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오랫동안 몹시 궁금한 것이 있어서 여쭤보러 나왔는데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이 길래 수천 년 동안 우리에게 이렇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 그게 몹시 궁금합니다.//
네. 굉장한 질문을 해주셨어요.
자, 그럼 내가 질문자한테 물어볼게요. 질문자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일이 생길 때, 괴로울 때가 있어요? 없어요? 억수로 많아요.
그러니까 좋은 일이라고 하는 것이 꼭 즐거움만 줘요? 좋은 일이 나중에 잘못되어서 더 나쁜 일이 될 때도 있어요?
나한테 좋은 일이 지금 좋은데 시간이 지나면 좋은 게 도로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때도 있어요? 없어요?
사업이 실패해서 잘못되었는데 나중에 결과로 돌아보면 그게 또 도로 좋은 일이 될 때도 있죠?
그런데 부처님은 연구를 뭘 했나?
사람이 왜 괴로울까를 연구하셨어요.
우리가 하다가 뜻대로 안되면 괴롭잖아. 그죠? 그럼 뜻대로 안되는데 왜 괴로울까? 이 말이오. 뜻대로 안되면 두 번하면 되고, 두 번해서 안 되면 10번하면 되고, 10번해서 안되면 그만두면 되지 왜 괴로우냐? 이 말이오. 왜 괴로우냐? 우리는 “당연히 괴롭지.” 이러는데, 그분은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왜 괴로우냐 이 말이오.
그러니까 12시에 남편이 술 먹고 들어오니까 아내가 남편 12시 술 먹고 들어온다고 괴롭다고 말해요. 그러면 질문을 해요. “남편이 12시에 들어오는데 네가 왜 괴롭냐?” 이거에요. 11시에 들어오면 안 괴롭고 12시에 들어오면 괴롭다 그러면 “그럼 11시 1분에 들어오면 괴롭기 시작하냐?” “5분에 들어오면 괴롭기 시작 하냐?” “30분에 들어오면 괴롭기 시작 하냐?” “59분까지는 안 괴롭다가 12시 땡! 하면 괴로우냐?”
이것을 우리는 안 따지는데, 이것을 아주
“왜 괴로운가?” 이것을 따져봤더니,
사실은 괴로울 일이 없다는 거요.
괴로울 일이.
그래서 이 괴로울 일이 없는 줄을 깨닫는 게
부처님의 가장 요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다 괴로워하고 있잖아. 그죠? 그런데 왜 괴롭냐 하면 애가 말을 안 들어서 괴롭다. 애가 말을 안 들어서 괴롭다. 남편이 어때서 괴롭다. 사업이 안 되어서 괴롭다. 뭐가 안 되어서 괴롭다. 뭐가 안 되어서 괴롭다 그러는데, 그것을 진짜 그것 때문에 괴롭냐? 하고 자꾸 따져들어가 보면, “괴로울 일이 없네.” 이렇게 되요.
그래서 어떤 여자 분이 막 울어요. 남편이 돌아가셨다고. 그러면 보통은 위로해주죠. 그런데 저는 귀에다 대놓고 이러죠. “너는 좋겠다. 시집 한 번 더 가고” 남편이 살아있는데 시집한번 더 가면 이거 욕 얻어먹지, 남편이 살아있는데 두고 스님이 되면 욕 얻어먹지. 그런데 남편이 돌아가시게 되니까, 스님이 되고 싶으면 스님이 될 수도 있고, 남자가 필요하면 결혼을 한번 더하면 되고, 아무 손해날 일이 없어요.
손해날 일은 이거요. “이 인간이 돈을 좀 더 벌어서 내가 베껴먹을 수 있는데, 이 인간이 일찍 죽어버려서 내가 지금 아직도 덜 베껴 먹었다.” 이게 아쉬워서 괴롭다. 이거밖에 사실 남는 게 없어요. 그런데 그만큼 벗겨 먹었으면 되었지, 뭘 더 벗겨 먹으려고 그래.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남편이 아내에게 잘한 사람일수록 남편이 죽으면 아내에게 더 슬퍼요. 남편이 아주 잘했다. 이러면 아내가 정신을 잃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이래요. “아이고, 당신 죽고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 이렇게 주로 하소연하고 웁니다. 맞죠?
