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만약에 지금 이렇게 볼 줄 아는 시력이 없으면
이 모습이겠어요?
그다음에 이렇게 감각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면 이것이겠습니까?
그다음에 듣는 능력이 없으면
이 죽비가 내가 알던 지금 경험하는 이 죽비겠습니까?
아니에요.
색은 고정돼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렇게 인연 화합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이것도 마찬가지라
종이 객관적으로 있는 게 아니라
눈이 멀어버리면 이 색깔의 종은 있을 수가 없어요.
감촉하는 이런 신경이 끊어지면
이런 식의 종의 물질감이 있을 수가 없다고
귀가 멀면 이 소리가 없어요. 나의 세계에는.
그러면 내가 지금 경험하는 이 종은
지금 찰나적으로도 다른 물건으로 경험될 수 있어. 지금 당장.
그리고 또 여기서 뒤통수 맞아가지고 의식이 없어 쓰러져 버리면
종도 없습니다.
(자식도 마찬가지 종이나 자식이랑)
100% 똑같아요. 똑같아.
그러니까 얼마나 공부가 쉽지가 않죠.
그런 면에서는 집착이 강한 게 자식이잖아요.
자식만 오려낼 수가 없어요, 거기에서.
아무 말을 어떤 의식이 없을 것 같은 종이나
막 온갖 감정을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는 그 동물, 내지는 사람,
내지는 가장 내 뱃속에서 낫다고 생각하는 자식조차도
똑같은 식으로 드러나고 있다라는 거를 깨달으신 게 부처님인 것이고
그게 불법 공부죠.
선이 그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평등하다.
만물이 평등하다는 건
자식이건, 아니면 이웃집 사람이건, 아니면 그냥 사람이건, 외계인이건, 바윗돌이건, 나뭇조각이건
다 평등하다
다 이 마음 바탕에서 일어난
움직이는 것이고, 고정된 바윗덩어리고 이렇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사들이 얘기를 하잖아요.
도가 뭡니까? 그러면 하늘이다 했다가
도가 뭡니까? 그러면은 뭐 죽비다 했다가
도가 뭡니까? 그러면 똥오줌이다 했다가 그런다고.
그게 우리는 다 다르거든요.
저 높은 하늘
그다음에 눈앞에 있는 죽비
아니면 우리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그 오물조차도 똑같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만법이 평등하고
그 만법이 평등하다는 그거는 뭐냐 하면
모든 것이 똑같으면 그게 자성이 없다라는 거에요.
그 각각의 고유성이 없다라는 거예요.
모든 것의 원천은 이 깨여있음이기 때문에
그래서 만법개공이라고 한다고.
그러니까 죽비는 죽비가 아니고 이름일 뿐이다.
이게 금강경의 이름이 그대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걸 깨치면
금강경을 설할 수 있어요.
거의 내용이 다르지 않은 내용을 자기가 법문할 수 있다라니까.
부처님이 석가모니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깨달으면, 똑같은 걸 깨달으면
똑같은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거지.
그 똑같은 말이 아니더라도
그 어떤 뜻이 통하는 그 비슷한 말이 나올 수가 있다라는 거예요.
옛날은 옛날 식으로 얘기하고
요즘은 요즘 식으로 얘기하겠죠. 요즘의 언어로.
그래서 옛날에는 마음이다 하고, 본래 면목이다 하고
요즘은 뭐 깨어있음이다 하고, 진아다 하고
막 이런 식의 표현을 하는 거죠.
그게 차별이 없어요.
불법이 원래 그렇게 냉혹한 겁니다.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아요.
왜?
법이 원래 그렇다 이거예요.
법이 원래 그런 걸 어떻게 봐주겠어.
그래서 인간의 감정과 생각을 용납하지 않아요, 여기에선.
그 이전 일이기 때문에
감정이 어떤 상태든, 생각 어떤 고고한 생각을 갖고 있든
아니면 악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든
그건 본질은 다 똑같은 거라
선인과 악인이 다 똑같은 거예요.
사람을 몇십 명 죽은 사람이건
아니면 성자건 똑같다 이거예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경험상들은.
