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 수행적 관점에서 오래 전부터 팔정도에서 바르게 본다, 바르게 생각한다에 걸리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게 어떤 기준으로 바르다 하는 건지, 깨닫지 못한 중생의 입장에서 바르다 이야기는 하지만 그 기준이 애매모호 해져버리더라고요
내 안에서 계속 바르다 하지만 내 업식으로 보면 그게 바르게 보일 수 없기 때문에 거기서 뱅뱅 돈다는 기분이 들고
제가 6-9차에서부터 수행정진하고 있는데요, 불법을 배운 그 자체가 머릿속에서 만 뱅뱅 돌지 가슴 속에서 돌지 않고, 정토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열반과 해탈을 이룰 수 있는가 의문이 들면서 답답함이 들고 확연히 안다는 것과 그냥 안다는 건 뭐지?
제가 재가수행자로서 그냥 정토회에서 시키는 수행법칙만 따라가면 그냥 가지는 건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는지 질문 드립니다.//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목표가 해탈과 열반이기 때문에 이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려면 자발적이라야 되요. 내가 원해야 되요. 내가 궁금해야 되요. “아, 그거 뭐지? 왜 이러지? 아~” 이렇게
인간의 의식작용이
자발적일 때만 창조성이 일어나요.
자발적이지 않고 시켜서 해도 지식은 쌓여요.
어린애들 때려서 회초리 들고 때려서 외우고, 암기시키고, 일시키고 하면 늘어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창조성은 안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한국교육이 약간의 강제성이 있기 때문에 대다수 아이들의 99%가 아마, 자기가 정말 하고 싶어서 궁금해서 엄마가 아버지가 말리는데도 막 하겠다고, 이래서 공부하는 사람이 극히 없어요. 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시켜서 하기 때문에. 그래서 창조성이 없어요.
그러면 한국사람 중에 가끔 기인들이 아주 특이한 것을 뭘 만들어 내거나 아이디어를 내거나 이런 사람들 있잖아요. 그러니까 예를 들면 우리나라 영화나 예술이나 이런 거 한 사람들이 주로 옛날에 운동권 출신들이 한 50된 사람들이잖아요. 그죠? 그런 사람들이 그 거할 때 부모가 그것을 하라고 권유해서 한 사람 아니에요. 부모가 못하도록 야단을 치고 했는데, 부모 말을 어기고, 몰래 해서 때로는 정부에서도 탄압하는데도 해고, 이럴 때 창조성이 생긴다. 이 얘기에요.
그런 것처럼 수행도 남이 시키는 대로만 해서는 안 돼요. 그럼 시킨 대로 안하고 반대하면 되느냐? 그 얘기가 아니라, 그냥 무조건 그냥 줄서서 따라가는 거는 착실할 수는 있지만, 창조성은 안 일어납니다. 그럼 창조성이 일어나려면, 늘 그게 작지화가 되어야 되요. 거역하라는 게 아니라, 늘 그게 자기가 원하는 거 하고 일치를 시켜나가야 되요. 그러니까 정토회에서 시키는 대로 줄만 서서하면 된다. 이렇게 하시면 안 되는데, 정토회에서 안하는 거 따로 해야 되느냐? 그 뜻이 아니에요. 이것을 자발적 참여를 해야 된다. 이 말이오.
그래서 내가 지난번에 청년들한테,
다른 특별한 자기 궁리가 없거든,
정토회 떨어지지 말고 붙어만 있어라.
그러면 나중에 다 결과가 괜찮을 거다.
하는 얘기는 정토회는 어떤 방향이 첫째, 이 세상을 허겁지겁 따라가는 이런 수준이 아니고, 세상보다 약간 앞서보고 있잖아요. 예를 든다면 지구적인 차원에서도 환경문제라고 하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환경 문제가 심각해질까? 자꾸 없어질까? 심각해지겠죠. 그러니까 그런 문제를 염두에 두고 지금가고 있죠.
