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중학교 때 어머니 아버지가 많이 다투셨어요
나를 바꾸고 싶어서 좀 노력을 많이 했어요
스님 말씀이 '천 일을 하면 개인의 인생에 조금의 변화가 있다'
한 20일쯤에 1000일이 되거든요
바꾸려고 하는 것을 내려놓을 때 그때부터가 진짜 공부다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더라고요
이거를 내려놓아 봤는데 이제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이제 다 왔는데 이거 진짜 다 내려놔야 되는 건지 궁금합니다//
본인이 자기를 바꾸고 싶다
그런데 이 ‘바꾸고 싶다’ 하는 거는 욕망이에요.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나는 돈을 벌고 싶다.’
그래서 10년간 열심히 일했는데 돈을 못 벌었다. 그러면
‘아, 나는 정말 돈하고는 인연이 없나 봐’ 이렇게 좌절하겠지.
어떤 사람이 출세를 하려고 정치활동을 10년을 했는데도
정말 열심히 했는데도 국회의원도 못 해보고 시의원도 못 해봤어.
그러면 실망을 하겠지.
‘아, 나는 안 되나 봐...; 이렇게.
어떤 사람이 선방에 가서 깨닫겠다고, 도를 얻겠다고 10년을 참선만 했어.
그런데도 깨닫지를 못했어.
그러면 이 스님도 어떻게 될까?
’캬... 나는 도하고 인연이 없나 봐. 10년을 했는데도 깨닫지도 못하고..‘
그러면 이 도가 앞에 있는 ’돈 벌겠다‘ ’출세하겠다‘는 것과 다른 건가?
같은 거예요.
욕망의 대상일 뿐이에요.
이렇게 공부를 하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그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럼 수행이라는 것은
지금 여기 깨어있기 때문에
하루를 하면 하루하는 만큼 좋고
열흘을 하면 열흘하는 만큼 좋지.
10년 참선을 했는데 도를 못 깨쳤다고 만약에 좌절한다면
그거는 그냥 욕망을 10년간 쫓은 거에 불과하다.
지금 자기보고, 변화를 내려놔라 하는 거는
자긴 지금 변화를 자기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좇은 거란 말이오.
지금 천일이 다 되어 가는데 안 될까 봐 조마조마한 거요.
천일 지났는데도 안 되면
“속았다! 거짓말이다!” 이렇게 되는 거요.
그러니까 그건 지금 자기가 3년간 해 온 거는 수행을 한 게 아니에요.
욕망을 좇는 거요.
그 욕망의 대상이 돈일 수도 있고, 도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학문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중에 자기 변화일 수도 있고.
지금 거기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말하면 거기에 대한 집착을 놔라, 이 얘기에요.
거기에 대한 집착을 놔라.
그렇게 구하는 도는 도가 아니에요.
우리나라에도 지금 도를 구하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도를 구하기 때문에
수행을 10년 해도 갈수록 자기가 더 마음이 편안해지고, 더 한가해지고, 더 세상에 도움이 되고 이런 인간으로 안 가고
더 실망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에이, 안 맞다. 에이 때려치우자”
정치 아.. 돈이나 벌자 이런 것처럼
도 닦다 안 되니까 “에잇, 때려치우자, 그냥 장가나 가버리자” 이런 식이 되어버린다는 거요.
그건 도가 아니에요.
도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 욕망의 대상을 그냥 도로 삼았을 뿐이다.
그러면 이 해탈의 길은 그 욕망을 내려놓는 게 해탈의 길이에요.
지금 누군가가 자기를 보고
그 욕망을 내려놓으라고 지금 하는 소리예요.
(도는 좀 어렵게 느껴지고요, 저는 행복하고 싶어요.)
행복도 ’행복하고 싶다‘ 하면 그건 바로 욕망이에요.
(그러면 행복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행복이 실체가 없는 것이 당연하지, 행복이 어디 있겠어?
(이름하여 내가 이것이 행복이다라고 하면 생겨나는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런 거 없어.
그런 것도 없어.
자기는 어떤 게 건강이에요?
이게 건강이다. 할 만한 게 뭐요?
100미터를 12초에 뛰면 건강한 거요?
턱걸이를 50번 하면 건강한 거요?
팔굽혀 펴기를 100번하면 건강한 거요?
자기는 지금 건강을 이렇게 접근한다는 거요.
건강은
안 아픈 게 건강이에요.
“너 아프니? 아픈데 있니?
”없습니다“
아픈 데가 없으면 애도 건강하고, 어른도 건강하고, 남자도 건강하고, 여자도 건강하고
팔이 하나 없는 사람도 아픈데 없다면 건강한 거요.