그런데 자기 남편 죽은 거는 신경 안 쓰고 나 어떻게 살 것인지만 걱정하고 있잖아요. 남편 죽은 시체를 놔놓고 뭐라고 한다? “나는 어떻게 살고? 너 죽어버려서.” 이 걱정만 하는 게 인간이다 이 말이오. 그럼 또 뭐라고 그런다? “아이고, 애가 셋인데 저것을 내가 혼자 어떻게 키우노?” 이래. 지금 누구 걱정하고 있다? 이것도 내 걱정하지. 애 키울 내 걱정하는 거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걱정할 줄 밖에 몰라.
그런데 남편이 맨날 애를 먹이다가 술 먹고 담배피우고, 술 먹지 마라. 술 먹지 마라 싸우다가 남편이 갑자기 죽었다. 그러면 남편 놔놓고 아내라 뭐라고 그러는지 알아요? “아이고,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그렇게 먹고 싶은 거 실컷 먹도록 놔놓을걸.” 그러죠. 그러면
애먹인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누구 걱정합니까? 죽은 남편 걱정하고,
남편이 아내한테 잘해주면 누구 걱정한다? 내 걱정해요.
그러니까 남자들이 잘해줄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러니까 스님이 여러분한테 잘해주면 스님 죽을까봐 걱정하는데, 그것은 스님 걱정 하는 게 아니라, 내 물을 때 없을까봐 싶어서 걱정하는 거요. 자, 이런 게 인간이요. 자세히 살펴보면 참 재미있어요. 이런 것을 노골적으로 내가 얘기해서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나한테 잘해줬다면, 그 남편은 죽기까지 했잖아. 그죠? 그런데 살아있는 내가 걱정할 일이 없어요. 죽은 사람도 있는데 내가 걱정할 일이 뭐가 있어요.
그러니까 자세히 살펴보면 심리적으로 아쉬움은 있지마는
사실은 괴로울 일은 아니라는 거요.
이게 그 분이 깨달은 도리에요.
그런데 지금 여러분께
내가 이런 얘기해도 여러분이 납득이 안 될 거요.
그런데, 이거는 깊이 탐구하고 탐구하고 탐구하고 탐구해보면
이 도리를 알게 되요.
이 도리를 알게 되면 세상사 사는 게 힘이 안 들어요.
이런 도리를 알게 되면.
그러니까 이 괴로움이 없는 경지,
괴로움이라는 게 없다. 이것을 뭐라고 그러냐?
열반이라고 그래요.
열반이라는 말이 괴로움이 소멸되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한문으로 옮기면 적멸, 열반이라는 말은 한문이 아니고 인도 말이에요. 인도 말에 니빠나, 니르바나, 그것을 발음으로 옮기면 열반. 이래요. 그러니까
불교 수행의 목표는
열반에 이르는 겁니다.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괴로움이 없을 수가 있느냐?
그런데 연구하고 연구하고 연구하고 연구해보면 괴로울 일 없다.
이 말이 뭐냐? 텅 비었다. 이 말이오.
그것을 다른 말로 공이다. 그래요.
제법이 공한 줄을 깨달으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반야심경 첫 구절에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다음이 좋은 내용이에요. ‘조견오온개공.’
조견은 비추어 본다. 비추어본다. 후렛쉬를 가지고 탁 비추어 본다는 것은
사실은 확실하게 알았다. 이런 뜻이에요.
조견은 확연하게 깨달았다.
뭐를 확연하게 깨달았다?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오온이라는 것은 내가 오온이에요.
모든 세상 사물을 우리가 정리하면
오온이라고 그래요.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일체가 공하다는 말이에요.
