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제 삶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부모님의 이혼, 사춘기 시절 아빠의 재혼은
미성숙했던 제게 큰 고통이었고,
결국 고등학교 때 집을 나와 친엄마와 살았습니다.
하지만 친엄마께서도 제 또래의 딸이 두 명 있는 분과 재혼을 하시면서
크고 작은 트러블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성장 과정을 거치며 제가 다짐했던 건
'나는 나중에 절대 이혼하지 않고 내 가정을 이루어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고, 예쁜 아이만 낳게 되면
여느 가정처럼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아이는 생후 50일경 염색체 돌연변이로
희귀 난치성 뇌전증이라는 병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중증 장애인 판정을 받았고,
앞으로 50세가 넘어서도 제가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입니다.
처음에는 '끝이 없는 터널에 내가 있구나' 하는 마음에 좌절했지만
제가 무너지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활 속에서 가끔 한없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아이와 바깥을 나오면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숨게 됩니다.
아이를 신기하게 쳐다보거나 안타깝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저에게는 너무 힘듭니다.
엘리베이터에 누군가 같이 탈까 봐 항상 불안해하며
결국 자꾸 아이랑 집 안에 숨어 있게 됩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제 스스로도 힘들지만
제 자신이 아이한테 너무 부끄럽게 느껴져서 속상합니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저는 항상 평범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저를 다스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 엄마 아빠가 이혼하지 않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당연히 좋았을 겁니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그러나 그런 환경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돌연변이로 인해 어떤 장애를 갖게 되었다면
그것도 아이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것처럼 질문자가 태어난 가정에서
엄마 아빠가 싸우는 것도 질문자의 잘못이 아닙니다.
어른이 돼서 주위를 돌아보면
부부지간에 싸우고 이혼하는 것은
세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까?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잖아요.
그냥 보통 일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이혼하는 게 아주 드문 일이었지만
30년 지난 지금은 이혼하는 부부가 절반 가까이 되잖아요.
미국은 절반이 훨씬 넘어요.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이혼도 드물었지만,
이혼을 한 여성들이 재혼을 하는 경우도 드물었어요.
남자는 재혼을 하지만,
사별하거나 이혼한 여성들은
애들을 데리고 대부분 그냥 혼자 살았어요.
그런데 앞으로는 어떨까요?
뜻이 안 맞아서 이혼을 하게 되면
여자도 재혼할 확률이 훨씬 높아질 겁니다.
미국은 재혼한 가정이 초혼 가정보다 많아요.
그럼 당연히 한 가정에 양쪽 애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남자와 재혼을 한 여자는
그 아이를 키워야 될 것이고,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여자와 재혼을 한 남자는
자기가 낳지 않은 아이를 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모습이 미국에서는 일반적입니다.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대통령도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은 특별한 게 아니에요.
만약에 질문자가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랐다면
질문자와 같이 사는 게 다수이기 때문에
평범하지 않는 가정에서 자란 게 아닙니다.
‘평범하다’, ‘평범하지 않다’ 하고 말하는 기준이 뭐예요?
소수인지 다수인지 차이일 뿐입니다.
질문자가 자랄 때는 그게 소수였기 때문에
본인이 평범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앞으로 미래에는 그게 다수가 되니까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제는 ‘평범하다’, ‘평범하지 않다’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질문자가 살아온 것은 그냥 인생살이일 뿐입니다.
그리고 질문자의 아기가 돌연변이를 일으켰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보면
약 10만 분의 1 정도의 확률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번에 인도에서 한 여성이 애를 낳았는데
머리가 2개이고 팔다리가 8개였습니다.
이것은 옛날 같으면
‘세상에 어떤 재앙이 일어날 징조다’, ‘신의 저주이다’
이렇게 평가할 일입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보통 수정란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일란성쌍둥이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분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런 현상이 생길 수가 있다고 합니다.
분리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둘이거나, 팔다리가 각각 따로 달리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현상은 천만 명당 한 명,
약 0.001%의 확률로 일어나는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그런데 인도에서 이런 경우가 많은 이유가 뭘까요?
인도의 기후 환경이 이상해서 그럴까요?
아니에요.
인도는 14억의 인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만 명당 하나의 확률로 발생한다 하더라도
인도에서는 140명이나 발생할 수 있잖아요.
중국도 인구가 14억이지만
중국은 공산주의 사회라서 통제가 되기 때문에
바깥으로 알려지지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런 뉴스는 대부분 인도에서 나와요.
인도의 인구는 유럽과 미국을 합친 인구보다 많습니다.
왜 인도에서만 이런 일이 발생하느냐고 생각하는데
인구가 많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다른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질문자가 그런 아이를 낳은 것도
자연 생태계적 입장에서 보면 특별한 일이 아니에요.
단지 확률 안에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 것일 뿐이에요.
질문자가 지금 암이 걸렸다 하더라도
그것도 특별한 게 아닙니다.
암은 100명 중 1명에게 일어날 수 있는 확률에 해당되는 병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지
그 일이 일어난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교통사고가 난 것이 신의 저주는 아니잖아요.
교통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확률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추석에 천만 명이 이동한다면
교통사고로 5명에서 10명 정도가 죽을 확률이 있습니다.
