뭐라 한다? 윤회라 그래. 윤회.

 

그러니까 윤회하고 있는 이것 자체가 뭐다? 고다 이거야. 그래서 락이 고임을 확연히 봐야 인생이 고다 일체가 고다. 이걸 알 수가 있는 거요. 그래야 우리가 그 락에 집착을 하지 않는다 이 말이오. 고락을 떠나는 것. 이게 해탈의 길이오. 윤회에서 벗어난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래서 락이 고임을 확연히 깨치자, ~ 일체가 고구나. 이걸 알았기 때문에, 괴롭다 괴롭다 하면서 숲을 헤매다가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 말씀을 듣고 본질을 깨닫고. 그래서 기쁨을 얻었다 이 말이야. 그래서 출가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됐어.

 

그런데 그 아들을 찾아왔던 그 야사비구의 어머니 아버지, 구리가 장자 부부는 도에 대해서 전혀 몰라. 그냥 자기 귀한 아들을 찾으러 왔단 말이오. 그런데 가자는데 아들이 안가는 거요. 그런데 아들의 대답이 이래. 아버지 제 얼굴을 한 번 보십시오. 아버지가 저를 낳아서 지금까지 제 얼굴 본 중에 지금처럼 기쁜 얼굴 밝은 얼굴을 본 적 있습니까? 그래. 아버지가 아들 얼굴을 보니까 지금까지 아들 얼굴 본 중에 제일 밝은 얼굴이오. 아버지 이 좋은 법을 두고 왜 저를 괴로움의 세계로 끌로 갈려고 합니까? 아버지가 할 말이 없어. 그래서 아들의 권유로 이 구리가장자 부부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쳤어요.

 

그런데 이 두 부부가 저희들은 재가에 있으면서 수행정진 하겠다고 부처님께 발원을 했어. 그래서 부처님이 그들에게 준 게 삼귀오계에요. 구리가장자가 마음의 눈을 뜨고 이렇게 부처님께 고백을 했습니다. 위대 하셔라 세존이시여. 위대 하셔라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심과 같고, 덮힌 것을 벗겨내어 보여주심과 같고. 길을 잃고 헤매이는 자에게 길을 가르켜 주심과 같고 어두운 밤에 등불을 비춰 주심과 같이 여러 가지 인연과 비유로 바른 법으로 저희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저희는 지금부터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이렇게 스스로 발로, 우러나서 삼보에 귀의 했단 말이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이 두 부부를 칭찬해 주시면서. 삼보에 귀의한 불자는 5가지 계율을 지켜야 한다. 이렇게 지침을 주니까. 다시 부처님께 절을 하면서 저는 몸과 목숨을 마칠 때까지 이 계율을 꼭 지키겠습니다. 이래서 삼귀오계가 나온거요. 이것은 제가 생활을 하면서 수행정진을 했던 분들이오. 그러니까 부처님의 아버지는 부처님의 법문을 들어도 제가 생활을 했죠. 또 빔비세라 왕도 제가 생활을 했죠. 그런데 부처님의 양모는 남편이 죽자 여자지만 출가를 원했죠. 부처님의 부인도 나중에 출가를 원해서 출가했죠. 그래서 출가를 하는 대중도 있었고, 제가에서 수행하는 대중들도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출가냐 재가냐 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뭐다? 진리의 눈을 뜨고 그것을 행하고 그것을 경험해서 자기의 양식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이 말이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재가자도 승단의 일원이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요. 마음의 눈이 열린 자라야 됩니다. 사부대중에서 우바세 우아이라는 것은 마음에 눈뜬 우바새 우바이가 사부대중에 들어오지.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소승은 출가하신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 식차마나로 승단을 구성합니다. 그러나 대승은 보살로서 승단을 구성합니다. 이 보살은 출가한 스님도 되고, 재가한 신자도 되는 거에요.

 

그래서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로서 승단을 구성하는데 즉, 머리를 기르고 재가에 살아도 마음의 눈이 열려서 보살심을 발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승 불교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 그러나 출가한 스님들은 수행과 교화를 전문으로 하기 때문에 생산 활동을 하지 않죠. 그러니까 그 최소한도의 생활을 보시에 의해서 유지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재가자는 보시를 해야하고. 스님들은 보시를 받아야 하고. 그러나 법을 보시해야 됩니다. 재가자들은 재가에 있으면서 남의 보시에 의해서 살면 안 되요. 반드시 정당한 노동을 하고 그것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고. 오히려 어려운 사람을 돕고, 승단에 보시를 하면서 수행을 해야 된다.

 

서로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약간의 계율이나 생활방식이 다르지. 부처님 법을 믿고 의지해서 수행하는 것은 똑 같아야 한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문제는 우리는 재가신자니까 수행을 좀 안 해도 되지 않느냐? 적게 해도 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수행자라는 의식이 없어져버렸다. 그냥 불교 믿고 좋은데 가겠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분들 자신이 수행자라는 의식을 놓쳐버렸다 이런 얘기요.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은 어디든지 다 가능합니다. 암자라든지 선방만 수행공간이 아니에요. 밥먹고 똥누고 일상생활 하는 모든 것이 우리들의 수행공간이어야 한다. 거기에 까르마 업식에 끄달리지 않고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늘 깨어서 관찰해 해나가면서 정진을 해 나가야 되는 거요. 그럼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