일체가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도일체고액. 건넌다. 어떻게?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이것을 깨닫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이에요.
그래서 괴로움 없이 사는 거요.
그래서 부처님은 다 떨어진 옷 입고, 맨발로 남의 집에 밥 얻어먹고, 나무 밑에 잠자고 이렇게 살아도 괴로워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큰집 가지고, 마차 타고, 보석 차고, 열 여자 거느리고 사는 왕은 괴로워서 늘 부처님한테 와서 괴로워죽겠다 그러고, 그럼 부처님 설법 듣고 돌아가고. 그래서 왕들이 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거든요. 그래서 부처님은 왕이라 하더라도, 자기가 왕자일 때 왕이라 하더라도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왜 괴로울까를 연구하셔서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셨어요.
이것을 요즘 식으로 말하면 여러분들 지금 다 괴로워요? 안 괴로워요? 그렇죠. 그런데. 모든 사람은 다 행복할 권리가 있다. 이걸 선언하십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행복할 수가 있다.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남자든 여자든 기독교인들이든 한국사람 일본사람이든 어른이든 애든 신체장애가 있든 건강하든, 어릴 때 어떤 경험을 내었든 다 행복할 권리가 있다. 행복할 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소중한 권리를 자기가 행세를 못하고 있어요. 어떤 생각에 사로 잡혀서, “어릴 때 내가 맞았던 생각” “어릴 때 가난했던 생각” 이런 어떤 생각에 딱 사로잡혀 늘 괴롭게 사는 거요.
그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면
항상 행복하게 살 수가 있다.
순간순간은 또 사로잡히니까 괴로울 수가 있지마는
금방 알아차리고 돌아올 수가 있다.
그 깨달은 내용이 뭐냐를 철학적으로 연구해서 쓴 것이 제법이 공하다. 재행무상이다. 제법무아다. 열반적정이다. 이런 것을 이론화 시킨 게 교리에요. 이론화 시킨 게. 이론공부를 하다 보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하는데, 지금 오늘 딱
불교의 핵심이 뭐냐 하면
우리는 괴로운 사람, 중생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괴롭지 않은 경지로 나아갈 수가 있다. 이게 부처에요.
누구나 다 괴롭지 않는 삶을 살 수가 있다.
그래서 누구나 다 부처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죽어서 천당 가고, 극락가고, 어디 가고, 다시 태어나고 이런 거는 종교화 된 불교에서 나온 얘기고, 그건 부차적인 얘기요. 핵심은 딱 요거다. 마음에 들어요? 안 들어요? 별로 안 드신 거 같네.
그럼 인간 말고 누구를 위해서 존재해야 되요? 아니 그러니까 인간 말고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된다는 거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천하 만물과 연결되어있어요.
인간이 위한다는 게 만 생명을 위하는 거고,
만 생명을 위한다는 게 만 중생을 위하는 거고,
만 중생을 위한다는 게 온 우주를 위한다는 거요.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따로의 존재가 아니라, 연관된 하나의 존재다.
이것을 연기라고 그래요.
의문 있으면 또 물어보세요.
왜 허망합니까?
그러니까 그게 없으니까 괴로울 일이 없잖아요. 괴로워야 된다. 자기는 괴롭고 싶다 이거네. 그래. 공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뜻이 아니고, 공이라는 것은 이런 뜻이에요. 오늘 질문을 하시니까, 여기 지금 컵이 있죠? 요 컵이 이 통하고 비교하면 컵이 작아요? 커요? 그러면 이 컵을 뚜껑하고 비교하면 커요? 작아요? 크죠. 다시 통하고 비교하면 작고, 뚜껑하고 비교하면 크죠. 그럼 이 컵 자체는 커요 작아요?
이 컵이 크냐 작으냐니까. 그러면 본인이 잘 아시네요. 수행 많이 하셨어요. 이 컵 자체를 크냐 작으냐고 물으면, 묻는 사람의 언어를 빌려서 어떻게 대답할 수 있어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고치면 어떤 말이 될까?
