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는 날로 먹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날로 먹는 거는 교도 날로 먹기 어려운데 어떻게 선을 날로 먹어요? 그건 오직 스스로밖에 해결할 수가 없다. 물어서도 안 되고, 물어서도 답이 안 나온다. 오직 자발성, 스스로 문제의식을 가져야 된다. 이게 뭔지. 이게 왜 이러지? 이렇게 스스로 의문을 발동해야 된다. 그러고 두 번째 그 의문에 대해서 굉장한 집중을 해야 됩니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마음을 내야 된다. “야~ 그거 왜 그래?” 이렇게 자발적으로 마음이 나야 된다.
지식을 쌓듯이 쌓아서는 이거는 태산같이 쌓아도 해결이 안 된다. 자발적으로, 정말 자기가 의심이 들어야 된다. 그런데 의심이 안 드는 걸 붙들고 있는 거는 사구라 그래요. 그건 아무리 심어놔도 싹이 안 나는 죽은 씨앗이다. 스스로 의심이 들어야 만이 활구라 그래. 그러니까 지금 사구를 들고 있는지, 활구를 들고 있는지는 자기가 거기에 대해서 스스로 의심이 드느냐? 그러면 활구고, 스스로는 의심이 안 들고 누가 의심하라. 그래 억지로 하고 있다. 그럼 그건 사구야.
그거는 아무리 해봐야 안 돼. 아무리 땅에 오래 묻어놔도 싹이 안 트는 거요. 그럼 부처님은 어떤 화두였느냐? 어릴 때 들판에 갔다가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걸 보고,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가 죽어야 하지? 이 생각이 들었어. 하나가 살기 위해서 하나가 죽잖아. 말이 안 되잖아. 하나가 살기 위해선 하나가 죽어야 한다. 이거야. 그것참 이상하다.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 하나가 죽어야 하지? 왜 둘 다 사는 길은 없을까?
그러고 선생한테 물어봤더니 그렇게 많이 아는 선생이 거기에 대해 말을 못해. 아버지한테 물어봐도 몰라. 임금인데도. 누구한테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그러니까 스스로 탐구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그래서 결국 그게 계기가 돼서 죽는 거에 대해도 의심이 들고, 병나는 거에 대해도 의심이 들고, 늙는 거에 대해서 의심이 들고, 그래서 결국은 출가를 하고, 6년 고행을 하고, 그래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누구한테 배워서 한 게 아니라.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스스로. 그게 화두야.
그러니까 자기가 지금 들고 있는 화두가 의심이 드느냐? ‘야~ 그 왜 그렇지?’ 밥 먹으면서도 ‘그거 왜 그렇지?’ 길가다가도 ‘야~ 그게 왜 그렇지?’ 사전을 찾아도 없고, 물어봐도 아무도 아는 사람 없고. 이거는 요즘 인터넷 뒤져도 없고, 경전에도 없고 그래. 답을 찾을 수가 없어야 화두야. 답을 찾을 수 있으면 그건 지식이야. 그러니까 그건 스스로 해결해야 된다. 그러니까 항상 거기에 탐구를 해야 돼.
첫째는 의심이 들어야 되고, 두 번째 탐구를 해야 돼. 탐구가 이제 뭐냐? 집중이야. 집중을 해야 된다. 이 말이야. 집중을 하는 게 선정이야. 집중을 해야 된다. 그래야 그다음에 통찰력이 생겨. 어느 순간에 전모가 확~ 보여. 이거다. 저거다가 아니고, 전체가 한눈에 확~ 들어온다. 이 말이오. 그게 지혜라는 거요. 으음. 그런 관점에 서야 된다는 거고.
신심명은 교가 아니고 선이야. 그 선의 깨달음의 세계를 노래해 놓은 거야. 선의 깨달음도 노래해놨으니까, 말로 해버리면 뭐가 된다? 교가 된다. 그래 말할 수 있지만 그건 교라기보다는 선이야. 요지는 간단해. 지도무난이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사랑하고 미워하지만 않으면 된다. 이 얘기야. 사랑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남녀 간의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 이 말은 좋아한다. 미워한다 이 말은 싫어한다 이 말이야.
좋고 싫고만 떠날 수 있으면, 해탈한다. 이 말이야.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늘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뭐가 일어난다? 좋다 싫다잖아. 그지? “아이, 난 싫어.” “아이고 좋아.” 좋으면 가지려 그러고, 싫으면 버리려 그러잖아. 그지? 좋고 싫고의 구애를 안 받아야 돼. 좋고 싫고를 구애 안 받을 수 있으면 해탈한다. 이 말이야. 지극한 도를 너무 어렵게. 머리 깎고, 먹물 옷 입고, 무슨 화두를 들고 뭘 어쩌고 이렇게 안 해도 된다. 좋고 싫고에 끌리지만 않으면 대도를 이를 수 있다. 좋고 싫고를 떠날 수 있느냐?