우리나라가 지금 이런 난리를 피운다고 하더라고 결국은 세계적인 조류를 봐서는 한반도에 전쟁이 나는 것을 좋아할까? 평화를 좋아할까? 다 세월이 흘러 평가하면 평화가 옳다. 그리고 언제 될지 그것은 우리가 모른다 하더라도 통일이 되기를 원하는, 통일 쪽으로 갈 거 아니겠어요. 그죠? 우리가 미래 지향적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이 이렇게 지금은 당장 밥 먹고, 출세하고 이게 중요하지만, 다 이렇게 먹는 것도 충분하고 입는 옷도 충분하고, 타는 것도 집도 괜찮고. 이런 데도 지금 인생문제가 해결이 안 되잖아. 그죠? 그러면
결국은 행복이라는 것은
이 마음공부를 해야만이 행복해지는데,
우리는 지금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잖아.
그러니까 이게 전체적으로 나아가는 방향이 미래지향적이라는 거예요. 미래지향적이라는 말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게 점점 현실적인 과제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가 특별히 머리를 써서 딴 일 할 일이 있어서 그러면 몰라도, 안 그러면 여기서 그냥 자기가 막 창조적으로 못할 수준이거든, 여기 창조적인 사람들이 앞서서 해 나가고 있는데, 같이 붙어서, 돈도 좀 내고, 봉사도 좀 하고, 수행 따라도 하고, 이렇게 하면,
세월이 흐르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 얘기에서 여기 꾸준히 따라 하는 것도 좋다. 이 말이오. 그러나 이왕지 할 바에야 뭐한다? 억지로 하지 말고 뭐한다? 자발적으로 하면, 창조성은 자발성에서 나오니까, 자발적으로 하면 좋아요. 그래서 여기 그냥 붙어서 그냥 꾸준히 같이 가는 게 좋다. 그런데 정토회에서 맹목적으로 “여기만 붙어있으면 천당 간다.” 이런 말해요? 안 해요? 안하잖아. “돈 번다.” 이런 말도 안하잖아.
그러니까 가능하면 자발적으로 하면 좋다. 그러나 우리는 방향이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는 나아가 뭘 하면 더 잘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놓고 10년 20년 지나 평가하면, 괜히 나가 지금 뭘 한다 해서 뭘 특별히 효과 나기가 어렵다. 정토회는 한 사람 한 사람 보면 그렇게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하더라도, 첫째 방향이 좋은 방향이고, 두 번째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참여하잖아.
요즘 세상에 월급 줘도 열심히 하나? 안 하나? 안 해. 승진시켜줘도 안하는데, 이것은 월급이 있나? 월급은 고사하고 돈 도로 내 놔야지. 와서 일하고 돈은 안주더라도 칭찬이라도 들어야 되는데 칭찬도 별로 안 해주고 오히려 비판만 하고 이러잖아.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다는 것은 이게 어떤 동력이 있다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 모여 있기 때문에, 이게 에너지가 일반조직의 에너지하고 좀 다르다.
그럼 일반 종교조직의 에너지란 뭐냐 하면
그 사람들이 더 헌신적인 데가 많습니다.
더 돈도 많이 내는 데가 많은데,
거기에는 목표가 이렇게 하면
죽어서 천당 간다.
이렇게 하면 10년 20년 지나면
내가 큰 복을 받아서 돈을 많이 번다.
이런 미끼가 있다. 이런 얘기요.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일시적 효과가 나도 언젠가는 거기에 사단이 나게 된다. 이런 얘기에요. 우리가 다단계 판매처럼 언젠가는 그게 들통이 나야 되요. 일시적으로는 괜찮아. 급성장하지만, 언제가면 그게 지속가능하지가 않다. 그 얘기에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 하는 일은 대한민국 사람이 다 해도 더 잘되지 나빠질 일이 없다는 거예요. 복 비는 것은 다 빌면 안 돼. 만약에 부처님이 “빌면 대학에 넣어준다.” 이러면 나 혼자 빌면 가능하지만, 전국에 있는 모든 학부형이 빌어버리면 부처님도 해결을 할 수 있나? 없나? 그지? 그것은 지속가능한 게 아니다. 모든 이에게, 즉 보편타당한 진리가 아니다. 이거야. 이치에 맞지가 않는 거요. 일시적인 욕심에 현혹되는 거요.
