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그라운드(2017)

세상의 모든 '반달'에게 | 책: 달의 조각

Buddhastudy 2018. 10. 29. 05:46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것

오늘의 일상을 견뎌내야 하는 것

 

피아노 학원에서 울려 퍼지던 음악 소리 나는 가끔 그때의 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다.

학원 근처를 지날 때마다 나는 창문을 통해 피아노를 구경하곤 했다.

 

긴 생머리를 한쪽으로 가지런히 넘긴 채 연주하던 천사 같은 선생님.

나는 그 단아한 모습과 피아노 소리가 좋았다.

 

그 시절 여자아이에게 피아노학원이란

남자아이들의 태권도장 같은 유년시절의 코스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피아노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나는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된 것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건반을 눌렀다.

 

피아노 학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건반은 눈부시게 반짝였고

손톱검사를 받고 먹는 사탕은

언제나 달콤했다.

 

암호처럼 생긴 악보를 보고 건반을 누르면

익숙한 음이 흘러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무엇이든 처음하게 되는 것들을 설렘을 가져다 준다.

검은 건반을 처음 눌렀을 때,

발밑에 있는 페달을 처음 밟았을 때,

내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다.

 

그때 나의 꿈은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다.

학원 선생님과 피아니스트 사이에서.

 

나는 배우는 속도가 느렸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에게 칭찬을 양보해야만 했다.

 

하지만 피아노는 내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해 주었다.

내가 또래보다 빠르게 바이엘을 떼고

빨간 체르니 교재를 받게 될 줄이야!

 

나에게도 남들보다 뛰어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체르니 교재가 들어있는 내 가방을 쳐다보는 친구들의 시선이 느껴질 때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몇 년이 지난 후 학원친구들과 함께 나간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금빛 트로피를 받았고,

며칠 후 학원 간판 아래 현수막에 내 이름 석자가 당당하게 적혀졌다.

평생토록 피아노만 치며 살거라 결심했다.

그때 내게 피아노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즐거움은 점점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연습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다음 콩클에서도 상 받아야지.

실수 하면 안 돼. 더 정확히 연주해야 해.”

 

어느 순간부터 칭찬보다 지적을 더 많이 듣게 되었다.

처음의 즐거움이 의무감으로 완전히 변해버리자

몰래 학원을 빠지고 놀이터로 가는 날이 늘어만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나는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살다보면 종종 그때의 기분을 다시 마주치곤 한다.

너무도 많은 것들이 의무가 되는 순간, 삶은 버거워진다.

꿈도 취미도 그리고 사람과 사랑도.

 

우리의 삶이 자주 버거운 것은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또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것이

오늘의 일상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의무가 되었기 때문에.

 

반갑지 않은 의무를 쉽게 외면하지 못할 때

우리는 어른이 된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피아노 페달에 발이 닿을 만큼 자란 키와 함께

의무를 저버리지 못할 이유 역시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제는 그저 바랄뿐이다.

버거운 의무 속에서도 처음의 즐거움이 가끔씩 얼굴이 비춰주기를.

우리가 트로피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도록.

 

 

세상은 강요합니다.

모두가 보름에 머물러 있기를

더 크고 밝은 빚을 내기를

 

하지만 보름을 향해 차오르고 있거나

이미 보름을 지나 기울어 가는 달

그런 모습의 달에게 더 마음이 갑니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부족함이 없는 것들에게선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불안전한 것들에게 애정을 쏟게 되는 것도

어쩌면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세상 모든 반달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보름달이 되려 너무 애쓰지 말라고.

반달의 우리는 충분히 아름답다고.

 

보름달은 한 달에 단 하루

가장 짧은 시간을 스치고 사라집니다.

결국, 모두가 미완의 세계에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