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자들, 공부가 체험이 안 왔다.
체험이 안 온 사람들은
어떻게 어떤 식으로 공부에 들어가야 되냐면
모든 것이 다 이거 하나예요.
보거나 듣거나 느끼거나 알거나
흔히 모양이 없다, 상상할 수 없다, 어떤 느낌이 아니다, 어떤 경계가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지만
모든 모양의 본성이거든요.
모든 모양의 본성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면
우리가 경험하는 거는 모두 모양이죠.
근데 모든 모양의 본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루 종일 24시간 경험하는 그 모양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 모양을 떠나서 따로 찾으려고 그러면 안 돼요.
우리가 경험하는 게
지금 이렇게 앉아 있단 말이에요.
앉아 있고,
그다음에 지금 뭐 이렇게 숨도 쉴 수도 있고
아니면 손도 이렇게 움직일 수도 있고
우리가 하루 종일 경험하는 그 모든 경험들 있죠.
그 모든 경험들의 본성이에요.
선에서 선사들은 이렇게 하죠.
지금 작용, 작용한다.
지금 작용이 일어나는 거의 본성이란 말이에요.
체험은 어떤 특별한 순간에
어떤 특별함,
순간이라는 건 특별한 경험의 순간
예를 들어서
가만히 앉아 있다거나
아니면 걷는다거나
아니면 뭐 꼭 어떤 소리를 듣는다거나
아니면 어떤 경계를 볼 때만 체험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경험의 순간에 체험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모든 경험의 본성이기 때문에.
근데 나는 늘 모든 경험을 다 하는데 왜 안 되냐? 체험이 안 오냐? 하면은
그 모든 경험의 본성인데
그 경험에 모양에 순식간에 떨어지는 줄 모르는 거예요.
그게 분별에 떨어지는 줄 모르는 거예요.
순식간에 생각에 떨어지는 줄 모르는 거예요.
그걸 자기가 몰라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한라산 어느 천백고지
거기 그림 그려지죠.
그럼 우리 천백고지에 대한 얘기를 하면은
천백고지에 대해서 빠져들어서 막 얘기를 하게 되면
그게 경계에 빠져드는 거잖아요.
여기서 얘기를 할 때
이게 비유가 쉬워요.
천백고지가 눈앞에 있으면
그게 순식간에 분별이 떨어지는 줄 모르는데
지금 천백고지가 아닌 데서 여기서 천백고지 얘기하면서
‘지난 겨울에 그 설경이 되게 멋졌고,
많은 사람들이 탐방객들이 와서
진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차를 가로막고 있었고’
막 이런 얘기를 하면
보통 사람들은 거기에 빠져들어요.
근데 사실은 천백고지 속에 막 들어가서 얘기를 하죠.
이야기 속에 들어가서.
근데 사실은 그게 천백고지에 대한 분별 속에 들어간 거예요.
분별, 생각 속에 빠진 거거든요.
그런 식으로 우리가 순식간에 너무 찰나적으로
그게 그 대상에 빠지는 거예요.
그 분별에 빠지는 거예요.
어떠한 경험을 해도 이건데
순식간에 그 대상에, 이야기에, 스토리에 빠지기 때문에
의미에 빠지기 때문에
뜻에 빠지기 때문에
자기 본성을 체험하지 못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체험이라는 건
어떤 면에서 보면 늘 이것인데
자각을 못하는 거예요.
‘모든 게 그게 아니라 이것이구나’라는 깨달음이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딱 그거 하나예요.
안 되는 이유.
경계에 빠진다.
이야기에 빠진다.
스토리에 빠진다.
의미에 빠진다.
이미지에 빠진다.
그게 분별에 빠진다는 거거든요.
그거를 공부해야 되잖아요.
스스로 체득을 해야 자기 증명이기 때문에.
체험, 체득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는 삶을
이게 실상이라는 거는
절대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다 알 수가 없어요.
이야기는 다 분별이기 때문에.
분별 이전의 거를 한 번은 확인을, 자기 스스로 확인해야지
이 힘으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게 되고
어떤 경계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경계가 따로 있다는 그런 잘못된 믿음이나 착각 속에서 살지 않게 되는 거거든요.
자기 구원이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면
뭘 어떻게 할 필요는 없어.
뭘 앉을 필요도 없고
뭘 염불 할 필요도 없고
사경할 필요도 없고
뭘 할 필요가 없어요.
특정한 행위를 할 필요가 없어요.
체험을 위해서 앉을 필요도 없어.
특정하게 뭘 할 필요도 없어.
우리가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뭘 할 필요는 없어.
단지 일상생활을 하든 평범한 생활을 하든
밥을 먹든, 차를 마시든, 일을 하든
진짜 공부에 뜻이 있다면
어떠한 경계가 아니라는 바른 어떤 이해가 이루어졌다면
스스로 실천이 필요한 거예요.
근데 실천이 어렵죠.
왜?
이게 참 미묘한 일이거든요.
‘어떻게 하면 안 돼’ ‘대상에 빠지면 안 돼’ 하는 것도
이게 대상화라
이게 참 어려운 거예요.
