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목사님한테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고 스님한테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지 딱 답이 안 나오나? 나한테 물으면 교회 가라 그럴까? 절에 가라 그럴까? 물어봐. 절에 가야지. 왜 교회를 가? 아니 절이 좋아가지고 어릴 때 절에 들어온 사람한테 절에 갈까요? 교회 갈까요? 그러면 절에 가라고 그러지. 그러건 물으나 마나 한 얘기요. 자기 저기 불교가 좋으면 그 남자 버리고 불교 믿는 남자하고 결혼하면 되지. 뭐 어려워. 그거?
아니 내가 왜 남의 사는 걸 헤어지라. 마라. 그러겠어? 아니 자기가 결혼하고도 절에 다니고 싶으면 남자 친구를 사귈 때 절에 다니는 친구를 사귀면 되지 않느냐. 이 말이오. 이미 사귀어 버렸어? 아이고 결혼해서 이혼도 하는데 아직 안 했는데 뭐 어때? 그거 뭐 큰일이라고 그래? 아니 나는 지금 어떻게 하라고 안 한다니까. 왜 자꾸 책임을 나한테 떠넘기려 그래? 자~ 그러면 내가 물어보자. 자기가 남자친구를 더 좋아하나? 둘 다 좋아하는데. 남자친구가 자기를 더 좋아하나?
그럼 자기가 주권이 있지. 내가 남자친구를 더 좋아하면 이 문제에 있어서 내가 질 수밖에 없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어쨌든 결혼을 해야 되니까. 종교고 뭐고 팽개치고 잡아야 되니까. 그런데 남자친구가 나를 더 좋아하는 거 같으면 조건을 딱 내걸면 되지 뭐. 뭐 어려워. 그건 하나로 해도 되고 둘로 해도 되고 괜찮아. 이제 스님이라는 걸 떠나서 얘기하면, 스님의 본분으로 얘기하면 무조건 불교가 되야 되고, 스님이라는 걸 떠나가지고 얘기하면.
종교가 하나로 통일되면 더 좋지. 그런데 세상에 늘 원하는데 되나? 안되나? 안 되잖아. 그지? 그럼 최선책은 둘 다 불교를 믿으면 좋지. 그런데 둘 다 불교를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는 불교 믿고. 그 사람은 교회 다니고 따로따로 다니면 차선책은 되지. 내가 교회로 가면 차악은 되겠지. 그러니까 그거는 이제 따로 해도 괜찮아. 서로가 존중한다면. 정말 서로 사랑해서 각자의 신앙을 존중할 수 있다면 나는 절에 다니고 상대는 교회 다녀도 괜찮지.
왜 그러냐? 대한민국 헌법에 종교, 믿음, 신앙, 사상, 이념은 뭐다? 자유다 하고 헌법에 보장이 돼 있어. 그러니까 이것을 강제하면 헌법소원대상이 돼. 하하하. 법에 보장된 국민의 권리를 억압하는 게 된다. 가끔 우리 사회 여기 보면 종교를 믿는 사람이 국민의 기본권을 이렇게 억압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강요하는 사람. 타인에게 종교를 신앙을 강요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거는 헌법을 그때는 헌법을 갖다 줘야 돼. 그러니까 남편이 교회 가자 그러면 나중에 뭐라고 한다?
헌법을 복사를 해가지고 밑줄을 빨간 줄을 딱~ 그어서 남편한테 보여 주면 돼요. 당신은 일본사람입니까? 한국 사람입니까? 한국 사람이다. 하면 한국 사람의 기본적인 권리는 어디에 보장이 돼 있느냐? 헌법에 보장돼 있다. “헌법에 요렇게 돼 있잖아요.” 요렇게 딱 보여주면 돼요. 이러니저러니 하지 말고. 그런데 자기가 지금 결혼하면 남편이 절로 올 거 같아? 자기가 교회로 끌려갈 거 같아? 왜?
그럼 자기도 연말에 절에 오면 되잖아. 결혼하기 전부터 다니면. 그러면 어때? 어차피 신앙이 다른데. 그럼 어때? 괜찮아. 그러면 약속을 해가지고 한해는 교회 가고, 한해는 둘이 같이 절에 오고 이러면 되잖아. 우리가 연말에 늘 5일간 명상하거든. 그럼 정토회 가입해가지고 자기도 결혼하기 전부터 올겨울에 정토회 와서 명상을 하면서 남편한테 뭐라고 그러냐 하면 “나는 매년 연말에, 연말연초에 내가 어릴 때부터 이렇게 명상에 다녔다. 이거는 안 가면 안 된다. 그러니까 당신 결혼하면 이거는 허락해 줄 거냐?” 이렇게 사전에 약속을 받아.
그러며 남자친구를 자기를 좋아한다니까. 그 정도 해야 결혼하지 안 하면 안 될 거 아니야. “이거는 꼭 해야 되는데. 어떡하지?” 꼭 물어봐. 그러면 미리 약속을 받아 놓으면 되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좀 또 끌려가 주면 또 어때? 사실 크게 보면 아무것도 아니야. 또 물어봐요. 모든 인간이 원래 이기적이니까 이기적인 얘기를 해 줘야 좋아한다. 복 받는다고 얘기해줘야지. 내가 이거 복 받는다 하는 건 허황되다. 이러면 여기 다 안 좋아해.
