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연기라는 말은
본질이
본질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해요.
본질은
불수자성 수연성 不守自性 隨緣成
의상대사의 법성게에 나오는 구절인데
본질은
불수_ 지키지 않는다.
자성_ 자기의 본질로서의 자기를 지키지 않고
수연_ 인연 따라 나툰다, 이루어진다.
본질은 항상 자기를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서 활동을 한다.
왜냐?
생명이라서.
생명, 살아있는 생명체라서
생명체가 가만히만 있으면 뭐예요?
죽은 거잖아요.
이 생명이
항상 이렇게 활동하고, 작용하고 있어요.
생명작용을 하고 있어.
생명작용이 현상으로 지금 나타나는 거예요.
참 이게 미묘해요, 미묘하다.
생명이라서 이건 작용을 반드시 하게 돼 있는 거예요.
항상 본질은
자기의 본질을 지키지 않고
이 현상으로서 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해요.
왜 중요하냐?
처음 우리의 목표는 본질을 확고하게 하는 거죠.
맞습니까?
왜냐하면 존재 자체도 모르기 때문에.
존재를 확인하고
이쪽으로 계속 에너지를 심어서
내가 본질이라는 사실을 확립시켜야 돼요.
그 확립시키는 과정이
공부 과정에서 쭉 이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확립이 되면
여러분, 확립이 되면 어떤 반전이 일어나느냐면
확립이 되면 반전이 일어나요.
어떤 반전이 일어나는가?
완전히 확립한 사람한테
본질은 내가 싫어도 떠날 수가 없어요.
맞아요?
본질이 완전히 확립된 사람이라면
본질을 안 챙겨도 돼.
따라옵니까?
나는 본질인 참나인데, 본질인데
완전히 확립된 사람한테는
더 이상 안 챙겨도 돼.
그러면 더 이상 관심을 그쪽으로 안 가도 되잖아요.
그러면 에너지가 많이 남잖아요.
그러면 그 에너지를 어디다가 하느냐?
본질은 안 챙겨도 항상 분명하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힘은 어디다 쏟느냐?
현상에 집중하는 거예요.
본질이 완전히 확립된 것을
무심이라고 불러요.
무심은
의식은 있긴 있는데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의식
이 말도 따라옵니까?
무심이란 무엇인가?
의식이 자기가 확립이 되어서
더 이상 생각으로부터 신경 안 써도
자유롭게 되는 그 상태
그게 무심이 돼요.
그럼, 그 상태에서는 무심 자체를 챙길 필요가 없죠?
그럼, 나머지는 뭐냐?
어차피 불수자성 수연성이니까
현상으로 지금 나타나고 있어.
그러면 나타나는 현상에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모든 에너지를 현상에 집중하는 거예요.
반전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해되나요?
처음에는 유심이에요, 우리 공부 과정이.
처음에는 마음이 있어요.
생각이 들끓고, 욕망도 들끓고.
유심이 무심이 돼요.
그럼 무심이 끝이 아니야.
왜냐하면 무심은 안 챙겨도 되니까.
그래서 무심에서는
평상심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거는 현실로 돌아 나온 거야.
무심은 본질 자체
그게 확립되고 나면
거기에 있을 필요가 없어요.
이미 완벽한데 뭘 더 해?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저절로 없어지고
나의 모든 관심은
지금 인연 따라 벌어지는 현실에 최선을 다해.
상황 이해됩니까?
구체적으로 마음공부를 현실에 적용해서
생활문화 만드는 게 대중화의 한 방법인데
대중화에 성공한 것 중의 하나가
일본은 다도를 가지고 대중화 성공했어요.
그래서 그걸 봤더니 어떤 구절이 나오냐 하면
“다도란
어차피 무심이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것이므로
무심을 터득하고 난 뒤에는
차 한잔 마시는 일에 모든 공력을 쏟는 것이다.”
이게 다도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대목에서 한번 탁 열리는 거예요.
