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숲이 통째로 필요하다.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
지구는 통째로
제비꽃 화분이다. <노랑제비꿏-반칠환>
안녕하세요? 정목입니다. 반칠환님의 노랑제비꽃이라는 시입니다. 이 작고 여린 노랑제비꽃 한 송이가 피기까지에도 얼마나 수많은 우주의 은혜가 스며있는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숨을 한번 들이쉬었다가 내쉬는 이 순간에도 우주가 통째로 지구가 통째로 산소가 되어주어야 되는 일 아닐까요? 이번 주 토요일은 음력2월 보름입니다. 열반재일이죠? 일생을 길 위에서 진리의 가르침을 펼치시다 열반에 드셨던 부처님께서는 방일하지 말아라. 라는 마지막 말씀을 사바의 모든 생명들에게 통째로 선물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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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작은 꽃들이, 우리는 아무 고통도 어려움도 없이 그냥 그 자체가 원래 그렇게 예쁘게만 피어있는 거로 생각하지만, 사실 작은 꽃들이 땅을 개간한다고 인간들이 포클레인으로 파헤치고 그럴 때 뿌리째로 뽑혀 나오잖아요. 신기한 것은 이 뿌리째 뽑혀 나와서 이게 뿌리만 있으면, 그리고 물기만 있으면 그냥 엎어진 채로도 거기서 또 다시 생명력을 유지하며 자라나는 걸 보면, 아, 정말 놀랍지 않아요? 생명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그 대지에 의지하기만 하면 또 다시 살아나고, 또 다시 살아나고, 오뚝이처럼. 계속 일어나잖아요.
여리디 여린 그 작은 꽃들을 보고 있으면, 그냥 우리의 눈에 보는 바 그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수선화, 향기가 참 좋지요? 우리 은사스님계시는 방에 들어가느라고 문을 탁 여는데, 꽃향기가 확 퍼지는 거예요. 흐음, 이게 무슨 향기지? 그랬더니 수선화에요. 수선화 3송이가 딱 피어있더라고요. 방문을 닫아놓았다가 여는 순간, 그렇게 방에 한가득 수선화 향기가 퍼지더군요. 꽃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아도 향기로서 자신의 소식을 전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요.
자기가 있는 공간, 그 사람이 그 자리에 발 디디고 서있기만 해도, 주변사람들에게 향기 나는 에너지를 줄 수 있다면, 그게 곧 열반낙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지로 쿠시나가르를 선택하시죠. 그 쿠시나가르로 가시기 위해서 파파라는 지역에서 쿠시나가르까지 29킬로를, 정말 대 장정의 길을 걸어가시게 됩니다. 그런데 이미 그 길을 가시기 전에 부처님께서는 상한 음식을 드시고, 토사광란을 만나게 되시잖아요. 아주 병이 깊어졌습니다. 많이 지치고 힘들고 80의 노구를 이끌고 병든 몸으로 쿠시나가르를 향해서 걸어가시죠.
무려 29키로나 되는 길을. 버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요즘은 릭샤왈라들이 있어서 릭샤로 자전거로 움직여 갔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교통수단도 분명히 없지 않았겠습니까? 오직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건 이 두 다리밖에 의지할 교통수단이 없었을 거예요. 아니면 말 이구요. 마차를 타고 가거나 했겠죠? 그러나 부처님은 출가하신 이후로 마차도 타지 않으셨잖아요. 오직 걸어다니셨으니까요. 이렇게 병이 깊이지고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보니까, 부처님께서는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되요. 그래서 가다가 잠시 쉬면서 아난존자에게 지금 우리가 지나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면 거기에 카쿠시타강이 있다.
그 강에 가서 물 좀 한 그릇만 떠가지고 오너라.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아난이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 보니까, 카쿠시타강에는 이미 수백 마리가 넘는 마차 떼가 지나가면서 흙탕물이 된 거에요. 그 흙탕물이 된 것을 다시 떠다드릴 수는 없잖아요. 잠시 기다려서 가라앉고 맑아졌을 때 그 물을 떠다드려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게 됩니다. 길고 긴 여행길에서 부처님은 정말 지칠 때로 치쳤지만, 다시 한모금의 물을 마시고, 좀 몸을 추슬렀죠. 그때에 말라국의 왕자가 지나가다가 부처님께 법문을 듣게 되요. 이 왕자가 가던 길을 멈추고 부처님 법문 몇 마디를 듣고 너무나도 감명을 받게 되요.