그래서 첫째 여기에서 꾸준히 하는 게 좋은데, 이왕지서 할 거 뭐 한다? 자발적으로 한다. 그러면 더 빠르게 성취해 나갈 수가 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질문 중에 바르다. 이런 말이 나왔는데, 이 바르다는 말은 옳다. 그르다. 그런 의미의 진부의 진이라는 개념이 아니에요. 가장 정확하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거나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객관적 언어입니다. 여기서 바르다라는 언어는. 가장 정확한 길이다. 이 얘기에요.
그러니까 화살을 저기 과녁 있는데 화살을 땅겨서 쏘면, 여기서 쏠 때하고, 이쪽에서 저쪽에서 쏠 때하고, 화살 날아가는 방향이 같아요? 달라요? 선을 그으면 다르지. 그럼 그게 중도라 그래요. 가장 정확하게. 이 중자는 가운데라는 뜻도 있지만, 적중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딱 정확하게 거기에 적중하는 의미가 있단 말이오. 중자의 의미 중에.
그래서 중도라는 것은 가장 정확하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중도를 다른 말로 뭐라고 한다? 정도다. 이렇게 말해요.
불교에서 쓸 때는 한문으로 그렇게 번역을 하다 보니.
그러니까 한문이라는 것은 한 글자에 의미가 여러 개가 섞여 있잖아. 그죠? 그래서 정도는 중도고, 중도가 곧 정도에요. 가장 정확하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를 들면 바르게 행동하라. 이렇게 하면 바른 행동이 뭐꼬? 이런 건 윤리마다 다 예를 들어서 내가 돈을 교회에 천만 원을 보시하면, 교회에서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 집, 일가친척은 뭐라고 그럴까? 미쳤다고 그럴 거 아니야. 저게 종교에 미쳐서. 왜? 거기 줄 바에야 나에게 주는 게 나으니까. 이렇게 이해관계가 있어서 평가되는, 그것을 중도니, 정도니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 첫째 누구나 다 사람은 자기가 행동하는 거는 마음껏 해도 되요. 자유롭게 해도 된다. 이 말이오. 그런데 그게 남을 해치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거요. 그러니까 이
마음껏 하는 것의 한계가 있는데 그게 어디냐?
다른 사람을 헤치거나
다른 사람을 손해 끼치거나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안 된다.
그러면 그것은 뭐냐?
잘못된 행동이다.
올바른 행동이라는 게 내가 남을 도와주고 그런 개념이 아니고, 그건 하면 좋고, 그러나 최소한도 행위의 핵심은 “너, 자유롭게 살라.”는 거예요. 그러나 너의 자유가 남을 헤쳐서는 안 된다. 두 번째가 남을 손해 끼쳐서는 안 된다. 네가 어떤 이익을 추구하든 그것은 자유인데, 그러나 손해 끼치면서 추구해서는 안 된다. 네가 즐거움을 어떻게 추구해도 그건 네 자유인데, 네가 남을 괴롭히면서 너의 즐거움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거요.
그래서
1. 남을 때리거나 죽이지 말라는 것이고,
2. 훔치거나 뺏지 말라는 것이고,
3. 남자들이든 여자들이든 자기가 즐겁기 위해서는 성적 욕구가 있을 때 그것을 충족시키면 즐겁잖아. 그런데 상대가 서로 원해서 하면 서로에게 줄거움이 될 수도 있지만, 상대가 원하지 않을 때 그렇게 하면 상대에게 큰 고통이 되잖아. 우리 사회에서 요즘은 폭행자보다 성추행이 죄가 더 크다는 거 알아요? 옛날에는 안 그랬잖아. 옛날에는 때려서 팔이 부러지든, 뭐가 부러져야 죄가 되지, 성추행은 표도 안 나는 데 그거 만진 게 그게 뭐가 죄고? 이런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안 그렇잖아. 왜? 부러진 것보다 성적 수치심에서 오는 고통이 더 크기 때문에 지금 이런 되었다. 이 말이오.
그래서 여기 3가지가 해치지 않는 것, 손해 끼치지 않는 것, 괴롭히지 않는 것. 고것을 구체적으로 그냥 몇 가지 다 그으면 그것도 추상적이잖아.
손해 끼치지 마라는 게 추상적이니까 구체적으로 따지면 뺏거나 훔치지 마라.
그 다음에 해치지 마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때리거나 죽이지 마라.
괴롭히지 마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추행하지마라.
이것을 하지 않는 것이 바른 행동이라고 말해.