원래 그렇다, 원래.
아니 자식도 여기서 일어나지 않나요?
자식이 어디 딴 데서 옵니까?
자식이 내 뱃속에서 나온 게 아니고
지금 이 한 생각 분별해서 이렇게 자식이 되는 거지.
우린 다 뱃속에서 낳았다 하잖아, 내가 낳았다 하잖아.
그게 아니고 내가 낳았다는 생각이 일어나고 있어요.
지금 내가 낳았다는 이미지가 지금 그려지고 있을 뿐인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낳았다는 사실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낳았다라는 생각이 있을 뿐이고
내가 낳았다라는 이미지가 그려져 있을 뿐이고.
“아니 근데 나는 대동병원 3층에서 났단 말이야” 이거잖아.
대동병원이 어딨어?
“나는 그때 죽 죽을똥 살똥해서 수혈을 두 대나 했어.”
이거 이거거든요. 이거 아닙니까?
이거잖아, 대동병원이 이거거든요.
수혈한 게 이거거든.
죽을 똥 살 똥 했어가 이거거든.
이거 아닌가?
지금 이, 이 한 생각 아닌가요?
그래서 선사들은
한 생각에 온 우주가 펼쳐진다 이거예요.
온 우주 안에 온갖 일이 다 있죠.
아주 가까이 있는 사실인데 우리는 그걸 몰랐어요.
아주 멀리서 찾았다고
한 생각 일어나는 여기에 있는 건데
우리는 그 일어난 생각에 빠져서
‘나는 어디 사람이야’
아니에요. ‘어디 사람’이라는 생각이 지금 일어나고 있을 뿐이에요.
그냥 모든 게 지금 이겁니다. 이거.
그러니까 이게 ‘삼계가 유심’이라는 말을
그냥 입으로만 하면 안 돼요.
삼계가 유심이라는 말은 뭡니까?
모든 것이 이것이라는 얘기거든요.
이거 지금
하늘이 드러나는 이거고
땅이 드러나는 이거고
산하대지가 드러나는 이건데
그러면 그래 그건 맞아 만법이 다 귀일이야. 삼기가 유심이야.
근데 다음 날 질문에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깊은 잠 잘 때는 이게 어디에 있죠?” 이런다고
“오매일여가 돼야 된다는데 그게 어디 있어요?”
무슨 오매일여?
삼계가 유심이면은 오매일여도 이거란 얘기거든요.
어젯밤 깊은 잠도 이거라는 얘기거든.
근데 삼계가 유심이라는 말은 막 잘하고 있으면서
‘오매가 일여이래 해야 되는데...’
또 이렇게 수행을 하고 있다고.
그럼 그게 말이 안 맞거든요.
삼계가 유심이라며?
그 모든 것이 이것이라는 건 알겠어.
‘근데 깊은 잠 속에서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어.’
깊은 잠 속에서 어떻게 되는 그런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지금 그 순간, 순간 생각에 떨어졌다 이거예요.
망상에 떨어졌다, 망상에.
그러니까 순간 깨어 있느냐?
물론 법의 입장에서는
깨어 있고, 잠들어 있고가 없어요.
근데 사람이,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지금 이 사실에 밝느냐? 일어나는 분별에 사로잡혀 있느냐?
그게 있는 거지.
그 찰나찰라
그런면에서는 돈오돈수가 맞지.
그러니까 사실은 분명해지고 나면
돈오도 없고 돈수도 없지만
그것도 분별이니까.
문득 깨닫는다.
‘문득 깨닫는다’도 분별이거든
‘깨달음’ 이것도 분별이거든요.
‘문득 닦는다’ 이것도 분별이거든요.
그런 말조차도 없어야 돼.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돈오돈수가 아니고 돈오점수네 해보니까 그렇네’ 하지만
진짜로 깨달으면 깨달음도 없습니다.
깨달음도 망상이라는 걸 깨달아야 진짜 벗어난 거예요.
그 분별이거든요. 분별.
그래서 우리가 문득 이거를 체험한다고 하는 거는
이제 비로소 분별이 물들지 않는 자리가 드러남으로써
분별에 속지 않을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이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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