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라선공부

[릴라선공부] 분별심의 회피전략

Buddhastudy 2024. 6. 24. 19:07

 

 

선생님, 돈오라는 거는 이해는 하는데

공부를 시작하는 입장에서는 분명히 분별심을 일으키는

혹은 고통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는 대상들을

계속 잘라내는 거는 방편으로 또 필요하지 않나요?//

 

 

그러면은 시간이 많이 걸리겠죠.

그리고 그것들이 완전하게 그게 잘리지가 않아요.

그거는 내가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인연 따라, 어떤 몸에 밴 분별 의식에 따라서

습관적으로 사로잡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또 객관적으로 있는 게 아니거든요.

 

잘 봐요.

우리가 이 공부라는 거는

이 세계의 실체에 밝아지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 세계의 실체에 밝아지고 보면

모든 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여기서 일어난 생각인 거야.

 

예를 들어서

쉬운 비유가 이거예요.

우리가 깨닫고 보니까 꿈과 같아.

이 세계가 꿈과 같아요.

그래서 꿈에 사로잡혀 있어.

원래는 있는 게 아닌데

 

그러면 우리의 공부는

꿈속에서, 꿈의 어떤 내용으로서

꿈을 꿈에서 깨어나는 그런 꿈에 빠지는 게 아니라

꿈 깨는 거잖아요.

꿈 깨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꿈속의 내용에 의미를 부여해서 자꾸 하면은

그거는 꿈 깨는 공부하고는 상관이 없는 거죠.

사실은 또 다른 내용을 달리하는 꿈을 꾸는 거랑 똑같은 거죠.

 

그러니까 공부가 그런 거예요.

수행하지 마라.

노력하지 말라 하는 건 그거예요.

꿈속에서 자꾸 조작을 가하면서

또 다른 내용의 도 닦는 꿈을 꾸는 건데

이 공부는 꿈에서 깨는 공부다 이거야.

 

(그냥 너무 힘들면

피하고 노는 게, 그 순간에는 그게 낫지 않아요?)

 

그러니까 마음은 순간적으로 편해질 수 있겠죠.

근데 공부하고는 상관없는 거죠.

그러니까 편한 꿈 꾸는 거죠.

 

편안 꿈꾸는 거는

내용을 달리해서

영화 1편 보다가 2편 보는 거랑 같은 거고

이게 영화구나

그 내용하고 상관없잖아요, 그거는.

 

 

(어쨌든 그런 밖에서

어떠한 뭔가 대상이 있어도 좋든, 선이든 악이든

거기 내 마음이 끌려가지 않고 그냥 무심해지는 거)

 

 

아니 그것도 수행이고

힘들면 그게 뭐냐? 이거예요.

그게 이거거든.

 

그냥 통하는 거예요, 이거는.

막혔다가 통하는 거

그냥 이거예요.

근데 그 통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게 법문의 역할인 거고

그렇게 조건을, 분별을 끊으면서 곧바로 가리키는 거죠.

이 자리라고.

 

그거 복잡하게 그 내용에 의미 부여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그래서 옛날에 그런 공부

경전이나 이런 공부 체험이 없는 사람도

문득 깨닫는 사례들이 있잖아요.

 

그냥 다이렉트로 들어가는 거야, 다이렉트로.

방법이 없어요. 이거는

왜냐하면

방법을 따로 할 모든 방법은 망상인데, 어떻게.

 

그게 어떻게 보면 분별심이

자꾸 이거를 직면하는 일을 가로막고 있는 거야.

자기 정체가 드러나는걸

그게 일종의 합리화 변명이죠.

 

곧바로 통해버리면 분별심이 실체가 없다라는 걸 알아서

거기에 매이지 않게 되거든요.

근데 자꾸 그런 식으로 회피하는 전략을 만들어.

공부하는 사람이.

갖은 변명과 이유는 그겁니다.

분별심이 자꾸 저항감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민할 필요 없어요.

알고 모르고 하고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그냥.

 

처음에는 심각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뭔가를, 막 심각하게 뭔가를 해왔기 때문에

근데 잘 듣는 게 중요해요.

왜냐하면 그 심각하다는 건 내가 뭔가를 하려는 마음이거든요.

그게 안 되니까 심각해지는 건데

그걸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를 들으면

어느 순간 자기 실수를 돌이켜보게 되면서

아이고 이게 안 되는구나하는 순간에

이게 딱 밝아지는 거예요.

심각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