팔이 하나 없다고 건강이 안 한 게 아니에요.
팔이 없는 거는 그냥 불편할 뿐이에요.
그러나 딴 데 아픈 데 없다면 건강한 사람이오.
그런 것처럼 진정한 행복은 괴롭지 않는 거요.
”괴롭니?“
”괴로울 일 없어요.“
그러면 행복한 거요.
그래서 열반, 열반의 해석이 뭐냐?
괴로움이 없는, 괴로움이 사라진, 이런 거란 말이오.
여러분들이 지금 추구하는 행복은
즐거움이지,
즐거움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런데 즐거움은 반드시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과 의지해있는 거요.
둘이 맞붙어 있어요.
즐거움이 있으면 반드시 뭐가 있다? 괴로움이 있는 거요.
그런데 이 즐거움과 괴로움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인데, 이걸 잘라서
이 괴로움은 버려버리고 즐거움만 추구하겠다, 이런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영원히 행복해질수가 없는 거요.
이 즐거움과 괴로움은 늘 이렇게 교체되는 거요.
이걸 부처님은 윤회라고 그랬어.
사람이 죽어서 소 되고, 말 되고, 개 되고 이거는 힌도교에서 하는 윤회이고
붓다가 가르친 윤회는 뭐다?
인생이 윤회한다. 이 말은 고와 락이 즐거움과 괴로움이 늘 되풀이되는 거요.
이게 윤회에요.
이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 되는 고리를 끊어버리는 게 해탈이라는 거요.
즉, 그것은 이 행복이라 하는 것은 괴로움으로 바뀌지 않는, 괴로움
이 없는 상태다, 이 말이오.
그러면 이 즐거움과 괴로움이라는 것은 욕구의 뿌리를 두고 있어. 욕망에..
욕망이 충족이 되면 즐겁고, 욕망이 충족이 안 되면 기분 나쁘고 괴롭고...
욕망의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 욕망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져 버리면 어떠냐? 즐거울 일도 없고 괴로워지는 일도 없어져 버리는...
이게 해탈이오.
그래서 항상 질문이, 붓다의 질문은 이거요.
”괴롭습니다.“
”뭐가 괴롭니?“
이게 괴로움이 고(苦)이고
”뭐가 괴롭니?“ 이 말은
”괴로움의 원인이 뭐냐? “
이게 집(集)이에요.
그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시키면
집을 놓아버리면
괴로움이 소멸이 되는 거요.
그게 멸(滅)이에요.
그게 열반이다, 이 말이오.
그런데 그것이 쉽게 잘 안되고 또 되풀이 되고 또 되풀이 되니까
그것을 지속적으로 해나가야 한다.
그게 도(道)요.
그걸 꾸준~~~~히 체득이 될 때까지 해나가는 거다.
”행복하고 싶다“ 이렇게 접근하면 안 되고
내가 지금 괴롭다 하면
”뭐가 괴롭니?“
항상 이걸 자기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아까 그림 그리는 게 괴롭다.
그림 그리는 게 왜 괴로워? 그림 그리는 게.
시험 치는게 괴롭다.
시험 치는게 왜 괴로워. 시험 치는게...
사실은 괴로울 일이 없는 거요.
그럼 시험치기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라
합격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괴롭다.
그럼 합격은 합격하고 싶다고 합격이 되느냐? 실력이 되어야 합격이 되지.
그럼 실력이 안 되면 떨어지는 건 당연한 거고
그럼 다시 해서 실력을 키우면 되는 거지.
이렇게 분석해서 접근을 해 들어가야 돼.
자긴 지금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처럼, 그냥
”행복하고 싶다, 아, 스님이 3년만 있으면 행복해진다더라.“
이렇게 접근하면 안 되는 거요.
지금까지 자기가 행복에 집착되어있기 때문에 집착을 놔라,
지금 누군가 그렇게 말한 거요.
(그러면 뭐... 어떻게 살아야 될 지를...)
뭐가 어떻게 살기는?
밥 먹고 살지.
나는 밥만 먹고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자기는 왜 밥 먹고 사는데 문제가 있어?
(인생을 잘 살고 싶어요. 저는...)
잘 살고 싶다.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거야?
밥 먹고 사는 게 잘 사는 거지.
자기 밥 한번 굶어봐라.
밥 먹는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자기가 한번 아파봐라.
건강한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어떻게 어떻게 노력하는 게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자기는 행복이 가득 차 있는데
욕망이 자기를 눈 어둡게 만들어서 행복한 줄 모르는 거요.
