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버지께서 난치성 질환 판정
호흡근을 포함한 전신의 근육이 서서히 약해지는 질병
치료법은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평균 2년 정도의 자가 호흡이 가능
아버지의 뜻대로 해야 할지 아니면 그래도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자가 호흡이 어려우신 아버지를 응급실로 보내서 기관 절개를 받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이 아닐지 고민이 됩니다.
인간의 시간이 참 짧다고 느껴지는데
불교에서는 이렇게 짧은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나 가치가 있다고 보는지 궁금합니다.//
두 번째부터 먼저 대답하면요
불교에서는 인간의 삶은
한 포기 풀처럼, 한그루 나무처럼, 한 마리 다람쥐처럼 그냥 산다, 이렇게 봅니다.
특별히 사명을 갖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특별히 죄를 짓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사는 데까지 살아간다.
그런데 사는 동안, 어떻게 살 거냐?
괴로워하면서 살 거냐?
무거운 짐을 지고 살 거냐?
미워하면서 살 거냐?
아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가볍게, 자유롭게, 행복하게, 기쁘게, 그렇게 사는게 좋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어떤 사명이라는 것은
자기가 만들어서 그것을 짊어집니다.
꼭 사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겠다”
“나는 마음이 괴로운 사람을 보살피는 그런 구세주가 되겠다”
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살아있는 삶을 보람있게 살기 위해서
그런 목표를 정하고
목표를 향해서 살아가는 거다.
그러니까 그것은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사는게 더 좋기 때문에 그렇게 산다.
사람이 혼자 산다면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같이 살기 때문에 사람은 주고받게 된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면
그 해가 끼치는데 머무르는 게 아니라
나에게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해를 끼칠 때는 멋모르고 끼치지만
그 해가 나에게 돌아올 때는 너무나 큰 무거운 짐이 되기 때문에
가능하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마라.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지 마라.
타인에게 괴로움을 주지 마라.
말로도 그렇게 하지 마라.
왜?
그것은 타인을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 해서
그것이 나에게 되돌아 왔을 때
나에게 더 큰 고통이 된다.
어리석은 자는
작은 행위를 하고 큰 고통을 받지만
지혜로운 자는
큰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멈출 줄 안다.
이런 가르침이에요.
그러니까 언뜻 보면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자세히 보면 굉장히 쉽고, 굉장히 합리적이고, 누구나 다 알 수 있고
뭐 그런 가르침이에요.
살아있는 생명은
살려고 태어났기 때문에 함부로 죽이지 마라.
모든 생명은 언젠가 그 명이 다하게 되어 있다.
태어났다는 것은
이미 죽음이 있다는 걸 말해요.
죽음이 없다 그러면
태어나지 않게 된다는 거예요.
생겨난 것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라지니까 생겨난다는 말이 존재하고
생겨나니까 사라진다는 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생겨난 것은
생겨서 유지될 때까지 함부로 그것을 사라지게 하지 말고
또 때가 되어서 사라지는 것을
살아지지 않도록 하려고도 애쓰지 마라.
즉 살아있는 생명은 함부로 죽이지 말고
죽어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때에 이른 생명을
억지로 살리려고도 하지 마라.
이것이 자연의 순리이다.
뭐 이런 입장이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인생을 보면 되는데
인생의 괴로움은
이런 자연의 순리, 원리, 너무나 당연한 그것을 자꾸 거슬러서
몰라서 거슬러 가거나
욕심으로 눈이 어두워서 거슬러 가거나
이렇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다, 이런 얘기에요.
앞의 질문은 이 정도 얘기해서 알아들었으면 내가 더 설명 안해도 되고
그래도 조금 더 얘기가 필요하다 그러면
병을 얻었다, 그러면
이 병이라는 것은
현재 우리의 능력으로 고쳐질 수 있는 병이 있고
고칠 수 없는 병이 있다.
고칠 수 있는 병은 최선을 다해서 고치는 게 필요하다.
고칠 수 없는 병이면 거기에 고칠 수 없는 병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환자도 힘들고 환자를 돌보는 가족도 힘들게 된다.
또 결과도 좋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많은 에너지를 쓰고
그 결과가 좋지 않다, 이런 얘기죠.
그래서 집착을 하면 그것이 괴로움이지만
큰 틀에서 볼 땐,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고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 하고
그러고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오는 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옛날 우리 선조들은
일은 사람이 하고, 뜻은 하늘이 이룬다.
이렇게 표현했어요.
요즘식으로 말하면
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 결과를 받아들인다.
이런 얘기에요.
운동선수들도 게임을 할 때는 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게임에 졌다고 울분을 토하고 자학을 하고 남을 미워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아버님이 살아계시는데
내가 돈 달라는데 돈을 안 준다고,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된다고
그 목숨을 해치거나
또는 내 자신이 마음대로 안된다고 내 목숨을 해치는
살인이나 자살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난다.