뭐냐 하면 무심이 완전히 터득된 사람한테는
더 이상 무심에 집착할 필요가 없죠.
다시 말하면 이런 거예요.
고시 공부하는 고시생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고시원에 들어가.
우리 예전에 보면
산에 있는 절로 많이 갔죠.
지금은 고시원이 많지만, 옛날엔 절로 갔잖아요.
그러니까 보세요.
고시원에 들어간 사람이
열심히 공부해서 고시에 합격이 됐어.
그러면 그 사람이 고시원에 있어야 돼요?
아니면 나와서 활발하게 합격된 사람이 판검사, 변호사 일을 해야 돼요?
일을 해야 되잖아요.
지금 그 말이에요.
한 번 고시패스하기 위해서는
무심이라고 하는 우리의 본질을 한번 딱 발견하고
거기에 집중해서
한 번 딱 하나가 되는 걸 해야 되지만
그것이 된 사람은
불수자성 수연성이에요.
그래서 고시패스 한 사람이
산에만 있는 거는 어불성설이잖아요.
목적이 뭔데?
법을 쓰기 위해서, 펼치기 위해서.
그러면 나와서 열심히 판검사, 변호사 생활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죠?
마찬가지로 우리 공부도
무심이 목표가 아니고 [평상심]이 목표예요.
그러니까 [잘 쓰는 거]예요.
그러면 잘 쓴다는 건 뭐냐 하면
무심을 지키는 게 아니고
여기 일상에서
이 순간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해서 잘하기
이해되세요?
이게 도예요.
그래서 [평상심]이 [도]에요.
무심을 도라고 하지 말라.
무심은 아직 한 겹 막혀 있는 상태다.
마지막 관문을 뚫어내면
아무것도 아닌 일상으로 돌아 나온다.
그러면 일상에서는 일이 펼쳐진다.
인연 따라 일이 펼쳐지는데
거기서 최선을 다하기.
이해되죠?
그래서 여러분 무심을 증득 못한 사람이
인연 따라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최선을 다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유심이니까.
자기 욕심이 앞서니까.
일단은 욕심을 한번 정복 해야 돼.
그다음에는 무심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매 순간순간 일은 펼쳐지잖아요.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공부의 목표는
평상심이고
평상심이 도다, 이 말은
자기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이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공부가 숙달된 사람은
이 공부가 정말 필요한 사람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에요.
그래서 자기 전문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기.
우리 공부의 목표가
무심한 상태로 사는 게 아니고
무심을 한 다음에는 돌아 나와서
최선을 다해서 자기 맡은 일을 잘하는 거예요.
그래서 유심은 ‘산은 산이다’
무심은 ‘산은 산이 아니다’
평상심은 ‘산은 역시 산이다’ 그러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유심은 분별,
분별은 욕심에 끌려다니는 분별, 고통을 낳는 거죠, 분별이고.
무심은 무분별
이해됐나요?
평상심은 후분별이에요.
[후분별]은 뭐냐 하면
정확하게 분별하기.
욕심에 가려서 분별을 놓치는 상태가 아니라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는
정확하게 분별을 하는 거다.
우리 공부의 목표는
무분별의 목표가 아니라
정확하게 분별하는 게 목표예요.
이걸 후분별이라고 해요.
그래서 후분별을 [반야지혜]라고 해요.
반야라는 뜻 아시겠어요?
반야지혜는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현실에서 마음 비우고 보면
이 현실이 잘 보이겠죠.
그러면 정확한 분별이 일어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무분별한 사람이 아니에요.
반야지혜의 사람이에요.
역대 조사들도 마찬가지예요.
오히려 분별을 더 잘하는 거예요.
자기를 내려놓고.
그런 공부가 우리가 지금 하는 공부입니다.
/이것을 제행무상이라고 한다./
이때 행은
이 말 때문에 한 번 쫙 돌았는데
행이란 말은 본질의 행이에요.
오케이?