막 웃고 좋아하는 거 같지. 그래도 복빌 땐 다 나한테 안 오고 다 딴 절에 가. 그게 인간이야. 이치적으로는 그걸 복도 안 짓고 복 받는다. 말도 안 된다. 이러지만 마음에서는 공짜를 다 바란단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래서 법문들을 때는 누구한테 오고? 스님한테 와서 듣고 복 빌 때는 어디 간다? 딴 절에 가. 그거 용인해 줘야 돼. 내가 그거까지 다 막으려면 법문 들으려도 안 와. 허용해 줘야지. 그래서 다 그 재미로 다니는데 그걸 갖고 뭐라고 그러면 안 되지. 괜찮아. 뭐. 빠져도.
자기는 이제 과보를 받지 뭐. 그건 재미일 뿐이지. 과보를 받지. 다음에 내 법회 있을 때 남자친구를 데려오면 억수로 재미있는 거 이런 거 보면 “야, 불교도 괜찮겠다.” 이럴 거 아니야. 데리고 와봐. 우리 사회에 참 그래도 우리나라도 종교 때문에 집안에 갈등이 많이 생기지마는 다른 나라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종교 자유가 있는 편이오? 없는 편이오? 있는 편이오. 딴 나라는 진짜 이건 불가능합니다. 원수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진짜 절에 다니다 교회와도, 교회 다니다 절에 가도 되고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그죠?
왜 이러냐? 우리가 옛날에 유_불_선_ 삼교가 서로 소통했잖아요. 그죠? 그런 힘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불교에서는 좀 포용력이 있어야 우리가 종교 때문에 안 싸워요. 조금 손해 보는 거 같은 기분이 들죠. 저렇게 하는데, 우리도 저렇게 해야 안 되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러면 안 돼요. 그러면 싸워요. 어떻게 다 갈봐요. 그러면 북한이 하는 거 보고 다 갈부면 싸움밖에 안 돼요. 저런 거는 포용을 좀 해줘야 되듯이 개신교를 불교가 뭐 좀 해줘야 된다고? 포용을 좀 해줘야 돼. 문화가 그러니까 포용을 좀 해줘요.
포용을 하는 자가 궁극에 가서 승리합니다. 어떤 게 불법이냐? 이렇게 이해하셔야 돼요. 어떤 할머니가 저한테 와가지고 “아이고, 스님 걱정이에요.” “무슨 걱정이오?” 그러니까. “제가 기도를 지금 열심히 하고 있는데 소원성취가 안 될 거 같아요.” “아니 왜 소원성취가 안 되죠?” 그러니까. “무슨 기도를 하는데?” 그러니까 “우리 손녀딸 입시기도 해요.” “어떻게?” “관음기도를 하거든요.” “그런데?” “아이고 스님, 우리 손녀딸이 교회 다녀요.”
할머니가 생각하니까 자기는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불러 손녀딸 대학시험에 걸리게 해달라는데 손녀딸은 어디 다닌다고? 교회 다니니까 관세음보살이 들어줄 거 같아? 안 들어줄 거 같아? 안 들어 줄 거 같잖아. 우리 생각에. 그죠? 그래서 제가 뭐라고 그랬게요?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요?” “아이고 관세음보살이 보살님 같을까 봐?” 내가. 관세음보살이 우리 같아요? 우리보다 마음이 넓어요? 넓지.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이 고 3짜리 여자애가 교회 다닌다고 “에이 너는 안 돼.” 하고 그렇게 하실 분이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래서 걱정하지 마세요.
관세음보살님은 그보다 훨씬 더 넓으신 분이니까 그런 거 갖고 시비 안 하는 분이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기독교인도 죄는 실컷 지어놓고 예수님 빙자해서 도망가려 하듯이, 불교인도 죄는 실컷 지어놓고 안 받으려고 그러고, 복은 안 져놓고 받으려 그러고. 이런 허황된 생각을 신앙으로 한다면 그건 부처님 가르침하고 전혀 안 맞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지금 중요한 거는 교회 다니느냐? 절에 다니느냐가 핵심이 아니라 어떻게 진리로 다가가느냐? 이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여러분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될까?
복은 안 져놓고 “복주세요. 복주세요.” 하면 줘요? 안 줘요? 안 준다. 그런 원리는 없어요. 그러니까 이 원리. 복을 지어야 복을 받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이 원리는 내가 복을 받고 싶으면 어떻게 해라? 복을 지어라. 이게 딱 행동 지침이 나오잖아요. “내가 복 받고 싶다.” “오~ 그래? 복지어라.” “내가 복 안 지었는데요.” 그러면 뭐란다? “복 받을 생각하지 마라.” “죄를 지었는데요.” 하면 “벌 받을 각오를 해라.” “벌 받기 싫은데요.” 그러면 어떻게 해라? “죄를 짓지 마라.” 요게 딱 삶이 분명해지잖아. 지혜로운 자는 요렇게 살아가는 거요.
나에게 닥친 일은 다 내가 이전에 지은 인연의 과보이기 때문에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게 싫다면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계를 지키는. 요렇게 사람의 길이 진리로 살아가면 삶의 길이 분명해진다. 이 말이오. 그래서 우리가 성인의 가르침을 들으면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어요? “진리는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이렇게 말했잖아요. 그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딱 어떻게 살아야 될지 길이 딱 나오는 거요. 요 이치가 있다. 원리가 있다. 이 말이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이라. 그래요. 법. 담마. 법이라 그래요. 이치가 딱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허황된 생각을 하고 있어요.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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