자기를 행복한 줄 알려고 하려면 자기는 재앙이 와야 돼.
눈을 다쳐버리면
”아이고, 눈만 보여도 행복하겠다.“
다리를 다치면
”아이고, 다리만 안 아파도 행복하겠다.“
몸에 병이 나서 병원에 누워있으면
“아이고, 아프지만 않아도 행복하겠다.”
밥 못 먹으면
“아이고, 내 밥만 먹을 수 있었으면... 그때가 좋았는데...”
거봐,
행복은 이미 있는 거야, 이렇게...
그런데 자기는 지금 이걸 못 보고 있고,
딴 데를 쳐다보고 지금 자기를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거거든.
그러니까 엄격하게 말하면 진리는
내가 노력하면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나는 이미 행복한데
악몽을 꾸고 있는 거요.
악몽에서 깨면 돼.
내가 노력해서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 게 아니고
나는 원래 부처인데
지금 중생 꿈을 꾸고 있는 수준이야.
그 꿈에서 깨면 돼.
(어떻게요?)
“무슨 꿈을 꿨니?”
괴롭다 하면 지금 그게 꿈이란 말이오.
그래서 “왜 괴롭니?” 이렇게 물어보는 거요.
자기가 지금 뭐가 문제인데?
(저는 평소 생활은 괜찮아요.
그런데 옛날에 부모님 그 어떤 기억이 떠오르면..)
자긴 영화 보고 우는 사람이오.
영화보고 영화 화면에 나오는 사람 죽는 거 보고 우는 사람이란 말이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를 보면서도 그냥 안 울어야 하는데, 계속 눈물이 나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영화 끄면 되지.
(그런데 저는 부모님하고 같이 있으면 그 기억이 떠올라요
그래서 부모님하고 떨어져 있는 시간을 늘리고 있어요.
그래서 한국에도 잘 안 들어오고, 지금도 한국에 들어왔다가 2주 만에 수련하고 오고..)
그건 임시방편이지.
이 병이 치유되려면 부모를 늘 보는데도 그런 영상이 안 떠올라야 치유가 되는 거요.
그러면 지금은 부모하고 떨어져서 연습을 해서 부모한테 가봐야 돼. 치유가 됐는지 안 됐는지.
또 떠오르면 치유가 안 됐구나
연습을 해서 또 부모 만나야 돼.
그래서 부모하고 만나서 같이 살고 잔소리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때 뭐가 됐다?
치유가 됐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치유를 하려면 가까이 가서 보면서 치유하는 게 제일 낫지.
왜냐하면 보면 그 영상이 떠오르면 그때마다 영상을 꺼야 돼.
이건 부모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
내 속의 과거의 기억이지. 영화라는 거는 영상,
과거의 기억이 환영 속에 떠올라서 지금 나를 괴롭히는 거요.
이게 트라우마야.
자긴 지금 누가 자기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트라우마가 자기를 괴롭힌단 말이오.
그럼 그걸 치유를 해야 돼.
그걸 치유하는 방법은 의사의 도움으로 치유하는 방법이 있고
내가 들어보니 자기는 의사의 도움을 좀 얻어야 될 수준이야.
(저요?)
혼자 하려고 하지 말고
의사의 도움을 조금 얻으면 훨씬 손쉬워.
병원에 가는 걸 그렇게 꺼릴 필요는 없어.
그러나 자가치료를 한다면 이런 영상이 떠오를 때 자기가 계속 끄는 연습을 해야 돼.
(스위치, 저는 지금 그거를, ‘살아있는 것이 행복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돼.
행복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돼.
법륜스님은
“나는 행복하다” 이렇게 생각할까?
아무 생각이 없어.
생각을 하면 안 돼.
(그럼 스위치를...)
영상이 떠오르면 고개를 흔들고 끄라 이 말이오.
그 영상이 떠오르면...
부모의 갈등의 영상이 떠오르면 지금 환영에 불과한 거란 말이야.
“환영이다. 아, 이건 환영이다”하고 고개 흔들고
책을 보든지 밖에 가서 운동을 하든지, 목욕을 하든지
그 영상을 자꾸 보면, 습관화가 되어서 그 영상에 자기가 사로잡혀서 그렇다는 거요.
이미 다 지나간 얘기야.
과거 영상 보면서 계속 되풀이하는 거야.
(감사합니다)
---
여러분들 재미있었어요?
젊은이들, 주어진 환경에 여러분들이 조금 더 적응해 가면서
여러분들에 맞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런 활동도 해가면서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법륜스님 > 즉문즉설(2020)'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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