그래서 환희심이 일어나서 부처님께 황금색 가사 두벌을 공양을 올립니다. 그 가사 두벌을 공양을 올리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불자로서 탄생이 된 거죠?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났는데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올린 그 가사를 부처님 몸에 걸쳐드려요. 몸에 걸치는 순간 황금색 가사가 아주 황금 노을빛처럼, 그러니까 붉디붉은 그런 멋있는 가사 색으로 싹 바뀌어 버려요. 아난존자가 깜짝 놀라죠. 당황을 하는 거예요. “아니 부처님, 이게 무슨 일일까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붓다가 되는 사람들에게 성도직전, 그리고 열반하기 직전, 두 번의 걸쳐서 이런 신묘한 일이 일어난다.” 몸에 가사를 걸치는 순간 칼라가 바뀌는 거죠. 그 순간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가까웠을 때 일어난 하나의 기적 같은 일이기도 했다는 경전의 기록이 있어요. 이제 기력이 쇠잔한 부처님께서 강에 내려가 다시 목욕을 하시고 그리고는 몸을 추슬러서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지만, 역시 회복이 잘 되지 않아서 무려 쿠시나가라까지 가시는데, 22번이나 쉬면서 가셨다고 그래요. 그 모습을 떠올려보면 몇 걸음 걷고 또 앉아서 쉬고, 몇 걸음 걸어가고 앉아서 쉬면서, 왜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멀고 먼, 쿠시나가르까지 꼭 당신의 열반지를 선택해 가셔야만 했는지, 전도 궁금하지만, 아난존자에게는 너무나도 궁금했죠.
어찌어찌 우여곡절 끝에 쿠시나가르에 도착을 하시잖아요. 그러자 사라쌍수 나무아래, 가사를 펼치고 누워서 몸져누우신 거예요. 그렇게 한번 누우신 뒤에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누운 상태에서도 마지막으로 법을 청하는 사람에게 진리의 말씀을 다 전해주시고 그리고 그곳에 눈감기 전에 제자들에게 당신이 떠난 이후에, 이 승가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 까지 다 조근조근 말씀해 주시거든요. 참으로 자상하고 자비롭기 이를 때 없는 분이십니다. 보통은 사람이 숨절이 가빠오고,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그 고통의 순간에조차 부처님은 어떻게 하면 한 사람에게라도 진리를 전할까? 오직 일념 그것만을 생각하셨던 거 같아요. 그런데 아난존자는 이렇게 초라하고 이렇게 볼품없는 곳에서 부처님이 열반에 드셔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당혹스럽고, 슬프기 이를 때 없어요. 그래서 하염없이 울어요. 그냥. 저 한쪽에 떨어져서. 그냥 눈물을 흘립니다.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이 곳은 내가 전생에 다스렸었던 왕국이었다. 그리고 내가 열반지로 선택했던 곳이다. 이런 얘기를 하시면서 너는 내 곁에서 시봉을 하면서 정말 헌신적이었고, 너는 참으로 온유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너의 그 시봉하는 하루하루의 너의 그 성품에 대해서 진심으로 고맙다. 이런 말을 전하십니다. 스승께서 제자에게 마지막 주시는 고맙다는 인사말씀, 그 말을 받들어야 하는 아난존자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아무리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는 일이 생사거래가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아난존자에게는 정말 미어지는 슬픔이었을 거예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입적하시기 전에 찾아온 많은 제자들에게 그런 얘기를 하시죠. 승단은 어떻게 어떻게 이끌어 가도록 하라.
아마도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가족끼리, 또 형제끼리 우애 있게 살아라 라는 그런 이야기를 전하듯이, 부처님께서도 승가의 사형사제 사이에 화합해서 승가가 화합해서 살아야 한다. 이런 말씀을 해주신 거죠. 그리고는 혹시라도 너희들이 내게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지금 시기를 놓치지 말고 질문을 하거라.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때 그 많은 제자들이 아무 말이 없었어요. 그 아무 말이 없고, 그 모습에 아난존자는 또 한 번 놀라게 되요. 아무도 마음속에 의구심, 의문이 일어난 게 없는 거예요.