추석 때마다 사람이 많이 이동하니까 그런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사고를 좀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시스템을 개선하면
사망자를 10명에서 5명으로, 5명에서 3명으로 줄일 수는 있지만
사고를 완전히 없애는 건 어려운 거예요.
사람이 많으면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돌연변이가 다른 사람한테 일어나지 않고
왜 하필 내 아이한테 일어났느냐고 따지면
이 일이 특별한 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 전체를 놓고 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신생아 중에는 수십 수백 명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러니 단지 하나의 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난 것일 뿐입니다.
이런 현상은 저주도, 징벌도, 팔자도 아니고
그냥 길 가다가 돌멩이가 떨어져서 다치는 것처럼
자연생태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확률 중 하나가
나에게 일어났을 뿐입니다.
이럴 때 수행자라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보다 오히려 나한테 일어나는 것이 낫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겁니다.
만약 이런 일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났을 때
그들이 얼마나 놀라고 괴로워했을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기독교 신자라면
모든 자연현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겠죠?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다고 다짐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받아들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불교의 관점에서는
‘이런 인연이 나에게 도래했다면
내가 기꺼이 이 과보를 받겠다’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다음에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자꾸 생각하기보다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옥상에서 떨어진 간판에 머리를 맞았을 때
'왜 앞에 가던 사람도 아니고, 뒤에 가던 사람도 아니고, 나만 맞았냐?' 하고 따지다 보면
신비주의로 빠지기 쉽습니다.
일단 다쳤으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일단 치료를 받은 다음에
왜 간판이 떨어졌는지 조사해 봐야 합니다.
공사 현장이기 때문인지, 간판이 떨어진 이유가 바람인지
간판이 낡아서인지 따져보고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태풍이 불 때는 조심한다든지
낡은 간판은 정부에서 전부 교체를 하게 한다든지
공사할 때는 보호막을 쳐서
행인이 다니는 데는 건축물 잔해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한다든지
이렇게 개선을 할 수 있으면 전화위복이 되는 겁니다.
이게 단순히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런 개선점이 안 나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장애를 가진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요.
첫째, 내가 직접 돌보는 게 아이에게 최선이라면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돌봐야 됩니다.
둘째, 내가 아무리 아이를 돌보고 싶어도
이런 장애를 가진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는
전문 의학 지식을 가진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밥을 먹거나, 배변을 하거나, 교육을 받거나, 응급 상황에서 치료를 받거나
이런 활동을 집에서 비전문가가 하기에는
아이에게 위험할 수 있어요.
이런 경우에는 훈련된 전문가들이 아이를 돌보는 게 낫습니다.
내가 아무리 아이와 떨어지는 것이 힘들어도
아이를 위해서 전문 교육기관이나 전문 보호시설에 맡겨야 합니다.
나를 기준으로 '내가 보고 싶다', '내가 힘들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아이를 기준으로 아이에게 어떤 것이 더 좋은지를 봐야 합니다.
아이를 전문 교육기관에 맡기는 것이 아이에게 더 좋은데도
내가 아이를 못 떼놓고 계속 안고 있으면
아이가 자립하기 어려워요.
그리고 내가 키우다가 힘들어서 뒤늦게 교육기관에 맡기면
집에서 살던 버릇이 굳어져서 아이가 적응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교육기관에서는 엄마처럼 대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아이를 끝까지 돌보기 어렵거나
전문가의 의견이 보호시설에서 아이를 돌보는 게 좋다고 하면
보호시설에 맡기고
정기적으로 방문을 하면서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없더라도 아이가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됩니다.
또 급한 일이 있을 때는
치료를 효과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이것은 보호시설에 아이를 버리는 게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팽개치는 것과는 성격이 달라요.
질문자는 아이 상태가 어떤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전문가와 의논해서 아이에게 가장 좋은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런 아이가 있는 나도 행복하게 살아야 되고
이런 몸을 가진 아이도 행복하게 살아야 될 거 아니에요?
이런 아이가 있는 부모는
죽을 때까지 우울하게 살아야 된다는 법은 없어요.
질문자가 지금 생각을 잘못하고 있습니다.
질문자의 어린 시절도 평범한 삶이었고
지금 일어난 일도 평범한 일입니다.
다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아이를 기준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내가 돌보는 게 아이의 미래에 가장 좋다면
내가 힘들어도 돌봐야 되고,
전문가에게 맡기고 내가 후원을 하는 게 좋다면
아무리 내가 가슴이 아파도 아이를 위해서 전문기관에 맡겨야 됩니다.
또 나는 내 인생을 살아야 됩니다.
아이를 업고 다니면서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를 전문기관에 맡기더라도
떳떳하게 내 인생을 살아야 됩니다.
'이런 애를 두고 내가 행복하게 살아도 될까?'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
질문자가 웃으면서 애를 키워야
애가 조금이라도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엄마가 늘 우울하고 인상 쓰고 조마조마해하면
애가 정신적으로 밝아질 수 있을까요?
아이를 잘 키우려고 너무 애쓸 필요가 없어요.
질문자가 행복하게 살면 아이는 저절로 잘 큽니다.
자기는 불행하게 살면서 아이는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스님이 늘 근심 걱정이 많고, 우울해하면서 여러분한테는
'행복하게 사세요' 이렇게 말하면 설득력이 있겠어요?
스님부터 이렇게 밝은 얼굴로 사니까
그나마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설득력이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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