비대비소.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그럼 이 컵은 크다할 때,
크다고 우리가 말을 할뿐이지 여기는 크다는 속성이 없고,
이 컵을 작다할 때도 작다는 속성은 없다는 거요.
이 컵은 이 큰 것하고 비교해서
머리에서 인식될 때 크다고 인식되는 거지,
이 컵에는 크다고 하는 속성이 없고.
이 뚜껑하고 비교해서
내가 인식을 할 때 작다고 인식할 뿐이지
컵에는 작다고 하는 속성이 없다.
그러니까 인식이 될 뿐이지.
인식상 크다 작다고 인식이 되니까,
크다 작다는 것은 다 마음이 짓는 바다.
이것을 일체유심조라고 그래요.
그러면 이 컵은 크다는 속성도 없고,
작다는 속성도 없다.
이것을 공이라고 그래요.
컵이 없다는 뜻이 아니고,
컵에 크다는 속성도 없고,
작다는 속성도 없다.
이 컵은 새 거냐? 헌 거냐? 했을 때 어떻게 비교하느냐에 따라서 새 거다 헌 거다 할 수 있잖아. 이 컵이 무겁냐? 가볍냐? 할 때도 무겁다 할 수도 없고 가볍다 할 수도 없고. 이 컵이 좋은 거냐? 나쁜 거냐 할 때도 좋다고 할 수도 없고, 나쁘다고 할 수도 없어요. 이 컵 자체는. 그러니까 컵에는 그 어떤 속성도 없다.
그러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냐?
아니다.
인연을 따라서는
큰 게 되기도 하고, 작게 되기도 하고,
무겁게 되기도 하고 가볍게 되기도 하고
새것이 되기도 하고 헌 것이 되기도 하고
좋은 것이 되기도 하고 나쁜 것이 되기도 한다.
이럴 때 ‘이 컵은 그 어떤 속성도 없다.’
이것을 공이라고 그래.
공이기 때문에 온갖 게 다 될 수가 있어요.
크게 될 수도 있고, 작게 될 수도 있고,
무겁게 될 수도 있고. 가볍게 될 수도 있고.
그것을 공이라 하기 때문에.
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이해하셨어요?
그러면 질문자는 늙었어요? 젊었어요? 80 되신 분하고 비교하면 젊죠. 그러니까 질문자는 공이에요. 즉 늙은 것도 아니고 젊은 것도 아니에요. 늙었다 젊다는 것은 어떻게 인식하느냐? 80된 분하고 인식하면 “젊은 자네가 가서 심부름 하게.” 이렇게 하고, 50된 분하고 있으면 “늙은 어르신께서 먼저 하세요.” 이렇게 얘기하는 거요.
자기는
때로는 늙은이라고도
때로는 젊은이라고도 듣는 거요.
자기 존재는 늙은 것도 아니고,
젊은 것도 아니다.
이것을 공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내가 늙은 것도 아니고, 젊은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
늙었다, 젊었다 갖고 괴로울 일이 없어져요.
그런데 왜 허무해요? 좋지. 괴롭던 게 싹~ 없어지지 왜 허무해요?
왜 제어를 합니까? 그러니까 내가 화가 나면 참는다는 것은 억제 하는 거 아니오. 화가 났으니까 참겠지, 화가 안 나면 참을 게 있어요? 없어요? 그러니까
화가 날 때
왜 화가 날까하고 연구하면
화날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요.
지금 화가 나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화를 참는 길 밖에 없단 말이에요.
화를 내거나 참는 일 밖에 없는데,
그 속성이 공한 줄을 알면,
화날 일이 없는 줄을 알아버리면
참을 일이 없어져버려요.
화를 참는다는 것은 이미 화가 났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거요. 근본으로. 이 관점, 보는 관점을 딱 조금 조정하면, 생글생글 웃으면서 살 수 있다. 이 얘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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