의심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 없을 만큼 부처님께서 이미 충분히 법을 설해주셨던 것이죠. 그러자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래 너희들이 내게 더 이상 물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스승을 향한 존경이라면 이제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한마디를 유훈을 남겨주시죠. “비구들아, 모든 것은 소멸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방일하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 하거라.” 이 말씀을 남기십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소멸되어졌다. 정열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언제부터 열반이 사람이 돌아가신 것을 열반했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사실은 이 육체가 죽는 것과 열반은 별개의 것인 거죠?
살아서도 얼마든지 열반은 경험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모든 아상이 떠난 상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다 여읜 상태가 바로 열반 아니겠습니까? 죽음과는 무관한 말인 열반. 그 열반은 바로 적정의 상태로 고요의 상태인 것입니다. 굳이 그렇게 45년이라는 세월을 힘겹게 살지 않으셨어도 되었는데, 부처님께서는 만 중생을 위해 법을 펼치기로, 굳건히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45년을 길 위에서 이 많은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열어서 보여주셨지요. 볼 수 있는 지 없는지는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이제 눈을 뜰 수 있느냐? 없느냐? 그건 모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몫이 아닐까요? 열반재일을 앞두고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는 그런 정진을 해야 하리라. 다시 한 번 다짐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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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부처님의 출가재일에 이어서 이번 주에 부처님 열반재일을 맞이하고 보니까, 제가 출가를 열반재일에 했거든요. 2월 보름날 삭발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다시 태어난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 승가의 스님들의 경우는 부모님으로부터 몸을 받아 태어난 날을 물론 생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몸을 받아서 태어난 생일보다, 더 의미 있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날이 바로 출가한 날입니다. 그 출가를 하는 것이 두 번 태어나는 날이죠.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날인데, 제게 있어서 열반재일은 다시 태어난 날이기도 합니다.
다시 태어나서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았나? 또 거듭 돌아보게 되네요. 나름대로 뭐,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열심히 했다고 하지만, 정말 마음 살림살이를 내놓아라 했을 때,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다면 이거 진짜, 인생 그냥 헛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아, 출가자들과 재가불자들에게 거듭거듭 출가하는 마음, 그리고 거듭거듭 내가 매 순간순간 방일하지 않고 정진하고 있는가? 그걸 참, 많이 매 순간 놓치지 않고 돌아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또 한 번 하게 됩니다.
티베트의 성자의 미라래빠. 그 미라래빠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 수많은 사람들을 게송으로 이끕니다. 한사람, 한사람, 15살 먹은 소녀부터 시작해서 가지각색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 중생이 어리서기 얼마나 이를 때가 없습니까. 말을 한마디 해준다고 알아듣기를 합니까? 깨달은 성자를 보고 덤비지를 않나, 물바가지를 던지지를 안나? 별 형태를 다하죠. 그런데도 그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런 중생 하나하나를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이 삶은 유한한 것이다. 한 순간에 끝날 것이니 온전한 깨달음을 향하여 길을 나서보지 않겠느냐? 이렇게 독려를 하십니다.
미라래빠의 십만송 가운데 오늘 바랑속 책 한권 꺼내서 읽어드릴까 합니다.
천둥과 번개, 구름은
하늘에서 일어나 하늘로 사라지고
무지개와 안개, 저녁노을은
허공에서 나타나 허공으로 사라진다.
꿀과 열매, 곡식은
흙에서 생겨나 흙으로 돌아가고
꽃과 풀, 나뭇잎은
대지에서 자라나
다시 대지로 돌아간다.
물결과 소용돌이, 거센 파도는
바다에서 일어나
마침내 바다로 사라지고
삼라만상의 본질을
바라보는 자는
그것이 다만
마음의 그림자임을 깨닫게 된다. <미라래빠의 십만송 중에서>
...
