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한 가지는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면
그 사람에 대한 증오나 분노가 사라진다는 가르침입니다.
개념적으로는 사람은 대부분 환경의 산물이며
자신이 아는 방식대로 삶을 살아갈 뿐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저도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상대방의 생각이나 감정을 안다는 것에 더 화가 나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정적인 감정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과는 무관한 것 같습니다.
지금 상태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내려놓으려면
좀 더 근본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 같아요.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 길이 옳은 길이라고 믿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믿어야 합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과정에서 가끔은
제가 신비주의라고 생각하는 것들까지 믿게 되기도 하는데
저는 무언가를 믿어야 하는 것이 싫습니다.
2019년에 불교대학 수업을 들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불교는 대부분 수행이지만
10% 정도는 신앙이라고 배운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것이 맞나요?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이 믿음 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제가 지금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사람마다 다 자기 생각이 있고, 그것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이것은 내 것이다.’ 하는 고집이라든지,
‘내가 옳다’ 하는 고집이라든지,
이런 고집을 다시 살펴볼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집중적인 수련을 하더라도
내가 얼마나 고집하고 있는지
다시 살펴보는 데에 하루 이상이 걸립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항상
내 관점, 내 생각, 내 가치관이 옳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비게이션에 어떤 위치를 설정해 놓고 그대로 가지 않으면,
설령 내가 다른 사정이 생겨서 여기저기를 들렀다가 가려고 해도
내비게이션은 계속 ‘돌아가라’,
또 다음 코스에서도 ‘돌아가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자기 생각이 옳다는 것에 딱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을 보거나 어떤 말을 듣고
그것이 내 생각과 맞지 않으면
거기에 대해서 무의식적으로 거부반응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거부반응이 확대되지 않도록 하려면
화나 짜증이 일어날 징조,
즉 약간 호흡이 가쁘거나 몸에 열기가 나거나 할 때
그런 감각을 먼저 알아차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내 까르마가 이렇게 부정적으로 반응하는구나!’ 하고 감지가 되면
약간 웃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아주 미세한 징후를 알아차리는 것을
‘깨어있다.’ 또는 ‘알아차린다.’ 하고 표현합니다.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감정이 바깥으로 드러나기 전에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 의식적으로는 이치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첫째,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생각이든 가치관이든 뭐든지 서로 다르다는 것이
먼저 인지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의식적으로는 이해해도
나의 까르마는 무의식적으로 먼저 반응하게 됩니다.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놓치게 되는 것을
‘무지’라고 합니다.
알아차림을 놓치게 되면
반응은 자동으로 일어납니다.
‘알아차림’이란 나의 반응을 의식적으로 알게 되는 거예요.
알아차리면
‘아, 이것은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반응하는 것이다.’ 하고
자각하게 되기 때문에
반응이 일어나다가 가라앉게 됩니다.
이렇게 꾸준히 연습을 해나가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알기는 해도
꾸준히 자기를 살피는 연습을 하지 않고
그냥 일상적으로 살아갑니다.
물론 경험적으로 어떤 큰 충격을 받아서
변화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상대가 잘못해서 내가 엄청나게 화를 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잘못 안 거예요.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무의식 세계가 자극을 받기 때문에
다음에는 자기도 모르게 조심하게 됩니다.
잠깐의 고집으로 많은 사람이나 가족이 죽게 되었다든지,
본인이 죽을 뻔했다든지,
이런 큰 경험을 하게 되면
급격한 변화가 오기도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알아차리는 수행을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
본인에 대해서 실망했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기대가 크거나 욕심을 많이 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가 한 것보다 결과에 대해서 욕심을 많이 내고 있을 때
실망이 따르게 됩니다.
알아차린 뒤에 어떻게 하느냐는 없습니다.
알아차린 뒤에 어떻게 한다는 것은 참는 겁니다.
물론 참는 것은
감정을 터트리는 것보다는 일시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스트레스가 쌓이게 됩니다.
또 감정을 터트리게 되면
결국 자기 스스로에 대해 다시 실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참는 것은 일시적인 방법이지 수행은 아닙니다.
알아차리지만 감정이 표출되었다는 것은
알아차림이 너무 늦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짜증을 낸 뒤에 알아차렸다면
‘내가 또 알아차림을 놓쳤구나’
이렇게 자각하고 다음에는 알아차리는 쪽으로 가야지
후회하는 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화가 확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화가 계속 올라간다면
그것은 이미 늦게 알아차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한 게 아니라
알아차림이 조금 늦었을 뿐입니다.
조금 더 주의력을 집중하여
아주 미세하게 일어날 때 알아차리게 되면
그냥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걸 보거나 듣거나 하면서
어떤 감정적인 것이 아주 미세하게 일어날 때 알아차리게 되면
대부분 사라집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이미 전환했을 때는
아무리 알아차려도 화가 솟아오르는 힘이 더 강합니다.
이럴 때는 참는 쪽보다는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합니다.
알아차리고, 알아차리고, 또 알아차려야 합니다.
‘감정이 올라오는구나!’ 하고 계속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물론 너무 늦게 알아차려서 감정이 바깥으로 나오려고 하면
임시방편으로 참는 것도 잠시 필요합니다.
나도 모르게 이미 감정이 나와버렸을 때는
감정이 나온 뒤에라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때는 ‘아, 내가 놓쳤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림에는 잘하고 잘못하고 후회할 게 없습니다.
‘놓쳤구나’, ‘알아차림이 늦었구나’, ‘알아차렸구나’ 이렇게만 해야
알아차림을 놓쳐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알아차려도 잘난 체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다만 알아차릴 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참는다든지, 후회한다든지, 자신에게 실망한다든지
이런 것은 다 욕심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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