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그 올해 부모님을 연달아 부모님이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인제 갑자기 돌아가셔서 제가 아직도 좀 슬픔이 감겨 있는데 제가 제일 궁금한 게 진짜로 사후세계가 있는지 부모님이 가셨다면 지금 어디로 가시고 계신 건지 근데 왜 제가 이 슬픔을 어떤 기도와 어떤 마음으로 극복해야 되는지 그게 법륜스님께 청해서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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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는 사후세계가 있는 것 같아요? 없는 것 같아요?
으흠, 있는 듯한 생각이 들면 “있구나”하면 되지 왜 그걸 나한테 와서 물어요?
그럼 제가 사후세계 없다. 그러면 다시는 누구한테 가서 안 물을 거예요? 딴 스님한테 가서 또 물을 거예요?
에이, 딴 스님한테 가서 또 묻지. 물으면서 뭐라고 묻냐?
그 분이 “있다” 그러면, “법륜스님한테 가서 물어보니 없다던데요.” 이래서 자기 지금 딴 스님하고 싸움 붙이는 거요. 내가 “있다.”그러면 자기 또 뭐라고 그럴까요? 또 딴 스님한테 물어봐요. 그 스님이 “없다” 그러면 “법륜스님은 있다 그러던데요.”
그러니까 내가 있다고 한다고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없다고 말한다고 없는 것도 아니에요.
사후세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어요.
그런데 왜 물어?
그런데 저는 절대로 거짓말 안 해요. 몰라요.
그러니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누가 있다 한다고 없는 게 있을 수도 없고, 없다 그런다고 있는 게 없어질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있는지 없는지 그건 논외로 치고,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한테는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다고 믿으면 있는 것 같이 믿어지고,
없다고 믿으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있는지 없는지
이건 객관적으로 따질 일이 아니에요.
그것은 믿음에 해당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누가 “있다” 그러면
“진짜 있나?” 이렇게 접근할게 아니고
“저 사람은 있다고 믿고 있구나.”
이렇게 하면 되요.
“없다”, 그러면
“아, 저 사람은 없다고 믿고 있구나.”
이렇게 사물을 바라보면 되요.
그러니까 그 있다 없다가
믿음에 해당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있다 없다로 접근하는
이 자세가 잘못된 거요.
그건 주관이기 때문에.
주관은 주관으로 봐야 되요.
그러니까 자기는 있다고 믿는 게 지금 자기한테 유리할까? 없다고 믿는 게 유리할까?
아니, 자기가 죽어서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믿는 게 자기가 마음이 편해요? “아이고, 극락이든 천당이든 있어서 우리 어머니 갔을 거다.” 이렇게 믿는 게 마음이 편해요?
그래. 그럼 자기한테는 있는 존재에요.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요. 자기한테만.
자, 여러분들 밤이 약간 두렵고 겁이 납니까? 낮이 두렵고 겁이 납니까? 왜 그럴까? 이 강당에 아무도 없는데 불 켜놓고 있을 때가 두려울까? 꺼 놓고 있을 때가 두려울까요? 왜 그럴까? 똑같은데?
보이지 않는단 말이 무슨 말이오. 그러니까 모르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낯선 사람, 낯선 곳, 이런 데 가면 두려움이 생기죠. 그러니까 그건 알면 아무런 두려움이 없어요. 모르면 두려움이 생겨요.
그러니까 두려움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내가 모를 때, 무지에서 생겨나는 거요.
자, 제가 여기 가부좌 틀고 앉아서 “옴마니반메훔~~~” 이렇게 주력을 외우니까 공중에 붕 떴어요. 그럼 여러분들 “오~”이렇게 되죠. 신비하죠. 그런데 비행기가 비행장에서 붕~ 떠서 나는 여기서 한 1미터 뜨고, 비행기는 10,000미터 뜨고, 나는 붕 떠서 그냥 가만히 있다가 내려오는데, 비행기는 여기서 미국까지 날아가요.
그럼 나는 약간 떴다가 내리는데, 이 비행기는 300명을 태워서 미국까지 가요. 그런데 비행기보고 “와~” 이러면서 거기 가서 절하고 이런 사람 한 명도 없잖아. 그런데 내가 여기서 붕 뜨면 여기 나와서 절하는 사람이 생겨요. 돈까지 내요.
그러면 신비하다. 하는 것은 어떨 때 생길까? 공중에 떴기 때문에 생길까? 뜨는 원리를 모를 때 생길까? 모를 때 생겨요. 그러니까 신비하다.
신기하다. 신비하다.
이것은 무지에서 생기는 거요.
그러니까 무당이 굿을 하다 도끼날에 가서 훌쩍훌쩍 뛰면 신기해요? 안 해요? 왜 안 다치는지 모르는 거요.
이번에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이 우리가 이해 안 되는 문제가 생기는데 거기에는 신비감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어떤 현상이오. 그건 뭐냐? 무지로부터 일어나는 거요.
그런데 우리가 보통 말하는 종교라는 하는 게 이 두 가지를 갖고 먹고 삽니다. 종교가. 신비감으로. “오~”, 이런 신비감, 하나는 두려움. 원시종교가 다 그렇습니다.
어떤 행사하는데 무지개가 비추었다. 옛날에는 일식이 일어났다. 그러면 임금이 좀 못되면 “아, 임금 끝났다.”이렇게 되는 거요. 그런 게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요. 무지로부터 일어난다. 이 얘기에요.
