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5)

[법륜스님의 하루] 부처님이 가르쳤다고 전해오는 선정을 닦는 법 (2025.2.23.)

Buddhastudy 2025. 2. 27. 20:33

 

 

선정을 닦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해보려는 방법은

부처님께서 직접 하셨고

또 대중들에게 가르치셨다고 전해오는 방법입니다.

즉 테라바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위파사나 수행법을 기본으로 해서

선정을 함께 닦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수행자는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닦아야 합니다.

()지킨다라고 해서 지계(持戒)라고 표현합니다.

 

선정은 닦는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지혜는 증득한다라고 표현합니다.

 

계행을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증득하는 자를 수행자라고 합니다.

 

팔리어로는

계율을 실라(Sila)라고 하고

선정은 사마디(samādhi)라고 하고

지혜는 반야(Panna)라고 합니다.

 

 

--선정을 닦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팔정도(八正道)

여덟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도()’라는 의미입니다.

이 중에서 지계에 해당하는 부분이 세 가지,

선정을 닦는 데 해당하는 부분이 세 가지,

그리고 지혜를 증득하는 데 해당하는 부분이 두 가지 있습니다.

 

여기서 선정을 닦는 데 해당하는 부분이

바로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입니다.

 

첫째, 정정진(正精進)쉼 없이 꾸준히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정념(正念)깨어있음또는 알아차림을 의미합니다.

셋째, 정정(正定)고요한 가운데 집중되어 있다

또는 집중된 상태에서 고요함이 유지된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요한 것만이 아니고 집중된 상태에서 고요한 것을 뜻합니다.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사마디(samādhi)’는 정정을 말하기도 하고,

정정진, 정념, 정정, 이 세 가지를 합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팔정도의 이 세 가지를 기초로 선정을 닦기에

앞서, 먼저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계율은

선정을 닦는다고 하면서 욕설을 한다든지

선정을 닦는 과정에서 남의 물건을 뺏거나 훔친다든지

선정을 닦는 중에 화를 내고 남을 때린다면

그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거친 행동을 하면 마음을 고요히 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선정을 닦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마땅히 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마땅히 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선정을 닦을 때는

첫째, 자세를 편안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긴장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몸이 굳습니다.

잘해보려고 애를 쓰다 보니 긴장이 되는 겁니다.

잠시 명상해서 큰 깨달음을 얻겠다는 욕심을 내기 때문에

자꾸 몸이 긴장되고 마음으로 애를 쓰는 겁니다.

그래서 먼저 몸과 마음을 편안한 상태로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눈을 감고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면 금방 졸음이 옵니다.

머리를 박고 아예 코까지 고는 사람도 있고

계속 꾸벅꾸벅 조는 사람도 있고

안 자려고 애를 쓰는 사람도 있어요.

 

 

둘째, 알아차림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자세가 편안한 것만 중요하다면

잠이 들어도 되고 졸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조건도 갖추어야 합니다.

정신이 딱 깨어 있어야 해요.

아주 작은 소리, 작은 감각, 작은 마음의 움직임까지

스스로 확연하게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의를 딱 집중해서

어떤 소리를 듣거나 어떤 사물을 관찰하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대부분 긴장이 됩니다.

 

군인이 보초를 설 때도 전방에 주의를 딱 집중하면

몸과 마음이 바짝 긴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긴장을 풀라고 하면 주의 집중력이 떨어지고

주의를 집중하라고 하면 몸과 마음이 긴장합니다.

 

지금껏 우리가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 두 가지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합니다.

편안한 가운데 주의를 집중하고 뚜렷이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긴장을 풀면, 졸음이 오거나 망상이 생기고

알아차리려고 하면, 긴장하고 애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이쪽으로 치우쳤다가 저쪽으로 치우쳤다가 하게 됩니다.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알아차릴 뿐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나태함과 흐리멍덩함에 치우쳐도 안 되고

그렇다고 애쓰고 긴장하는 쪽으로 치우쳐도 안 된다는 겁니다.

이 둘을 떠나서 편안한 가운데 주의가 딱 집중되고,

알아차림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 알아차림이 분명한 것을 팔정도에서는 정념이라고 합니다.

선불교에서는 소소영영(昭昭靈靈)’이라고 합니다.

뚜렷한 알아차림을 유지한다는 의미입니다.

 

카르마는 나도 모르게 작용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행위와 심리 현상은 대부분 나도 모르게 일어납니다.

즉 무지상태로 일어나는 거예요.

이것을 변화시키려면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무지하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뭘 모른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수행에서 무명, 무지,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알아차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마치 물고기가 낚싯밥을 물 듯이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하고

인연법에 대해 무지한 결과입니다.

