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09)

즉문즉설_법륜스님(제23회) 허약체질로 인한 자신감 결여

Buddhastudy 2010. 11. 25.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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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몸에서부터 병이 일어나서 마음까지도 위축되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그러나 몸이 병이 들면 몸을 고쳐야 되겠지. 다리가 부러졌는데 마음 다잡으면 붙는다. 이런 건 안되잖아. 그죠? 그러니까 몸은 몸으로 다스리는데, 그 몸이 아프다고 마음까지 몸에 끄달려 가지고 아픈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는 몸을 다스리고, 그 다음에 마음도 다스려야 되겠지. 또 반대로 마음에 병이 들어가지고 너무 사람이 슬퍼하거나 괴로워하거나 화가 나면 마음만 아픈 게 아니라, 나중에 몸까지 병들 때가 있죠. 이럴 때는 마음을 먼저 치료하면 몸은 저절로 낫는데.

 

마음이 병들어서 몸이 병들었다 하더라도. 그게 나중에 몸에 완전히 병이 되 버리면 마음을 치료한다고 몸에 병까지 같이 낫는 건 아니란 말이오. 이럴 때는 마음 병도 치료하지만은 몸병도 더불어 치료해야 된다. 그래서 우리의 병이라는 것은 몸과 마음이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이 더 비중이 큰 게 있고. 몸이 더 비중이 큰 게 있고. 몸과 마음이 서로 다 치료를 받아야 될 일이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그래서 몸이 안 좋으면 첫 번째는 양의에 가서 검사를 해보는 게 좋아요. 양의에 가서 검사를 해 본다는 것은 몸의 병일 확률이 높다. 이건 전적으로 몸의 문제다 하면 그냥 몸만 치료하면 되요.

 

괜히 몸에 병 났는데 어디 가서 기도해서 나선다고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야. 그런데 양의에 가서 보니까 특별한 병이 아니다. 병명이 없다. 모를 수도 있지만은 사실은 그 병이 몸에 무슨 특별한 고장이 난 게 아니다. 그러면 한방의사한테 가서 진맥을 해 보면 되요. 그러면 한방하고 양방하고 차이는 양방은 확실하게 부러지거나, 무슨 수치가 떨어지거나, 이렇게 되야 병명으로 나타난단 이 말이오. 그런데 우리 몸에는 이렇게 균형이 안 맞아도 몸이 아프단 말이오. 그런데 진맥을 하면 이런 몸에 호르면 분비라든지 이런 몸의 균형이 서로 안 맞아도 몸이 아프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오히려 보호하는, 또는 균형을 맞추는 치료를 하면 되요. 그런데 한방에 가서 진맥을 해도 큰 병이 아니다. 그런데 몸이 늘 아프다. 그러면 육체의 병보다는 마음의 병. 소위 업병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삼국유사에도 보면 공주가 병이 났는데 온갖 약을 써도 안돼서, 그래서 스님이 와서 기도를 하거나 스님이 와서 법문을 하니까 병이 나았다. 이런 얘기 나오잖아요. 다리 부러졌는데 기도 한다고 다리가 붙었다 이런 건 없잖아 그죠? 이건 업병이다. 마음 병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육체적인 병보다는 마음 병이 더 많아요. 운동부족이 많고.

 

그래서 우리나라 특히 가정주부들, 집에 있으면서 운동부족 현상이 일어나고. 똑같은 업무, 소위 청소하고 밥하고 이런데 늘 이렇게 단순 업무에 놓여있고. 그 다음에 남하고 대화할 시간이 적고. 그러니까 혼자 생각이 많아지고. 옛날에는 교육을 안 받았기 때문에 여자는 이렇게 사나 보다 했는데. 요즘은 학교 교육을 통해서 다 배울 거 다 배우고. 생각할거 다 할 줄 아는데. 다 공부해 놓고는 나중에 집에서 갇혀 사니까.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는다 이 말이오.

 

이런 거는 내 몸이 아프고, 그냥 온갖 약을 먹어도 안되고. 그런데 저 산에 가서 기도처에가서 기도 열심히 하면 한 80%는 병이 나아요. 왜 그럴까? 산에까지 자가용이 착 가는데 말고. 내려서 한 2km는 걸어 가야되는데 가고. 거기가서 또 108배 절하고. 공기 좋은 데서 그것도 절 밥도 아주 간소하게 먹고. 그렇게 다니면 어지간한 병도 다 나아버려요. ? 그게 스트레스기 때문에 그렇다. 거기 가서 법문도 듣고. 염불도 하고 이러면. 그게 뭐 병이 나으니까 영험도량이라고 유명해지지만은. 굳이 그런 종교적인 것을 떠나서도 병이 나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좀 더 깊이 있는 그런 소위 마음의 상처. 이런 것들은 그 정도 갖고 해소가 잘 안 된다. 그건 또 집에오면 또 도진다 이 말이오. 산에 가면 낫고. 집에오면 도지고. 그래서 가끔 어떤 분들은 절에만 가면 병이 낫고. 집에만 오면 아픈 사람 있잖아. 집에만 오면 심리적인 어떤 압박을 받는다는 얘기란 말이오. 이런 상처들은 현재 부부관계나 가족관계에서도 생기지만은. 어릴 때 성장과정에서 상처를 입은 거기 때문에. 소위 무의식 세계 깊이 박혀있어서 쉽게 잘 치료가 안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수행을 통해서 그것을 꾸준히 개선을 해 나가야 된다. 지금 질문하시는 분도 병원에 가서 큰 이상이 없다. 그런데 늘 심리적인 위축, 실지로 하면 하는데 늘 하기 전에는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못 할거 같고. 이거는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형성된 습관이란 말이오. 마음이 일으키는 습관이란 말이오.