그래서 본질의 행이
본질이 주체가 되어서 하는 행을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해.
육조단경에 일행삼매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일행삼매
이때 일행은
항상 행의 주체가 본질인 것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하는 것.
그러니까 행을 안 한다는 게 아니에요.
일행을 하자는 거예요.
[일행]의 반대말은 [욕심행]이에요. [유심행]이에요.
상황 이해되죠?
그래서 하여튼 일행삼매 이런 말을 합니다.
/이것을 제행무상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수의 게송은
상대세계를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신수의 게송은 상대세계 안에서 잘하자.
상대세계 안에서 잘하자.
/따라서 상대 세계를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신수 스님이 비록 학식과 또 출신과 위의/
위의는 뭐냐 하면 잘생겼다 이 말이에요.
잘생겼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출신이 좋고, 집안이 좋아서 늠름하게 잘생겼어.
/위의 등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출가자였지만
아직 견성하지 못했기에 선종의 혈맥/
선종의 정맥을 혈맥이라고 불러요.
이건 달마가 이렇게 불렀어요.
혈맥논이라고 하는 달마스님의 법문집이 있거든요.
혈맥이라고 불러요.
/선종의 혈맥을 이어받을 자격은 없는 것이다.
신수의 게송은 다음에 나오는 혜능의 게송과 비교해 보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므로
나중에 혜능의 게송이 나올 때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혜능의 게송은 간단해요.
부지런히 털고 닦지 않는 것을
혜능의 게송은 본질에는 한 물건도 없다.
제행이 무상함으로
모든 현상이 일어나는 것들은 무상함으로
영원한 본질자리에서는 다 그림자고 꿈이다.
그래서 한 물건도 없다, 여기는.
혜능의 게송이에요.
그때는 서로 비교되죠.
하나는 유심이고
하나는 무심이에요.
비교된다고.
근데 여기서 한마디 언급하고 넘어가면
혜능도 신수에 대해서 대꾸를 할 때는, 배틀을 할 때는
무심을 말했지만
한 물건도 없다 했지만
나중에 한 번 더 공부를 해서 깊어지면
그 무심에서 모든 것이 다 일어난다.
수연성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자성이 본래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수연성 한다. 이거예요.
자기를 지키지 않고
무를 지키지 않고 이 삼라만상을 낸다.
여러분
[수연성]이 [자비]에요.
수연성은 [신의 자비]에요.
인간의 자비를 넘어서.
이 말은 뭐냐하면
본질이 이 모든 것을 지금 만들어 내고 있어요.
본질이 본질로서만 있으면
그거는 완전히 막막한 절대 무의 세계인데
그렇게 안 있고
생명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지금 이렇게 막 베풀어 내고 있어.
이게 지금 자비예요.
진짜 자비.
그러니까 이 자비에 우리가 거드는 거지
이걸 무연자비라고도 해.
어떤 나랑 친해서 내가 베푸는 게 아니고
무연_ 연이 없는데도 자비한다.
이 말은
이 모든 것을 본질이 지금 드러내고 있는 이 모습을 말하는 거예요.
금강경,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약견_ 만약에 본다면
제상_ 모든 모양을 근데
비상_ 그 모양에 우리가 속지 않고 본다면
이때 비상할 때 상_ 소위 말하는 관념이에요, 관념.
관념에 속지 않고 볼 수 있다면
즉견여래_ 여래를 보는 것이다.
이 말은 아까 조금 전에 드린 말하고 비슷한 거예요.
뭐냐 하면 보세요.
본질이 자기 자체로서는 완벽하죠.
근데 완벽하니까 자기가 자기를 고집하고 있을 필요가 없죠.
그러니까 이 모든 현상으로
지금 나오고 있어, 나타나고 있어요.
본질이 이 모든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그러면 모든 현상은
본질을 법신불이라고 이름을 그렇게 불러요.
나타난 것은 화신불이에요.
