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둥근 물체를 보면 무조건 발로 찼다.
집에서든 골목에서든 늘 공차기를 하며 놀았다.
공을 차고 놀 때가 제일 재미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수업 시작 종이 올린 뒤
교실에 가장 늦게 들어오는 아이가 나였다.
10분간의 쉬는 시간마다 축구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나가 축구를 했다.
친구들과 축구를 할 때마다 내가 제일 잘했다.
친구들을 쉽게 제쳤고 달리기도 제일 빨랐다.
어쩌면 아버지에게서 재능을 물려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아버지는 프로축구 선수 출신이다.
과거 현대호랑이 지금의 울산 현대와 일화천마 지금의 성남fc에서 뛰셨고
국가대표 2권으로 선발된 적도 있으셨다.
하지만 아킬레스건 부상 때문에 20대의 선수 유니폼을 벗으셨다.
아버지는 두세 가지 일을 하시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셨다.
우린 형편이 넉넉치 못했고
나는 학원은 꿈도 꾸지 못했다.
아버지의 교육 신조도 한몫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내가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은
“나가 놀아” 뿐이었다
아버지는 지금도 자유라는 연료를 태워야 창의력이 빚어진다라고 말씀하신다.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고 관찰하면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재미있어 하는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는 이론이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나가 놀았고
놀아본 것 중에서 축구가 제일 재미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진지하게 축구를 배워보고 싶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응은 차가웠다.
“너 축구가 얼마나 힘든 줄 아니?
게다가 잘하는 건 더 힘들어.”
아버지는 반대하셨지만 결국 내 고집에 못 이기셨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께 축구 훈련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7년간
기본기 훈련만 시키셨다.
그 흔한 슈팅 훈련은 하지 않았다.
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도록 계속 튀기는 리프트 훈련
공을 몰고 다니는 드리블 등
공을 갖고 노는 기본기 훈련에만 집중했다.
게다가 지도 방식이 엄하고 혹독했다.
실수를 하거나 집중하지 않으면 정말 무섭게 혼났다.
아버지는 부상으로 축구를 그만두셨기 때문에
내가 축구를 하다 다치지 않도록 나를 더 강하게 단련시키고 싶어 하셨다.
운동장 인근을 지나던 한 할머니가
아버지와 훈련 중이던 나를 보고
경찰서에 신고하려 했던 일도 있었다.
나를 너무 심하게 혼내는 것을 보고
의붓 아버지가 아이를 혹사시키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명품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나무가 땅속에 뿌리내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만
땅을 뚫고 나오면 하루에 50에서 60cm씩 자란다.”
아버지는 기본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그렇게 중학교 때까지 기본기 훈련을 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 해외 연습 프로그램으로 독일에 가게 되었고
한국의 고등학교는 중퇴 후 독일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그렇게 독일에서 프로선수로 데뷔하게 되었다.
나는 독일에서 FC 쾰른과의 경기에 정식 프로로 데뷔했다.
일대일로 동점인 가운데 나는 역전골을 넣었다.
당시 나의 18살, 정규리그 데뷔전서 데뷔골이라니
이 골은 유럽 1부 리그에서 터진 한국 선수 최연소 골이었다.
한국은 물론 독일 축구 팬들과 언론이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리틀 차봄이란 애칭이 바로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 경기가 끝난 뒤 아버지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아버지는 난데없이 내 노트북을 압수하셨다.
경기가 끝난 뒤 충분한 휴식이 필요한데
자칫 데뷔골에 들떠 새벽 늦게까지 인터넷에 빠져
팬과 언론에 관심에 도취될까봐 노트북은 당분간 내가 맡겠다
혹시나 내가 첫 골의 감정에 너무 휘둘릴까 봐
주위의 평가를 보지 못하게 한 조치였다.
이후 1년 뒤 아버지는 내 sns를 차단하셨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지금은 날 원망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될 것이다.”
아버지는 나의 마음을 잡아 주셨다.
나의 강점 중 하나는 양발을 모두 잘 쓰는 것이다.
오른발 꼴이 더 많기는 하지만
보통의 오른발 자비선수들보다 왼발골 비율이 훨씬 높은 편이다.
유럽의 축구 전문 매체에 올라와 있는 나의 프로필을 봐도
양발잡이 선수로 표시된 곳이 적지 않다.
내가 지금처럼 양발을 잘 쓸 수 있게 된 건
절대 타고난 게 아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한 결과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왼발을 조금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에
양말도 축구화도 왼발부터 신었다.
내가 2010에서 2011년 시즌을 독일에서 마치고
오프 시즌에 한국으로 왔을 때였다.
나는 친구들도 만나고 오랜만에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려 했지만
아버지는 지옥훈련을 준비해 놓고 계셨다.
나는 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매일 천 개의 슈팅을 때려야 했다.
훈련 기간은 5주, 하루도 빠짐없이 오른발로 500개 왼발로 500개를 찼다.
나는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내가 중고등학생 선수도 아니고 유럽 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이 정도로 훈련을 하다니.
하지만 나는 지금의 양발 슈팅 능력과 슈팅 정확도가
고된 훈련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는 엄하신 코치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시다.
항상 하셨던 말씀이 열심히 훈련해야 한다.
프로답게 굴어야 한다이다.
지금도 늘 그렇게 말씀하신다.
힘든 훈련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 엄했던 말들과 힘들었던 훈련
그 모든 것에 항상 감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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