 

또 능히 하니까. 남이 옆에서 보는 사람은 그 사람이 그렇게 일을 할 때 마음이 조마조마 해서 1020번 망설이는 줄을 다른 사람은 모르잖아. 결과만 보니까. 그러다가 이 사람이 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저 사람은 잘 하면서 괜히 저렇게 뺀다 이렇게 말한단 말이야. 노래도 보면 시키면 못한다고 빼다 나오는 거 보면 멀쩡하게 잘하잖아 그죠? 그러면 사람들은 그 사람의 심리를 잘 모르니까. 저 사람 뺀다. 잘난 체 한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거기에는 잘 부르고 싶은 욕심. 잘 못 부를까 싶은 두려움. 그리고 또 오랫동안 그런 식으로 늘 이렇게 마음을 망설여 왔던 습관. 이런 게 겹쳐있단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런 병을 고치려면 본인이 말한 데로. 이게 마음에서 망설여지는 걸 알고. 또 해보니까 하고 나서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기 때문에. 이런 망설임이 마음에서 일어날 때 수행의 과제로 삼으란 말이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날까 말까 할 때, 어떻게 일어나요? ~ 일어나 버린다. 하는 것처럼. 망설임이 일어 날 때는 바로 두 번 세 번 생각하지 말고 싹 해버리는 거요. 그냥. 오늘 법회가야지 할 때, 갈까 말까, 갈까 말까 할 때는 어떻게 해버린다? 가버리는 거요. 그냥. 그걸 하지 말고. 그럼 늘 잡아 당기는 게 무의식이거든요. 의식은 가겠다 하는데 무의식에서 안 갈려고 한단 말이오. 그러면 싹 가버린단 말이오. 이렇게 자꾸 연습을 해야 되.

 

그러니까 본인은 깨달음 장도 다녀오고. 자기가 대충 이 마음의 문제구나 하는 거를 어느 정도 알았잖아. 그죠? 그럼 또 그것을 해 본 경험도 있단 말이오. 경험을 해 보니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열려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계속 반복된 연습이 지금 필요해. 반복된 연습, 망설일 때는 ~ 이게 과제다하고 밀고 나가버리고. 망설여 질 때는 또 해버리고. 예를 들면 첫 생각에 보시를 할 때, 10만원을 보시를 해야지. 예를 들어 법문 탁 듣고 아! 인도에 어렵다니까 10만원 해야지. 한 생각이 처음에 바로 났는데, 조금 있으면 10만원 낼꺼까지 뭐 있노? 5만원만 내도 되지 않을까? 또 시간이 흐르면 5만원도 많다. 딴 데 써야 되는데. 이렇게 자꾸 망설여 지면서 떨어지잖아 그죠?

 

그럴 때, 그럴 때는 수행으로, 돈의 문제가 아니고. 이 까르마, 이 업식을 버리기 위한 수행의 방법으로 10만원에 딱 걸리면 20만원을 탁 내 버리는 거요. 투자를 좀 해야 되. 이렇게 갈까 말까 망설이면 확 가 버리고. 할까 말까 망설이면 확 해버리고. 이렇게 오늘부터 달력에 적어서 이런 경우를 확해버린 기록을 100개를 한 번 해 본다. 100번을. 이런 거를 작던 크던, 100개를 한 번 해 본다. 이렇게 해 보면 자신감이 생긴단 말이오. 해보니 별거 아니더라. 그러면 망설임은 그래도 남아요. 그래도 남지만은 망설임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져버려. 그러면 절반은 치료가 되는 거요. 그렇게 해서 그 다음부터는 계속 해 나가면 점점점점 세력이 약화된다.

 

그래서 공부는 언제나 이치를 첫째 먼저 알아야 되고. 이치를 알아도 안되는거는 이렇게 연습을 계속 해야 된다. 그래서 도에는 첫 번째 견도. 이치를 확연히 아는 견도가 있어야 되고.이치를 알아도 안되기 때문에 수도, 반복된 연습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세 번째 단계 무학도. 그래서 더 이상 망설임이 없고 다만 할 뿐이다. 연습할 것도 없다 이 말이오. 연습할 것도 없다는 말은 안 한다는 말이 아니라. 안되는 것을 가지고 연습하는 게 아니다 이 말이오. 되 버리기 때문에. 그래서 깨장에서 어떤 이치가 몸과 마음에 경험되어지면 그 분야에 견도가 열린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뭐 요건 요렇고 저건 저렇고. 책보고. ~ 요런건 스님이 요렇게 답하구나. 요건 스님이 요렇게 답하구나. 그러니까 요건 요러네. 이건 견도에 들어가는게 아니고 지식에 들어갑니다. 지식은 실제 지식도 많이 쌓이면 도움이 되요. 그러나 지식은 이게 실천이 동반되면 도움이 되는데. 그 전까지는 지식은 알음알이라고 해서. 이것은 망상에 속하지. 도에 위상에 못 올라 오는 거요. 그러니까 보살은 계속 과제로 삼고 연습을 해야 되. 계속. 연습할 때는 연습이 잘 안될 때 묻지 물을 필요가 별로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묻는다고 해결이 되는 게 아니니까. 자기가 연습을 해야 되니까. 모를 때는 물어야 되고. 아는데도 안되는거는 계속 연습을 해야 되. 그런데 안다는 것이 착각인 경우가 있단 말이오. 안다는 것이 확연하지 않는 것은 아는 게 아니에요. 그건 안다는 생각. 안다는 망상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요.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