그러면 법신불과 화신불의 관계가 어떤 거냐?
법신불은 절대 자체고
화신불은 현상으로 나타난 모든 것이 화신불이에요.
그래서 법신불은 절대 청정해요.
그래서 이거를 본래 청정한 법신불이라고 불러요.
근데 화신불은 나타난 것이라서 천백억 화신불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수없이 많다’는 거예요.
‘수없이 많다’는 말은 다른 말로는
‘전부 다’라는 뜻이에요.
현상으로 나타난 모든 것은
법신불이 인연 따라 나타난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반전이 있어요.
반전, 반전이 뭐냐 하면
어차피 법신불은 법신불이죠.
우리가 안 챙겨도 법신불이죠.
챙길 필요가 전혀 없죠. 그렇지 않나요?
그럼, 우리한테 관심은
화신불이 관심이 있어, 그렇죠?
그러면 보세요.
이때 상을
지금 우리 식으로 말하면, 금강경식으로 말하면
이름이에요, 이름.
수없이 반복해서 나오는 금강경 대목이 뭐냐 하면
“죽비는 죽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죽비다.” 이거예요.
그러면 모든 화신불에서
“화신불은 화신불이 아니라 그 이름이 화신불이다.”
그러면 그 이름을 떼면 어떻게 되는가?
한 개의 법신불이 인연 따라
수연성, 나타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눈이 나타난 것의 이름에 메이지 않는다면
천백억 화신불이 전부 다, 법신불이 나타난 거예요.
그러니까 약견제상_ 만약에 본다면
모든 화신불을 볼 때 거기서 이름을 떼버리면
여기서 죽비라고 하는 이름을 떼버리면
있는 그대로 본질이 인연 따라 이렇게 탁 나타난 것이라서
이게 여래다 이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예외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모든 현상에 예외가 없죠.
그러면 제 말을 감당해 보세요.
“번뇌는 번뇌가 아니라 이름이 번뇌다.”
그럼 뭐냐?
번뇌즉보리다
소화됩니까?
이 말까지는 소화돼.
다음 말 소화되는 거 봅시다.
“원수는 원수가 아니라 그 이름이 원수다.”
원수가 누구냐?
부처다.
그 원수가 왜 나왔느냐?
나를 성숙하게 만들기 위해서
원수조차도 사랑하게 만들게 하기 위해서 그 모양으로 나타났다.
이런 걸 내가 꿰뚫어 볼 수만 있다면
즉견여래, 모든 게 부처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부처 눈에는 모두가 다 부처로 보인다.
다시 부처 눈에는 부처로 보이고
모양을 분별해서 좋다. 나쁘다 하는 중생 눈에는
모든 게 좋다 나쁘다 하는 중생으로 보인다.
돼지 눈에는 돼지로 보이고
원숭이 눈에는 원숭이로 보인다.
그러니까 이때 부처가 뭐예요? 부처 눈은 뭐예요?
부처 눈은 딱 한마디로 말해서 부처 눈은
의식을 보는 눈이에요.
그러면 보세요.
제가 지금 저의 입장입니다.
저는 제 의식을 좀 자각을 해요.
그러면 제가 의식이 있어.
근데 신기하게도 이 의식을 나만 가지고 있느냐?
내가 내 의식을 몰랐을 때는
저도 분별하고 막 그랬는데
의식이 눈뜨고 보니까
내 의식이 이게 있는데
희한하게 상대방도 의식이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내 의식을 보는 사람이라면
상대방한테서도 의식이 보여요.
이해됐나요?
이거니까.
지금 저를 보시고 계신 그 보는 것이 의식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나의 의식을 알면
상대방도 전부 다 의식을 알게 되는데
다 가지고 있어요.
근데 내 의식과 상대방 의식 사이에
우열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거는 절대라서, 본질이라서, 우열이 없어.
그러면 내가 의식이 이렇게 있는데, 상대방도 의식이 있어.
