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린토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중간에서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좁게 펼쳐진 땅이었습니다.
현대의 코린토스시는
고대 유적에서 북동쪽으로 약 5킬로미터에 위치해 있으며
1896년 이후부터 고대 코린토스에 대한
체계적인 고고학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코린트’라고도 불리는 코린토스는
호메로스의 기록에서는 중요한 도시로 부각되지 않았으나
시(City)의 유적에서 미케네 시대 전기의 도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먼 옛날부터 번영해 온 도시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상업과 무역으로 크게 번영을 누릴 수 있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활동으로 인해
그리스의 폴리스가 쇠퇴한 헬레니즘 시대에도
상업시로 번영하여 ‘헬라스의 별’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코린토스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도
신약성서에서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초기 기독교 유명 전도자 성 베드로와 함께
가장 유명한 전도자로 알려진 사도 바울은
기원후 15년. 처음으로 코린토스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6년 후 다시 이 도시를 찾아, 두 편의 서간을 썼는데
이는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로 신약성서에 포함되었습니다.
코린토스를 세운 사람은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시시푸스 혹은 시지푸스 라는 왕이었다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교활하며 못된 지혜가 많기로 유명한데
한 예로 제우스의 분노를 사 저승으로 가게 되었지만
저승에 가서도, 저승의 신 하데스를 속여 장수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추후에는 그 벌로
저승에서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졌습니다.
신화 이야기를 건너, 현실적인 역사 시대에서는
기원전 747년. 코린토스 내에 귀족 혁명이 일어나는데
이들은 바키아다이 (Baccahiadai) 라는 가문으로
코린토스 마지막 왕 시시포스 왕가의 텔레스테스 (Telestes)로부터 권력을 빼앗았습니다.
기원전 747년부터 650년까지 바카이다이 통치 기간동안에
코린토스는 통일 국가가 되었습니다.
대형 공공건물과 기념물들이 건설되었고
케르키라 (Corcyra)와 시라쿠사 (Syracuse)에는 식민지를 세우면서
점점 발전된 그리스 도시로 대두했습니다.
바카이다이 가문이 약 100년간 통치하던 중
기원전 657년. 군대 사령관인 키프셀루스(Cypselus)가
델포이에서 신탁을 받았는데
그는 신탁의 해석을 두고
자신이 코린토스를 통치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코린토스를 지배하고 있던
바카이다이 가문을 추방하고 권력을 차지하게 됩니다.
기원전 9세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 다수의 폴리스들은
100~2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부가 증대되고
교역관계 및 사회구조가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발전하는 도시 국가들은 전통적인 세습적 사제로 군림했던
왕들을 타도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부유했던 도시 국가인 코린토스는
다른 국가들보다 한발 앞서 정통 왕조를 해체했습니다.
코린토스의 마지막 정통 왕이었던 텔레스테스가 암살된 이후
바카이다이 가문이 잠시 코린토스를 지배했는데
이들은 통일 국가를 만들어가는동안
아르고스, 케르키라와의 전쟁에 관여했습니다.
끊임없는 분쟁이 이어지면서
코린토스인들은 통치자들에게 불만이 생겼고
이에 반란군을 통솔했던 키프셀루스는
병사들을 인솔하여 코린토스 국내외 혼란을 수습하게 됩니다.
그는 바카이다이 귀족에게서 권력을 빼앗은 후
약 30년 동안, 독재를 의미하는 참주로 지내며
기원전 628년까지 코린토스를 통치하면서
식민지 지역을 넓혀나갔습니다.
키프셀루스는 그의 아들 페리안드로스 (Periander)가
지배할 새로운 정착지를 찾도록 개척민들을 파견했는데
그 지역들은 현재의 알바니아 지역인 에피담누스 (Epidamnus),
시라쿠사, 암브라시아, 케르키라, 아낙토리엄이었습니다.
또한, 코린토스의 손길은 이집트에도 뻗쳤는데
당시에는 제 26왕조 파라오 삼메티쿠스(Psammetichus) I세가 통치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때 코린토스는 그리스와 파라오의 이집트 사이에
증가하는 교역을 수용하기 위해
나우크라티스 (Naukratis) 식민지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키프셀루스가 통치하던 시기의 코린토스는
주변 적들을 몰아내며, 국가의 부를 증가시키고
코린토스가 강성해지는 기틀을 닦은 덕에
인기가 높아 다른 참주들과는 달리 경호원이 필요 없었다고 합니다.