이것은 기독교를 믿거나 불교를 믿거나 어른이나 아이나 한국 사람이나 일본사람이나 다 들으면 수긍이 가는 거잖아. 그죠? 그래서 이런 것을 우리가 정행,
그 다음에 정어라 그러면 말은 마음껏 해도 좋아. 뭐 자기 할 말 있으면 뭐든지 해도 좋은데, 그러나 말로라도 남을 해치는 말을 하면 안 되고, 남을 괴롭히는 말을 하면 안 되고, 남에게 손해 끼치는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거요. 그게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게 뭐다? 거짓말 하지마라. 즉 사기 치지 말고, 욕설도 사기하고는 틀리잖아. 그지? 이 욕설이 남을 괴롭히잖아. 사기는 남을 손해 끼치잖아. 그지? 그 다음에 이간질 시키거나 아양 떨거나 이런 것도 남을 괴롭히는 거에 들어가기 때문에, 말로도 그렇게 하지마라. 이런 의미야.
그래서 그 의미가 그냥 윤리적으로 불교에서는 이거 바르다는데, 기독교에서는 틀렸다는 이런 개념이 아니라, 그것이 누가 들어도 합당해야 돼. 누가 들어도 합당해야 된다.
정명이다 그러면 바르게 생활하라고 번역하는데, 그것은 여러분들이 직업을 가질 때 어떤 직업을 가져도 자유야. 그러나 그 직업 중에 남을 손해 끼치거나, 남을 괴롭히거나, 이런 직업도 있을 수 있잖아. 그러니까 물건을 훔치는 직업도 있을 수 있잖아. 그 다음에 예를 든다면 포르노 같은 것을 내가 판다. 그 판다하더라도 안 팔면 좋지만 판다 하더라도 적어도 어린애들한테는 팔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식을 가진 부모로서 아무리 돈의 이익이 중요해도 그것은 안 된다든지,
예를 들면 무기를 파는 것도 안 된다고 되어있어. 왜냐하면 내가 직접 죽이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무기를 만들고 팔고하면 그 사람 죽이는 데 쓰잖아. 그러니까 무기를 만드는 직업이나, 무기를 판매하는 직업은 안 돼. 그런데 우린 여기 미국에 군수산업회사에 취직하고, 우리나라도 여기 방위산업에 취직해서 월급 많이 받고 하는 사람들 많잖아.
그러나 계율을 정확히 하면 그런데 취직하면 안 되는 거요. 취직 했으면 사표내고 나와서 딴 일을 해야 돼. 농사짓는 게 더 낫다. 이 말이오. 그런데 미국의 불자는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내가 미국불자 수기 읽어보면. 군수 회사 중에. 헬리콥터 만들고 하는 맥도날드가 더글러스 회사 있잖아. 그 회사 다니는 고위 과학자가 있는데, 그러니까 이공계 박사지. 미사일 만드는 거기에 있었는데, 자기가 불법에 귀의한 뒤에, 자기가 만든 미사일이 결국은 중동 이런 데 가서 엄청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알고 자기가 그것을 포기했지.
사로프 박사 같은 사람도 핵무기 만들고 난 뒤에 그것이 사람을 많이 죽인다고 자기가 반핵운동을 한 사람이잖아. 그지?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핵무기를 만든 사람인데, 그 사람이 반핵운동을 했잖아. 히로시만 나가사키 원자력 폭탄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런데 우리 불교인들은 복을 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가치관적 개념이 전혀 없잖아. 우리 불자들은. 그래서 어제 내가 대구에 사는 중국에서 온 불자가 있거든. 그 사람이 중국불교의 기복이 우리보다 10배로 더 심합니다. 이게 억압되어 있다가 풀어주니까, 기복이 굉장해. 그래서 그 사람 얘기가 방생을 하는데 독사 방생하는 것도 있고, 쥐 방생하는 것도 있고, 바퀴벌레 방생하는 것도 있고.
자기가 아무리 봐도 이것은 좀 아닌데 그것을 스님이 나서서 하는 게 이게 이해가 안 된다. 도대체 방생이 불교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런 질문했는데, 이 얘기 길게 할 수는 없고.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것은 없지. 그런데 그런 게 있을 수도 있어. 내가 딱 들으니까 “아, 그거 다 복 때문에 생기는 거야.”