그런데 인간이 모른다. 모른다 해도, 딴 건 그래도 조금씩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데, 깜깜절벽이다. 전혀 모른다. 제일 모르는 게 어떤 문제일까? 죽은 뒷얘기에요. 그래서
죽은 뒷얘기는
아무리 사기를 쳐도
들통 나는 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사기 쳐도 들통 안 납니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그러니까 제일 두렵다 두렵다 해도 제일 두려운 게 뭐다? 죽음에 대한 게 제일 두려운 거요. 또 신비한 거에 대한 얘기도 죽은 뒷얘기하면 제일 신비해지는 거요.
그러니까 두려우니까 인간은 이 두려움을 극복해야 되잖아. 극복하는 방법이 뭘까? 바로 죽어서 좋은데 간다는 거요. 헤어질 때 죽는 사람도 떠나보내는 사람도 죽어서 좋은데 간다.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 섭섭함이나 두려움이 적어져요. 헤어지는데 헤어지는 것은 아쉽지마는 좋은데 간다. 그러면 덜 아쉬워요. 이해가 되세요?
그러면 이건 인류가 계발한, 인류가 5천년의 역사, 또는 만년의 역사를 통해서 인류문화가 형성되고, 일만 년 역사 중에 가장 먼저 시작이 되었고, 지금도 계속 되는 거,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위로받는 방법이 뭐라고? 죽어서 어디 간다고? 좋은데 간다.
그런데 인도사람은 이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발견했어요. 뭘까? 죽어서 아무리 거기가 좋다하더라도 못 만나잖아. 그죠? 그런데 다시 태어난다. 굉장하잖아. 다시 태어나니까 죽는 게 겁나나? 안 겁나나? 안 겁나요.
다시 말하면 낡은 차 폐차하고 새차 사는데, 폐차할 때 거기 우는 사람 봤어요? 새차 빼면 기뻐하지. 그래서 인도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초탈한 것처럼 보이는 거요. 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기 때문에. 그래서 그 사람은 장례를 며칠 있고 치우고, 이런 거 없습니다. 오늘 돌아가시면 오늘 바로 장례 치릅니다. 인도는 관 같은 게 없어요. 그리고 찔끔 눈물한번 흘리고 끝이에요.
그래서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으면 시신을 못 건지잖아. 그래서 바닷가에 사는 사람은 좋은 세상이 어디 있다? 바다 밑에 있다. 이렇게 믿어야 좋은데 갈 거 아니오. 그러니까 용궁은 바다 밑에 있어요? 바다 위에 있어요? 바다 밑에 있어요.
그런데 굳이 이것을 “다시 태어나기는 뭐가 태어나? 있기는 뭐가 있어?” 이렇게 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이거 부정하면 사람들이 위로가 안 되고, “진짜 있다.” 이러면 부작용이 엄청나게 생겨요. 천당 보내준다고 면죄부를 팔고, 극락 보내준다고 제 지내는데 몇 천만 원을 받고 이런 부작용이 생기는 거요.
그러니까 이것은 없다 해도 부작용이 있고,
있다 해도 부작용이 생기는 거요.
그러니까 이건 처음부터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면 “스님은 어떻게 믿어요?” 이렇게 묻고 싶지?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있든지 없든지, 가든지 말든지, 다시 태어나든지 안 태어나든지. 왜 그럴까요?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을 없애려고 이런 믿음이 생겼는데,
지금 여기 깨어있으면 두려움이 없어져버려요.
두려움이 생겼다가도 알아차리면 사라져요.
그러니까 두려움이 없는데 굳이 가니 마니 할 필요가 없죠.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은 두려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거기 붓다의 세계에서는 죽은 뒤에 좋은데 가느니 안 가느니, 있느니 없느니, 이런 건 아무 문제자체가 안 되는 거요.
그럼 우리는 어떠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좋은데 간다. 다시 태어난다. 이게 실지로 우리가 죽음에 딱 직면할 때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효용성이 있을까? 없을까?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머니가 좋은데 가셨다.’ 이렇게 믿는 게 좋을까?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믿는 게 좋을까? 믿고 싶기는? 믿으면 되지. 그래서 성경에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이니라.’ 이렇게 하는 거요.
그럴 필요 없어. 좋은 곳으로 가셨다. 그러니까 좋은 곳으로 “가라” 하고 믿는 것은 갈 수도 있고, 안 갈수도 있잖아. “갔다” 이렇게 생각하고 감사를 하면 되요.
부처님께
“아이고, 우리 어머니 좋은데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회 다니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 기도하는 건 이미 갔어? 안 갔어? 그러니까 “보내주세요”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그건 아직 머리를 굴리는 거요. 못 믿어서. 그런데 “감사합니다.”이 말은 이미 가버린 거요.
그러니까 자기는 어떻게 하면 된다? “엄마 잘 가” 좋은 데니까 잘가야 되요? 안 가야 되요? 그럼 자기가 계속 울면 갈 수 있을까? 없을까?
내가 자꾸 울면 돌아보고 못가겠지. 못가면 옛날식으로 말하면 뭐가 된다? 무주고혼이 되는 거요. 떠돌이 귀신이 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엄마를 떠돌이 귀신으로 만드는 게 좋겠어요? “안녕” 이렇게 빨리 극락이든 천당이든 가시게 하는 게 좋을까? 그럼 인사 한번 해봐요.
인사해보라니까. “엄마 잘 가. 안녕~”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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