그러면 그전에는
제 의식을 내가 모를 때는
내 눈이 좋다 나쁘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기준이 있어.
그 기준은 대개 자기예요.
그래서 자기 일을 딱 놓고 기준 잣대가 생겨서
나보다 확실히 낮으면 좀...
나보다 키가 크면 좋구나, 그렇구나.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특히 얼굴이 잘생겼냐? 못생겼냐?
이런 거 요즘 아주 민감하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자를 가지고 착 재버려.
나의 기준 가지고 차자작해서
이건 나보다 조금 낫고, 못하고 해서, 종합을 딱 해서
나보다 좀 좋고 나쁘고가 바로 판명이 즉각 난다? 안 난다?
나보다 좀 좋으면
이 사람하고는 뭔가 얻어먹을 게 좀 있을 것 같고
같이 있어도 내가 안 꿀릴 것 같고
내가 도매금으로 안 팔릴 것 같고
내가 조금 올라갈 것 같고
이래서 자꾸 친하려고 한다.
근데 조금이라도 나보다 못하면
내 값이 떨어지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옆에다가 안 붙인다.
지금 그런 말 이해되나요?
그러니까 보자마자 중생 눈에는
상대방의 좋고 나쁜 것만 보여서
보자마자 판단을 해버린다.
그러다가 의식에 눈을 뜨면
내가 이렇게 의식이 있는데
의식은 무한, 텅 빈 채로 무한대잖아요, 의식은.
그럼 이것을 보니까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상대방도 있네.”
그러면 그것이 잘 보인다 이거예요.
그러면 그전까지는
붙일까 말까 하는 관계
이해되세요?
붙일까 말까
사람들을 보면 붙일까 말까 붙일까 이렇게 사니까
항상 갈등을 다 이렇게 하고
어떤 의미로는 항상 자기를 좀 보호하는 듯한 느낌
왜냐하면 상대방이 좀 거친 사람 만나면
내가 다칠까 봐, 항상 이렇게 경계하는 게 있었어요.
그러니까 좀 닫고 산다. 내 마음을 닫고 산다.
대부분의 중생은 자기 마음을 닫고 살아요.
그리고 자기 잣대 가지고 계속 재.
그래서 조금만 열었다 말았다
이러고 살아.
이렇게 살다가 의식이 한 번 탁 눈 떠버리면
무한대잖아요.
그리고 현상은 상관이 없어지잖아요.
이거 이해되나요?
내가 의식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현상은 별로 안 중요하게 된다.
왜냐하면 상관없으니까
그럼, 상대방의 현상도 별로 안 중요하다.
이 말은 수용한다.
그리고 의식을 보게 된다.
의식은 중요하니까
“아, 저 사람도 부처네” 이래 된 거지
부처 눈에는 다 부처로 보인다.
그러면 이 나를 보호하던 관계가
쓱 열리지 않을까요?
여러분 만약에 부처님 보면
내가 막 도망갈까요? 아니면 가까이 가고 싶을까요?
가까이 가고 싶잖아요.
모든 사람이 가까이 가고 싶은 관계로 변한다.
그래서 정말로 이심전심으로 이렇게 통하는 기분이 그때부터 생겨.
그래서 여러분, 제가 감히 말할 수 있는데
내가 열려서 상대방하고 통할 때의 그 느낌은
인간이 맛볼 수 있는 최상의 행복감이에요.
사람들 만날 때마다
재고 막 이러다가
이게 툭 떨어져 버리고, 눈이 확 열리면서
그 상대방의 가치를
모든 사람이 의식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의식을 보면
상대방의 현상에 대해서는 좀 다 간압한다, 수용하고.
그리고 그 의식과 내 의식이 통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
아연, 자석이 하나 있으면
못들이 무질서로 있다가
자석이 딱 나타나면
자장 속에서 어떤 그 패턴이 딱 생기면서
정돈되는 거 아세요?
그런 느낌이에요.