그럼 우리가 보통 보면 방생할 때
제일 방생의 공덕이 크다는 게 자라방생이야.
그 이유는 자라가 오래 살기 때문에
자라가 오래 사니까 이게 복을 나한테 오래 물어다 줄 거 아니야. 그지?
가장 대표적인 방생의 물고기가 두 종류인데,
하나가 자라고
하나가 미꾸라지야.
미꾸라지는 수가 많잖아. 같은 돈에. 만원주고 자라 한 마리라면 미꾸라지는 백 마리 잖아. 그럼 백 마리가 물어다주니까 복이 많지. 그래서 이 잔잔한 물고기를 방생하는 그 복을 계산하는 의미가 있고, 한 마리를 하더라도 자라를 방생해야 복이 많다. 그럼 왜 이런 게 생겼을까? 그것도 다 복을 계산하는데서 나온 거란 말이야.
그럼 딴 물고기 더 잔거 주면 안 되냐?
미꾸라지는 하는 이유는
미꾸라지는 잘 안 죽어.
그런데 딴 것은 보통 이렇게 모아놨다가 물에 넣어줘도 절반이 죽어요. 예를 들면 이런 뾰족하고 납작한 고기는 금방 죽어버려요.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내가 생각할 때, 쥐를 방생하는 쥐, 지금 그 사람이 예를 든게 3가지인데, 쥐, 독사, 벌레가 다 혐오동물이잖아. 혐오동물이면 사람이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잖아.
마땅히 죽여도 된다. 똑같은 생명인데, 마땅히 죽여도 된다고, 괄시 받는 생명을 살려주면 복이 더 많을까? 안 많을까? 많겠지. 더 열악한 조건에 있을수록 사실은 복이 더 많은 거요.
스님도 똑같은 돈을 여러분들이 보시하는데
왜 한국사람 환자 치료 안하고
항상 인도 가서 치료하고, 인도 가서 급식비 주는 이유는
백만 원 보시하면 한국에서 급식비로 지원하면 10명밖에 지원 못하는데
인도 가서 지원하면 천명 지원하잖아. 백 명 지원을 하든지.
그러니까 당연히 복이 많을 거 아니야.
한번 생각해 봐봐. 안 그래? 환자를 살려도 천만 원 주면 여기는 5명 치료한다면, 거기는 100명을 치료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가능하면 우리는 더 열악한데 가서 돈을 쓰는 거요. 그게 성경으로 말하면 오병이어에요. 오병이어라는 게 뭔지 알아요?
빵 5개하고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산상에서 탁~ 시내에서는 탄압을 하니까, 산에 가서 설교를 했단 말이오.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거기 구름떼처럼 모여서 설교를 들었는데, 설교를 듣고 때가 되어서 배고 고픈데, 그때는 밥을 줄 수도, 절 처럼 해줄 수도 없고 하니까, 다 자기 먹을 것, 자기가 조금씩 가지고 왔다. 이 말이오. 가지고 왔는데,
그럼 가져온 사람은 먹고 없는 사람은 못 먹으니까, 이 법문을 들으면 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배웠는데, 실컷 법문 듣고 또 내 것은 나만 먹고 이거 안 되잖아. 그래서 사람들이 “아, 이런 좋은 법문을 우리가 설교를 들었으니 우리 다 내어서 나눠먹자.” 그래서 그것을 다 모은 거요. 다 모아 보니까, 빵 5개하고, 물고기 2마리더라. 그래서 그것을 다 나눠주니까 다 나눠주고도 남더라. 그 말은 공평히 나눠먹었다.
그러니까 공평히 나눠먹으면 이렇게 풍족하다. 이런 의미란 말이오. 그게.
우리 옛날에 콩 한개 갖고도 12명 나눠먹는다. 어릴 때 그런 말 못 들었어요? 콩 하나를 갖고 12명 나눠먹는다. 이런 말 못 들어봤어요? 들어본 사람 손 들어 봐. 경상도 사람 그것도 못 들어봤습니까? 출생이 의심스럽다.
그러니까 나누어 가지면, 지금도 우리 대한민국이 나눠가지면 풍족할까? 안 할까? 풍족해요. 내가 해외에 있으면서 연합뉴스에 나온 거 보니까, 대한민국은 더 심한데, 전 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심하냐? 상위 1%가 전 인류의 재산의 절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위 1%가 50%를 가지고 있어.