그걸 행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아버님이 현재에 주어진 조건에서 그러한 수명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면
본인도 가족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산소호흡기를 달거나 목에 구멍을 넣고 호흡을 하게 하거나 음식을 투여하거나 해서
생명이 어느 정도 연장시켜서 뭘 하겠다는 거냐.
그러니까 교통사고가 나서 수명을 그렇게 해서라도 하루나 이틀, 한달 연장시키면
그 기간에 다른 병이 나아서 회복이 된다.
그럴 때는 응급치료를 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 회복이 안되는데 다만 생명을 한달 연기를 한다.
1년을 연기한다 할 때, 그것이 환자에게 고통이 될 수도 있다.
가족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을 연장시키는 어떤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오히려 환자에게는 큰 고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요즘 와서는
자기의 죽음을 좀 존엄하게 마칠 수 있다.
내 죽음을 좀 비참하게 하지 말고
내가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달라.
이래서 불치의 병인 경우, 안 그러면 통증이 지나치게 심한 경우는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게 허용이 안 됩니다.
그다음에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는 산소호흡기를 땔 수 있다.
그런데서 그 결정은 가족들이 하는 게 아니고
아버지가 아무 의사표시를 안하고 의식을 잃어버렸을 때는
결정을 못하니까 가족이 할 수밖에 없는데
아버님이 의식이 있을 때,
“나는 산소호흡기를 사용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사는 데까지 살다가 내 힘으로 호흡을 못하면 나는 더 이상 치료하지 말아라”든지
“나는 그렇게 목에 구멍을 내서 강제적으로 호흡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하면
그 뜻을 존중하는 게 맞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도 수십 년 전에 어머니께서 암이셨는데, 늦게 발견이 되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수술을 하자고 하는데
어머니께서
“말기니까 나는 지금까시 살아왔는데 사는게 좀 힘들었다.
그래서 난 좀 조용히 쉬고 싶다.
그런데 또 지금 수술을 해서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나는 원치 않는다.
그러니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게 한달 남았든, 두달 남았든 그냥 살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다.”
그래서 저희 가족은 다 동의를 해서 수술을 하지 않고
그냥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사고가 나서 다리가 하나 부러졌다.
그런데 어떤 축구선수가
“나는 다리 부러져서 살 바에야 축구를 못할 바에야 죽는게 낫겠다.
나한테 안락사를 시켜달라”
이것은 올바른 게 아니다, 이거야.
이것은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라도 치료를 하고 살려야 한다.
이건 자기뜻대로 안된다고 자살하는 거와 같은 거다.
그러나 명이 다되어서
“더 이상 추하게 기계에 의해서 통증을 느끼고 고통을 겪으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표현한다면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는 게 옳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의 아쉬움에 집착해서 아버지의 고통을 연장시킨다는 게
효도 아니고 저는 불효다, 이렇게 생각해요.
나의 아쉬움은 나의 마음을 다스려서 해결해야지
아버지가 원치 않는 것을 해서 해결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본인 얘기 더 해보시죠.
...
네, 누구나 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의 삶이나 가족의 삶에 있어서
이런 것은 큰 아픔이고 불행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삶의 현실이다.
우리는 이것이 현실인데도 우리는 외면하고 싶은 거예요.
이런 것을 보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 않고, 겪고 싶지 않다.
그래도 우리는 결국 이 일은 겪어야 하는 거다.
여러분들이 주위에 돌아가시는 분이 많다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나이가 많이 들었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어릴 때는
여러분들하고 관계 맺는 사람 중에 돌아가시는 분이 아주 드뭅니다.
그러나 내 주위에 돌아가시는 분이 자꾸 생긴다는 것은
내가 점점 나이 들어가고 있다. 하는 것을 말하고
우리는 이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까 그런 것에, 피할 수 없는 일에 전전긍긍하는 것은
살아있는 현재의 내 삶을 괴롭게 만드는 거다.
그래서 이러한 삶의 현실을
여러분들이 즉시하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그것이 내 가족이라도 어쩔 수 없고
그것이 설령 나의 삶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것은 돈을 갖고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나 신을 부른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이것은 지위를 갖고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태어나고 죽는다고 하는 것은
만인에게 공평하고 평등한 하나의 자연의 법칙이다.
다만 그것이 조금 길고 조금 짧고의 차이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은
어떤 생명도, 어떤 사람도 삶을 좀 더 고통이 없게 살 수 있도록
차별하지 않고
먹는 거는 굶어 죽는 일이 없도록
병들어 죽는 일이 없도록
강제로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차별하지 않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우리가 가능하면 그런 평등한 세상,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자.
이렇게는 말할 수 있지만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죽음은 굉장히 신비한 게 아니고
죽음은 그냥 천하 만물이 늘 일상적으로 겪는
그냥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을 좀 갖고 대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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