그래서 이 공간에 도반하고 이렇게 있으면
이 자장이 생겨서, 의식의 장이 생겨서
이심전심으로 통하면서
굉장히 친근한 느낌이에요.
그래서 하여튼
지금 이렇게 법회가 기다려지고
여러분을 만나면 이심전심이
우리가 수업시간 중에 몇 번 이심전심 되잖아요.
그 맛이 정말 좋은 거예요.
지금이 고해에서 극락정토가 펼쳐진다면
이게 극락정토가 아닌가?
그걸 느끼는 거예요.
그러면 많이 변화가 와요.
지금 우리가 살아있죠.
맞아요?
이것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나중에 말하면
유심에서 무심이 되어서
무심은 텅 빈 것 같아, 이 세계가.
그래서 모든 게 꿈과 같아.
근데 평상심에는 그게 아니에요.
평상심에는
모든 것이 부처가 되어서
그대로 눈앞에 여기가 불국토로 변해버리는 거예요.
무심하고 평상심은 달라요.
무심은 그냥 텅 비고, 꿈 같고
근데 그 과정이 꼭 필요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거기서 다시 돌아나온다.
돌아 나오면
이 세계인데 이 세계는 옛날과는 달라요.
산은 역시 산이지만
이제는 이 산 하나하나가 부처의 세계가 펼쳐지는 거예요.
그럼 말 난 김에 이것만 하고
지금 법신 이해됩니까?
의식이에요. 그냥 의식.
여러분 의식이 있어요? 없어요?
텅 비었죠? 무한대죠?
뭐라고 형상이 있다고 할 수가 없죠.
나지도 죽지도 않고.
의식은
개체는 의식의 세포예요.
세포 하나가 죽는다고 줄지 않아요, 의식은.
이해돼요?
모기 한 마리가 탁 죽었다고 해서 의식이 줄지는 않아요.
이해되죠.
현상계의 변화에 의식은 상관이 없어요.
불생불멸에다가 부증불감이에요.
따라서 사실은 내 개체의 죽음 하나가
몸 하나가 죽어도
의식은 부증불감이에요.
이 말도 이해되시나요?
그래서 이 본질이 확인되고 난 뒤에는
본질을 이제는 손을 떼도 되죠.
손을 떼도 된다 이거예요.
그럼 평상심에로 들어오면
따로 에덴이 없고, 따로 극락이 없고
그냥 있는 이대로
이게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똑 떨어지는 구현이에요.
그래서 결론이 뭐냐 하면
법신불 이해되나요?
화신불 이해돼요?
현상으로 나타난 개체들 화신불
법신불은 본질 자체
이것이 서로 간에 연동되어 있죠, 연기로.
그러면 보신이 뭐냐 이거예요. 보신
보신불 報身佛 할 때 보신
법신불은 의식
화신불은 우리 한 명, 한 명
대표로 석가모니불
천백억 화신을 대표해서 석가모니불, 이런 말 쓰잖아요.
보신이 뭐냐면 여러분
보신은 뭐냐 하면
보_ 수행의 과보로 얻는 몸이에요.
그러면 이렇게 법신과 화신의 눈이 떠진다면
수행을 해서
법신을 알아차리고 화신을 알게 된다.
그러면 법신, 보신을 아는 내가 되면
나한테서 일어나는 지금 평상심
지금 나한테서 일어나는 한 생각
그 한 생각이
이 불국토에서 선하게 작용할까요? 악하게 작용할까요?
당연히 선하게 작용하겠죠.
그러면 이렇게 법신 화신을 아는 사람이
여기서 일으키는 한 생각
이때 생각을 안 일으키는 건 아니거든요.
그렇잖아요.
어차피 현상계는 지금 펼쳐지고 있어.
그럼 이런 원리를 알면
법신이 화신불로 지금 나투고 있잖아요, 나타나고 있잖아요.
그러면 이걸 아는 나는
여기에 내 마음을 좋은 쪽으로 쓰겠어요? 아니면 악하게 쓰겠어요?