기원전 627년, 키프셀루스는 30년간의
통치 끝에 자연사로 세상을 떠나며
아들 페리안드로스에게 참주의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페리안드로스는 추후, 그리스 고전기 시대를 대표하는
7현인 중 한 명으로 인정받은 인물입니다.
고대 그리스 지식인 7현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들로는
밀레토스의 탈레스와 아테네의 솔론 등이 있으며
이들은 플라톤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
소피스트라는 명칭을 사용한 모델로 추측되기도 합니다.
키프셀루스의 뒤를 이어, 페리안드로스 통치 기간 동안에는
최초의 코린토스 동전이 만들어졌으며
고대 시대에 유일무이한 규모에서
철로와 선박의 육로 운송을 결합한
디올코스 (Diolkos)가 존재했습니다.
디올코스 (Δίολκος,)는 그리스어의
“건너서”와 “육로수송 기계”가 합성된 단어로
고대 그리스 시대 코린토스 근처 포장도로였으며
이 길을 통해 코린토스 지협을 건너, 배를 육로로 이동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 지름길은 고대 선박들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길고 위험한 일주를 피할 수 있는 역할을 했는데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에 표현한 문구에서는
“코린토스만큼 빠른”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디올코스의 빠른 평판에 대해 널리 알려졌습니다.
고대 문헌에는 디올코스의 건설 시기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페리안드로스 시대의 200년 후에 일어나는
그리스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집필한
투키디데스에게 있어 디올코스는 이미 고대의 유물이었습니다.
유적지에서 발굴된 서신과 연관된 시 (poem)들은
디올코스의 건설 시기가 BC7세기 말, 6세기 초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그 당시 코린토스의 참주가 페리안드로스였던 겁니다.
디올코스는 오랫동안 고대 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스 역사가들은 BC 5세기~1세기에 해군 작전을 가속화하기 위해
이 길에서 전함들을 끌고 간 경우들이 있었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BC 428년에는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위협하기 위해
사로니코스 만까지 디올코스를 거쳐 전함들을 운반하기로 계획했으며
BC 41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는
키오스(Chios)에서 작전을 위해 빠르게 나아가는 함대를 이동시켰습니다.
그리고 BC 220년, 파로스의 데메트리오스 (Demetrius of Pharos)는
지협을 건너 코린토스만까지 병사들이
약 50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함대를 끌고가게 했습니다.
디올코스는 군사 작전과 관련해 자주 언급되지만
현대 학자들은 전함들이 그리 자주 운반될 필요는 없었을 것이며
단지 역사가들이 상업보다 전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디올코스의 주요 목적은 화물의 운송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평화로운 시절 동안에는 그리스에서 기념 건축물이 부상함과 동시에
대리석, 돌기둥, 목재 같은 무거운 물품들을
운반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기원전 7세기 중후반의 코린토스는
30년간의 키프셀루스 참주정 이후
아들인 페리안드로스 참주정 시절에 접어들어
더 긴 독재통치에 놓이게 됩니다.
페리안드로스는 B.C 627년부터 B.C 587년까지
40년 6개월 동안 그리스 역사상 최장기 독재를 하며
코린토스의 질서와 기강을 확립합니다.
권력이 한 곳에 모인만큼 효율적 일처리를 통해
시민들의 세금을 인하하고 화폐 제도를 도입하여
교역과 산업을 장려하며
당시 코린토스는 그리스 최고의 폴리스로 거듭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장기 집권이 길어질수록
권력을 놓아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는지
말년에 가서는 잔혹한 공포정치로 국가 정책의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페리안드로스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사회 영향력이 큰 인사들을 잡아 죽이는 등
폭군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을 의심하는 병은 점점 그 강도가 더해져
첩들의 입소문에 속아 자신의 아내 멜리사 (Melissa) 까지 죽이게 됩니다.
페리안드로스는 첩들의 질투로 인해
자신이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을 후회했지만
그 분노의 탓을 첩들에게로 돌려
이제는 첩들을 모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여 버립니다.
이를 지켜본 페리안드로스의 아들 리코프론 (Lycophron)은 아버지를 외면했고,
외할아버지가 통치하던 에피다우로스로 망명하여
어머니의 원수인 아버지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오늘은 코린토스 역사의 첫 번째 이야기.
고대의 코린토스부터 황금기를 이끌었던 키프셀루스 참주 시대
그리고 두 번째 참주였던 페리안드로스 이야기까지 정리해 보았습니다.
페리안드로스의 아들 리코프론은 어머니에 대한 원수를 갚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이는 다음 세계사 영상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끝까지 시청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평안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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