수행에서의 무지란 어떤 행위나 심리 상태가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미리 알아차림으로써

행위와 심리의 결과가 나쁜 결과로 이어지지 않도록 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행위는 욕망이 일어난 후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행위가 일어날 징조를 미리 알아차리면

행위를 유발하는 욕망과 갈애(渴愛)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선정을 닦으면 행위가 일어날 징조를 미리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정을 닦는 것은 계율을 지키는 것보다

좀 더 근원적인 처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율은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에

약간의 스트레스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정은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어떤 것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알아차릴 뿐이기 때문입니다.

 

대념처경에서는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몸과 느낌, 마음과 법, 네 가지를 말합니다.

이것을 사념처라고 합니다.

 

몸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감각을 알아차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고, 동작과 자세를 알아차리고, 몸의 구성을 알아차리고

몸의 해체 과정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앉아서는 호흡을 알아차리고

움직이면서는 동작과 자세를 알아차리는 연습을 시작으로 느낌

마음을 알아차리는 연습까지 나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들숨과 날숨을 뚜렷이 알아차립니다

 

우리가 명상을 할 때 연습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를 수식관(數息觀)’이라고 합니다.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가는 것을 뚜렷이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알아차릴까요?

눈으로 보고 알아차리는 것도 아니고

귀로 듣고 알아차리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요한 상태에서 숨이 들어오고 나갈 때는

거의 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바로 코끝과 코 주변에서 숨이 들어오고 나갈 때의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일체의 행위를 멈추고

오직 들숨과 날숨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호흡의 알아차림은 움직이거나 서서하기보다

앉아서 할 때 집중이 되고 알아차림을 유지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좌선이 끝나면

천천히 일어나서 걷는 행선을 합니다.

행선은 자신의 동작과 자세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이 손을 드는지 내리는지를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움직입니다.

행선은 내가 움직인다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좌선은 행위를 멈추는 것이고

행선은 행위가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왼발이 앞으로 나가는지 오른발이 나가는지

허리를 구부리는지 펴는지, 동작과 자세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에 해당합니다.

감각 가운데에서도 촉각에 들어갑니다.

남이 구부리는 것을 아는 것은 시각으로 알 수 있지만

자신이 구부리는 것은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움직일 때는 동작과 자세를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좌선과 행선을 두 가지를 합니다.

좌선은 동작을 멈춘 가운데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행선은 움직이면서 동작과 자세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각과 느낌을 알아차리면

내 카르마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일상에서는 이것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네가 잘못해서 화가 일어났다!’ 하고 바깥에서 핑곗거리를 찾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 있는 중에

내가 엄청나게 화가 난다면,

누군가 지금 나를 화나게 한 게 아니잖아요.

가만히 앉아 있는데 심장이 벌떡벌떡 뛴다면

원인이 바깥에 있는 게 아닙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에게 내재되어 있던 것이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증상이 일어나더라도 괜찮습니다.

명상이 잘됐다, 안 됐다, 평가할 것도 없습니다.

명상을 하다가 졸았다면

명상이 잘 안 된 것이 아니라,

내 몸의 상태가 수면 부족이거나 피로한 상태라는 것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졸린 가운데 알아차리고,

다리가 아픈 가운데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다리가 아프면 우리의 생각은 이미 통증에 가 있습니다.

다리를 펼까, 말까?’, ‘왜 죽비를 안칠까?’ 하는 생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호흡 알아차림을 놓치게 됩니다.

계속 그 생각에만 빠져있는 거예요.

 

명상은 몸에 어떤 감각이 일어나든

바깥에서 어떤 냄새나 소리가 나든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호흡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면 통증이 없어진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통증이 있는 가운데에서도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핵심입니다.

 

물론 명상하는데 방해꾼이 없으면 좋겠지만,

방해꾼이 있어도 알아차림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방해가 있는 상태에서 알아차림이 유지되면

다음 단계에 더 유리해집니다.

 

다음 단계가 어차피 방해가 있는 가운데

알아차리는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방해가 있으면

초심자는 알아차림을 유지하기가 힘들 수 있는데

어차피 넘어야 하는 과정입니다.

 

몸에 어떤 증상이 있든, 밖에서 어떤 소리가 나든,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그것은 늘 있는 일이에요.

졸음도 있고, 다리 통증도 있고,

옆에서 소리내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평상시에는 몸이 가려우면 자신도 모르게 긁지만,

명상하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그런 욕구가 엄청나게 일어납니다.

일어나는 욕구를 지켜보면

내가 평상시에 엄청나게 움직이는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제일 좋지만,

생각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뭐든지 그냥 내버려두고,

명상하는 내내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자꾸 해야 합니다.

그렇게 알아차림이 조금 더 분명해지면

자기 자신을 알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알면 변화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