너무 했다? 그거보다 더 심한 게 있어. 하위 50%가 가진 재산, 그럼 없는 사람 50%란 얘기 아니오. 그지? 하위 50%가 가진 재산하고, 상위 285명이 가진 재산하고 같아. 그러니까 하위 50%라는 것은 아무 것도 가진 게 별로 없는 거요. 상위 1%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상위 안에도, 100등 안에 200등 안에 1000등 안에 들어가는 게 엄청나다는 거 아니오.
몇 년 전에는 하위 50%가 가진 재산과 맞먹는 게 상위 1500명이었다가 1300이었다가 1100명 이었다 900명 이었다, 599명 이었다, 2014년에는 285명으로 줄었어. 빈부격차가 그만큼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이란 원래 이게, 그래서 빈민을 구제하는 게 이게 무슨 열심히 하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좀 같이 나눠먹는, 소위 나눔의 정신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요번에 새로 된 교황은 그런 예수가르침에 좀 비교적 충실해 보려고 하니까, 신자유주의를 범죄라고 그러잖아. 범죄. 범죄라는 거죠. 그냥 하나의 경제정책이 아니고. 악이다. 이렇게 선언을 했잖아. 죄악이다. 이렇게까지 선언했잖아. 우리는 막 찬미하는데. 그건 죄악이다. 범죄다. 이렇게까지 선언을 했다. 이 말이오.
뭐하다 이런 얘기로 까지? 그래서 우리가 직업을 가질 때, 내가 내 이익을 위해서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은 좋은데, 그게 예를 든다면 의사인데 과잉진료를 한다든지, 예를 들면 보험사기를 한다든지, 이것은 나쁜 거에 속하잖아. 그죠? 그거는 그 직업 안에서 나쁜 거에 속하는 거라면, 직업 자체선택도 바르게 해야 된다. 이거야.
직업 안에서 바르게 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직업 자체도 갖지 말아야 할 직업이 있다, 이 말이오. 그러면 출가한 승려의 정명은 뭐냐? 그러니까 그저 걸식, 가서 주면 받고, 안주면 안 받고, 걸식을 해야 되는데, 이 보시를 많이 받기 위해서 일부러 고행을 해서 갈비뼈를 탁~ 이렇게 있으면 “아이고, 저 스님 공부 잘한다.”해서 보시를 한다든지, “나는 잠을 안잔다,” 소문을 내서 보시를 받게 한다든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행은 전부 정명에 어긋나는 거요.
그래서 부처님이 6년 고행하시고 파리한 육신으로 그대로 성도를 하면 중생들이 현혹된다는 거요. 뭐라고? “아, 굶는 게 성불의 길이구나.” 이렇게. 그래서 부처님이 공양을 드시고 육신을 회복하셔서 정진을 했다. 이런 말도 있고, 경전에 부처님 말씀에 나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기적 같은 것을 행하지 못하게 한 것은 그것이 사람을 현혹시킨다는 거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가 아니라, 그런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게 사람들에게 원인을 모르면 현혹된다는 거요.
그래서 이렇게 직업을 가지면 안 된다. 거기에 구체적으로 계율에 나오는 게 운명을 점쳐줘서는 안 된다. 손금을 보거나 관상을 보거나 사주를 배워서 “네 운명이 어떻다. 저떻다.” 이렇게 점치면 안 된다고 나와 있어요. 해탈과 열반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계율에 어긋나게 되어있어.
그러니까 정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요. 그냥 내가 생각하니 옳다 이런 개념이 아니고, 누구나 들어도 합당한. 그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것이 정등이야. 정. 정이라는 것은 바르다. 이것은 타당하다. 우리말로. 그 다음에 등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다 평등하다. 그래서 이것은 보편적이다. 이 얘기요.
그래서 보편타당한 깨달음. 보편타당한 깨달음 중에 더 이상 높은 것이 없다. 그래서 무상, 정등, 정각.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디. 삼보리. 이런 말이란 말이오. 그게 추상적인 용어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거기서 바르다 라는 것은 ‘옳으니 그르니’ 그런 시비의 개념이 아니다. 이 얘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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