모르면 악하게 쓰지만
알면 악하게 쓸 수가 없어요.
그러면 여기서 내가 한 생각을
현상에 맞게, 지금 이 상황에 딱 맞게 집중해서
저절로 좋은 쪽으로 마음을 일으킨다.
이게 보신불이에요.
지금 깨어 있는 한 사람이
현상에 맞춰서 일으키는 한 생각
이게 보신불이에요.
이 말은 지금 방금 제가 드린 말씀은
육조 혜능이 한 소리예요.
육조 혜능이.
전념해서 깨달으면 후념이 보신이다.
전념해서 깨달으면 후념
그 깨달으면서 일으키는 한 생각은 그게 보신이다.
과보로 생긴 몸이다.
그러니까 보신을 마음대로 우리가 앞으로 일으킬 거죠.
우리들은 누구냐?
보신의 어머니야.
보신불이 나를 통해서 나오는 거예요.
이때 나는
이런 원리를 터득한 사람
수행의 과보로 우리가 깨어나게 되면
우리의 보살행이 보신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지금 대승불교의 최종 목적이야.
보신을 마음껏 쓰는 것,
어차피 본질은 있어.
여기서 지지고 볶아도
본질은 훼손 안 당하고 까딱없어요.
불생불멸 불구부정_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부증불감_ 늘지도 줄지도 않아.
여기서 한두 명이 현장에서 태어나고 사라졌다고
태어났다고 늘지 않고 죽었다고 주지도 않아요.
그건 아무 이상 없어.
그렇다면 관심을 접어버리고
정말 깨달은 사람이라면
이제 본질은 잊어 먹어요.
그럼 나머지는 뭔가?
한 생각을 일으키든 것
보신이 깨달은 사람들의 최종 보살행의 문제야.
상황 이해되죠?
그러니까 이게 지금 우리 공부가
이렇게 진행이 되는 거예요.
그럼 거기에 맞춰서 우리가 살아간다.
이거 읽고 마치겠습니다.
금강경 사구에 나오는
/무릇 모습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
범소유상 개시허망은 유명한 말은
화가 노진에게 그리게 할 그림을 두고 한 말이지만
그 본뜻은 정확하게
현상밖에 모르는 신수의 게송을 비판하는 내용을 이룬다.
신수가 닦아서 청정하게 보존하려는 몸과 마음은
현상으로서
무릇 모양이 있는 모든 현상은 허망하여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근데 이게 여기서 안 끝나고 이 게송은
모양이 없는 허망한 것이지만
거기에서 이름을 떼고 보면
낱낱이 법신불이 나타난 것이라서
허망한 몸이 바로 법신불이다 하는 또 반전이 일어나
그래서 중도예요.
그래서 항상 중도예요.
그래서 그 발전이
법신을 깨닫고, 화신을 깨닫고
보신을 내가 생산해 내는 주체
요게 인간의 존엄성이에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진정한 뜻은
보신을 생성해 내는.
인간이 성숙해서 태어난 목적이 뭐냐?
보신불을 내가 만들어 내기.
이게 우리들의 존재 목적이다 이거예요.
이것이 우리가 딱 체득되면
그다음부터 나의 삶은
이 세상에 보신불이 출연하게 만드니까
정말 보람 있죠?
아름답지 않나요?
나를 통해서 진리가 구현되죠.
그리고 이 보신이라고 하는 인간의 착함,
인간의 착함, 이게 보신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착함이
인간인 나를 통해서 나온다.
그리고 그 모습 자체가
가장 아름다운
한 인간이 일상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
진선미가 나를 통해서 매 순간순간 일어나는 것
그게 지금 우리 마음공부의 목표예요.
그러면 아연
내 삶이 활기가 있게 되고, 할 일이 생기고
그걸 잘하는 게 인류에게 도움이 될까요? 안 될까요?
당연히 도움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공부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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