그러니까 공부가 우리 공부하다가
‘그래, 뭐 천백고지 얘기해도 거기에 빠지면 안 돼’ 하는 이 의식이
벌써 다른 내용의 분별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에
자꾸 여기서 우리가 와 닿지 않은 거예요.
근데 어느 순간
자꾸 법문을 듣고 하다 보면은
‘어떤 대상에 빠지면 안 돼’
이런 얘기를 듣다 보면
막 안 빠지려고 해요.
근데 안 빠지려는 것도 빠진 거라는 걸 알아야 돼.
그 순간 진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마음에 없는 그런 것들이
자기 어떤 체험처럼 탁 다가오거든요.
그러면 어떠냐면
그동안에 왜 이게 여러 가지로 보이고
다양한 것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였는지
그걸 체험적으로 알게 돼요.
왜 부처님이나 선사들은 ‘모든 것이 하나’라고 얘기를 하는데
나는 왜 내 삶은 그러지 못했을까?
왜 그게 아니었을까?를 이렇게 보면은
그 희한해요.
마음이 분별에 떨어지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자기한테 느껴져.
분별, 대상화에 빠지면.
의미에 빠지고, 분별, 집착하면
모든 것이 다 있고
어떤 경험을 하든
분별 집착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게 자기 현실이 되는 거를
스스로 그 자기 변화를 통해서 체득하게 되는 거예요.
[분별력이 떨어지면 여러 가지가 있고
분별력이 떨어지지 않으면 하나도 없구나]라는 걸 알게 되는 거에요.
그걸 자기 체험을 통해서 자각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계가 어떻게 창조되느냐?
[한 생각 일어난 분별에 사로잡히면서
이 세계가 이것저것이 다양하게 따로 있는 것처럼 드러나는구나]라는 거를
점점점 공부를 통해서 알게 되거든요.
그래서 이게 와닿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할 필요 없습니다.
어떤 수행을 할 필요는 없고
특별한 어떤 포즈를 취할 필요도 없고
앉을 필요도 있고
설 필요도 없고
운동할 필요도 없고
뭘 할 필요가 없어요.
다만 자기 스스로가 분별 경계에 빠지면
절대 뭘 하든 이 소식은 오지 않는다.
근데 뭘 하든 일어나는 생각이나 분별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그게 어떻게 보면은
내가 체험하는 게 아니에요.
이런 분별도 빠지지 않고, 저런 분별도 빠지지 않고
있는 것에도 빠지지도 않고, 없는 것에도 빠지지 않다 보면
그게 일종의 분별에 떨어지지 않으면
저절로 이거는 어느 순간 탁 드러나는 것이지.
왜냐하면 ‘내가 체험한다’ ‘내가 깨닫겠다’ 하는 거는
다 거기서 분리 속에 떨어진 거예요.
내가 어떤 체험이라는 건
어떤 대상을 두고 뭔가 분별
이미 생각에 떨어져서 뭔가를 기다리는 구조거든요.
그것조차도 놓아버렸을 때
이게 딱 드러난다.
그래서 이럴 때 제가 보면
이것저것을 할 필요가 없어.
법문을 듣다가 탁 걸린 한 문장이 될 수도 있고
한 단어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이겁니다 해서 안 통한 것일 수도 있어요.
안 통한 일일 수도 있는데
하나에서 뚫리면 다 뚫립니다.
어떤 인연이 됐든 어떤 거에도
궁금해야지, 궁금하긴 해야죠.
자꾸 궁금하지 않으면 자꾸 경계에 빠지거든요.
이것이 답답하고 궁금해야죠.
그러면 어떤 사람은
청주에 가니까 어느 보살님은 이겁니다.
‘이겁니다’해서 모르니까
막 자기 뺨을 때렸다고 하시더라고요.
답답하니까 막 이거 때려도
그러다가 변화를 경험하신 분도 계시고.
그러니까 하나에서 뭔가 에너지를 발휘해서
한 우물에서 뚫리면
다 모든 우물의 그 본바탕에 다 통하게 돼 있는 거거든요.
제대로 통했다면.
그게 화두인 것 같아요.
화두의 어떤 기능? 화두의 방편?
화두를 여러 개 하지 않잖아요.
근데 그게 요식 행위가 돼서는 안 돼.
진짜 궁금해야 돼요.
아니 저 사람은 이게 죽비치는 이게 마음이라는데
나는 이게 안 와 닿아.
그러면 이게 뭐냐? 이거지
어떤 사람은
손가락 드는 데서 이 소식이 없고
이게 도라고 이렇게 가르키는데
이게 나는 도저히 와닿지가 않아.
그럼 어떻게 해?
이 사람은 손 움직일 때마다 궁금해지는 거야.
이런 식의 어떤 몰입, 궁금함이 되게 지극해지면
그게 이상하게 마음이 되게 섬세해지고 예민해지고
그런 게 아주 작은 경계도 잘 보이는 듯한 느낌이
내면이 이렇게 펼쳐지거든요.
그럴 때 확 와 닿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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