오늘 미라래빠의 십만송 중에서 링와동굴에서 미라래빠가 마녀를 만나게 되요, 그 마녀에게 법을 베푼 법을 잠깐 소개해 드렸었는데, 정말 그렇죠? 천둥과 번개 구름은 하늘에서 일어나고 하늘로 사라지고, 물결과 소용돌이와 거센 파도는 바다에서 일어나서 마침내 바라로 돌아가듯이 사실 삼라만상의 모든 본질들, 그것은 다만 우리 마음에 그림자임을 깨달아야 한다. 정말 멋진 말 아닌가요? 그래서 그 불교에서는 그런 얘기하잖아요. 죽음 이후에, 죽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들, 우리가 어떤 두렵고 무서운 소리가 우르릉 쾅쾅 들린다든지, 또 아주 그냥 무서운 어떤 형상들이 눈앞에 나타난다든지. 그게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환영이라고 하는 걸 깨달아라.
네 마음 그림자에서 나온 것이다. 네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지, 그게 원래 있는 게 아니란다. 라고 하는 이런 가르침, 이거 엄청난 거 아니에요? 우리가 그런 걸 모를 때 얼마나 두렵고 무서움 속에서 벌벌 떨면서 살았습니까? 그런데 설령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해도, 깨달음을 통해서 온전히 알지 못한다 해도, 이미 그 길을 가신 선각자께서 네가 그 어떤 무서운 형상을 보더라도 그건 네 마음에서 나온 환영이니까, 두려워 할 거 없어. 그 어떤 우레와 같은 소리가 우루릉쾅쾅 들린다 해도, 그거 다 네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니까 두려워하지 마. 겁먹지 마. 라는 이 한마디.
세상에 더 이상 가는 안심되는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그 말씀을 한 번씩 새기면 아이고, 죽음? 진짜 그거 두려운 거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설령 죽음의 순간에 두렵고 무서워할지라도, 우리가 그걸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각인 시켜 놓는 다는 것, 그리고 그런 가르침을 우리가 들을 수 있다는 것, 이 세상에 와서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생략)
대학이라는 거대한 또 하나의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는 그 병아리 같은 마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두렵기도 하고. 그러나 홀로서야 된다는 라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것이 분명하죠? 사실 신입생들에게 대학생활이라는 것, 첫 입학을 한다는 건 우주여행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것이잖아요. 거기다가 책임감까지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어서 정말 큰 여행을 시작하는 곳이죠. 대학 입학 진심으로 축하드리고요, 이제 대학에서 만나는 인연과 또 마주하게 되는 새로운 학문에 열정을 다 쏟고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이민지양 처럼 이렇게 경남합천에서 서울로 유학을 오는 경우, 부모님들은 당연히 걱정이 되시지요. 쟤가 가서 잘할까? 밥은 제대로 챙겨 먹을까? 또 안전할까? 뭐, 이런 걱정이 많으시겠지만, 부탁드립니다. 전국에 부모님들, 서울이나 또 타지방으로 집을 떠나 유학 떠나보낸 자녀들,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모님들의 그 걱정하는 염려가 자녀들에게 실제로 그런 영향이 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자식이지만, 품안의 자식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탯줄을 탁 끊듯이 끊어내야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탯줄을 끊는 것은 어린아이의 탯줄을 끊는 것이지만, 부모의 보호를 받잖아요.
이제는 아이들이 커서 사회 속으로 나아가야 할 때는 두 번째 탯줄을 잘라야 합니다. 아프지만, 그 탯줄을 끊어냄으로서 그 아이를 진실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거든요.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방법은 품안의 자식이 아니라, 품밖에 내어놓아서 세상을, 정말, 등대처럼, 등불처럼 환하게 밝히면서 살 수 있는 그런 자식으로 내놓아주셔야 됩니다. 염려하지 마시고 자식들이 가는 길, 그저 축하하고 박수 쳐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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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참 잘도 흐르네요. 한 순간도 방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진리의 길을, 우리에게 통째로 전해주셨듯이 개으른 마음 내지 말고, 매순간순간 정진해야 겠습니다. 오늘발원문 건너 띄고요 다음 주부터는 꼭 발원문 하도록 할게요. 당신과 내안의 신성한 빛, 거룩한 불성에 경배 드리며 저는 다음시간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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