우리가 어떻게 좋고 싫고를 떠날 수 있어? 못 떠나지. 늘 좋고 싫고에 얽매여 있잖아. 좋다. 락. 싫다. 고. 고락을 늘 윤회하는 거요. 고락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게 뭐다? 해탈이오. 좋고 싫고를 떠나면 해탈이오. 으음. 그러니 늘 좋을 때 좋은 데 집착하지 말고, 싫어도 싫은데 집착하지 않으면 해탈할 수 있어. 그걸 늘 화두 삼아 지켜봐, 지길. 자기 마음이 좋다. 좋다 하면 그걸 오래 즐기려고 그래. 싫다 하면 빨리 끝내려고 그래.
싫어도 빨리 끝내려 안 하고, 좋아도 오래 가지려 안 하고. 좋고 싫고에 구애 안 받으면,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으면 된다. 이 말이 좋고 싫고에 구애받지 않아야 된다. 그게 핵심이야. 나머진 다 부차적인 거야. 첫 줄 두 줄만이 핵심이야. 그거 왜 그러냐? 뒤에 설명도 하고 이래도 설명하고 저래도 설명하고 그런 거야. 그걸 이제 위파사나로 들어가면, 더 깊이 들어가면, 좋고 싫고 보다 더 근원이 있어. 그게 바로 쾌와 불쾌야. 필링이야.
좋고 싫고는 마음작용이고, 감성이고, 좋고 싫고가 왜 일어나느냐? 쾌 불쾌로부터 일어나. 기분으로부터 일어나. 쾌 불쾌에 구애받지 않는 게 위파사나라는 거야. 쾌 불쾌가, 쾌가 좋다로 가고, 불쾌가 싫다로 가는데, 쾌에 탁 깨어 있으면 좋다로 안가고, 불쾌에 깨어있으면 싫다로 안가. 그러니까 이건 더 근원적으로, 근원적으로 자기의 순간적인 필링에 딱 깨어있어서 쾌가 일어나더라도 알아차리고, 불쾌가 일어나더라도 알아차리면 좋고 싫고로 안가.
좋고 싫고가 안 일어나니까 해탈하는 거지. 설령 그걸 놓쳤어. 좋고 싫고가 일어나더라도 좋고 싫고에 집착하지 않으면 해탈하는 거야. 그런데 우리의 업식이 경계에 부딪히면 쾌 불쾌가 일어나고 쾌는 좋다라는 충동이 일어나고, 불쾌는 싫다라고 하는 감정이 일어나지. 그러면 좋으면 가지려고 하는 집착이 일어나는 거야. 그러면 행동을 하게 되고, 행동을 하게 되면 업을 짓게 되고, 그러면 다시 경계에 부닥치면 쾌가 일어나고 이렇게 해서 돌고 도는 거야.
혹 없고, 혹 없고. 이렇게 돌고 돈단 말이야. 그걸 12연기에서 말하면 수, 수가 뭐를 낳고? 애를 낳고, 애가 취를 낳고, 취가 유를 낳는다. 그래서 뭐한다? 생로사를 반복한다. 이거야. 그러니까 수에서 깨어있어야 돼. 왜 수가 일어나느냐? 이것을 설명하는 게 무명이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행이 일어나고, 행이 식을, 식이 뭐다? 명색을, 명색이 육입을, 육입이 촉을, 촉이 수를 불러일으키는 거요.
그러니까 이러한 쾌 불쾌가 일어나는, 느낌이 일어나는 것은 결국은 육근이 바깥세계와 접촉이 일어나기 때문이고, 접촉이 일어나는 것은 결국은 우리가 육근이 있기 때문에 그렇고. 육근의 뿌리는 몸과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즉 명색이 있기 때문이고, 명색의 뿌리에는 결국은 업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업식이 있어서 결국은 수가 일어나고, 수가 일어나기 때문에 애가 일어나고, 애가 일어나기 때문에 취가 일어나고, 그래서 결국은 종자인 유가 생겨나고, 그래서 생사를 돌고 돈다.
그러니 첫째는 애가 일어나더라도, 좋고 싫고가 일어나도 행하지 말아야 된다. 이게 계율이야. 계율을 철저히 지켜야 돼. 두 번째는 수가 일어날 때 거기에 애로 넘어가지 않게, 수를 알아차려야 된다. 이게 위파사나의 명상이야. 이게 선정이야. 더 근원적으로 올라가면 무명을 타파해야 된다. 이게 지혜란 말이야. 그래서 우리가 계정혜 삼학을 닦아야 된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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