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지난 70년 동안 오늘을 기다렸습니다.
2015년 7월 1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미쓰비시 광업의 탄광에서 일했던
모든 미국인, 전 전쟁포로 분들,
그리고 그 가족들, 유족들에게 사죄드립니다.
-미쓰비시 머티리얼, 기무라 히카루 상무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사죄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에게는
닿지 않은 미쓰비시의 사죄
전쟁 포로가 된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들, 1943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NARA 소장)
식민지 조선인 징용은
합법인 만큼
사과나 배상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죄가를 외면하는
일본의 거대기업 미쓰비시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자신과 모두의 역사를 되묻고 또 되물었던 한 사람
박진주.
전쟁은 최고의 돈벌이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이 자랑했던 가미카제 전투기 ‘제로센’
세계 최대급 전함 ‘무사시’ 등
군수물품을 만들어 떼돈을 번 기업
미쓰비시(三菱)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인명피해를 낳은 전쟁 중에도
노동인력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미쓰비시에겐 징용노동자들이 있었다.
김순길
1945년 1월 조선인 350여 명과 함께
일본 나가사키 조선소로 강제동원
그는 자신의 하루하루를 일기에 담는다.
5월 2일 수 맑음
점심과 저녁으로 주먹밥 1개씩 배식을 받아먹음
점심 주먹밥은 오오노와 나눠 먹음
5월 4일 금 맑음
9시 45분경 공습경보 발령
가네모토 케이칸, 이노우에 에이쇼쿠 도망
5월 12일 토 맑음
23시 경 경계경보 발령
5월 13일 맑음 공휴일
외출은 허락되지 않음.
5월 15일 흐림. 비바람.
나시하라 헤이키치 도망감.
2월 28일 봉급일
임료 ¥ 29.41
가급금 ¥ 7.99
정려금 ¥ 4.35
가족수당 ¥ 15.00
개근영업 ¥ 1.71
-체당금 ¥ 1.00
-하숙비 ¥ 8.80
-국체회비 ¥ 34
-국민저금 ¥ 48.32
현금 지급 ¥ 0
6월 16일
공장 조장에게 구타 당함
6월 25일 10분 경보발령
5명이 도망감
7월 3일 화요일
가노시다 외 선대목공 2명과 협조하여 도망
간밤에는 빈대로 인해 동틀 시간까지 못잠
7월8일 공휴일 15.57분 공습경보 발령
호쿠쥬추, 쇼우레츠 공동으로 도망
니시도마리 숙박소까지 찾으러 나갔으나 행방불명
8월 7일 야마모토와 다카야마 킷도우
도망가지만 잡혀서 기숙사로 돌아옴
미쓰비시의 불법행위가 지속되던
8월 9일 악마 나사사키
그날을 잊지 않기 위해 빠짐없이 적어 내려간
179일 간의 일기
개인의 배상청구원과는 무관하게 체결된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제대로 사죄하지도 책임지지도 않았다.
이대로 잊혀서는 안 된다.
긴 시간을
홀로 싸워야 했던
피해자들
그날 적어 내려간 일기를 들고
47년 만에 증언을 나선 김순길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를 상대로 한
5년간의 소송에서
중요한 증거자료로 쓰인
그의 일기
비록 피해배상은 받지 못했지만
당시 임금에서 떼어내 정립된 후생연금 탈퇴수당
35엔을 되돌려 받는다.
일본 재판부
“미쓰비시와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인정하나
미불임금 및 강제수용 배상 청구권 없음”
“불과 35엔이지만
51년 만에 받아낸 이 돈은
내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금액이다.”
자신의 과거를 한스럽게 생각하며
스스로 포기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일본의 죄과를 그대로 묵인하는 것밖에 안 된다.
8월 9일
악마 나가사키
그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순길
(1922.11.10~1998.2.20.)
박진주,
김순길을 기억하여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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