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정토회)

즉문즉설_법륜스님***제34편 옳고 그름은 본래 없는가? (52_30)

Buddhastudy 2011. 9. 18. 18:16

  방송 보기: 정토TV

그러니까 남편이 뭐라고 뭐라고 하는 거, 즉 요즘 명절날 보통 보면 어떻습니까? 명절날 여자들만 바쁘죠. 시장봐와 가지고 부엌에 앉아서 굽고 뭐하고 뭐하고 하면, 남자는 사위고 이건 뭐 동생이고 뭐고 할 거 없이 시동생이고 와도, 전부 오면 안방에 죽 둘러앉아 뭐한다? 술상차려 놓고 마시고, 안 그러면 뭐한다? 고스톱치고, 뭐 떨어졌다고, 담배사오라. 뭐 술 떨어졌다. 술 올려라. 반찬 올려라. 부엌에서는 일하고. 그래 가만 생각해 보면 끝나고 술 취하니까 다 가서 자고. 여자는 늦게까지 다 치우고, 재떨이까지 씻어 갔다 놔야 되잖아, 그죠?

어이생각하면 명절이 지겹다. 그래서 여자들은 다 제사를 안지낼라 그래. 제사소리만 해도 성질 나. 제사가 뭐요? 제사가. 여자는 뼈빠지게 하고, 남자는 앉아서 처먹고. 그게 제사아니오. 조상 핑계대고 앉아가지고. 아무것도 아니야. 그 이상 뭐요? 뭐 조상이 어떠니 어떠니 뭐 어쩌구 어쩌구 얘기하지. 조상은 저그 다 남자쪽 조상아니오. 그죠? 여자는 뭐 성도 아닌데, 저그 조상도 아닌데, 일은 죽어라하고 하고. 절은 또 저그만 가서 한데이 보면, 웃긴다. 음복도 저그만 하고. 설거지는 누가 한다? 또 우리가 하고. 이런 식이니까 누가 제사를 지내려고 그러겠어.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럴 때 그런 남자들 보면 화가 나죠. 화가. 그런데 여기 수행이라는 건 뭐냐? 이 남자가 잘못돼서 그런 게 아니고. 이렇게 자라왔고 그런 환경에서 살았고, 태어나서 보기를 그런 거 밖에 못 봤고. 지금 몸에 그게 익숙해 있어. 여러분들도 부엌에서 일하는 게 익숙해 있기 때문에 부엌에서 일하는게 편하지. 남자 부엌에 넣어놓고, 안방에 떡 앉아 담배피우고, 고스톱 쳐봐라, 편한가? 이게 업이라는 거야. 그래 안방에 있는게 도리어 불편해. 그런 것처럼 남자도 마음을 내서 마누라 좀 거들어 줄려고 부엌에 가서 이렇게 이렇게 하면 글러치기만 해. 그리고 마음이 뭔가 편하지가 않아. 뭐 어이해야 될지도 잘 모르고. 이게 업이라는 거요. 습이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그 남자가 잘못돼서 그런 게 아니라 습이 그렇게 오래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이오. 그런데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화가 나가지고 같이 못살아. 그러니까 이해한다. 이해하는 것은 ‘아~ 이제까지 할아버지도 그렇게 살아왔고, 아버님도 그렇게 살아왔고, 우리 오빠도 그래 살아와서 저게 무슨 인간이 개인적으로 나빠서가 아니라, 그렇게 살아온 습관으로 인해서 저렇다. 이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습관, 행동하는 습관이 있어서 저렇다. 이걸 이해하게 되면 화가 안나죠. 그러면 그러니까 계속 일해야 되느냐? 이거하곤 별개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이해는 하지만은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 그 판단은 본인의 선택의 자유요. 부처님은 그러니까 그렇게 살으라고 가르친 게 아니라, 이해하라고 가르쳤다. 이해하면 마음에 뭐가 일어나지 않는다? 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해하고 그렇게 사는 것도 한 길이고, 이해는 하지만은 나는 이렇게 안살겠다는 것도 뭐다? 한 길이다. 그것은 자신의 자유요. 이게 불법이요. 이해하시겠습니까? 불교를 잘못이해하면 세상을 다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불교를 잘못 이해하면 뭐든지 순종하고 살아라는 것처럼 이해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화가 나서 행주를 집어던지고, 친정으로 가버리는게 아니라, 그냥 한잔 먹고 저 방에 가서 자버리는 거요. 편안하게. 아시겠어요? 와서 뭘 그러면 ‘너그 제산 너그 지내라.’ 그러고 남자가 화가 나서 고함을 지대면, 것도 이해가 되나? 안되나? 이해가 되지. 이게까지 해오던 일을 갑자기 안하니까 저 사람이 화가 날만도 하다. 그러면 뭐라고 그런다? ‘아이고 여보 화가 날만합니다. 내라도 화가 나겠소. 한잔 하소.’ 이렇게 먹고 자버려. 한 대 때리면 뭐라고? 화가 나니까 때릴 만 하겠다. 여자가 술 먹고 자는데 어떻게 화가 아나겠노? 이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되, 그 행동을 더 이상 안하겠다는 자유가 있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이 소파에 대해서 반대할 자유가 있다 이 말이오. 또한 반대하는 것만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이 말이오. 그러면 이해가 되요. 이게. 그러면 어떻게 문제를 푸는 게 불교인지 이해하시겠어요? 부처님은 계급제도를 반대를 하셨지. 했어요? 안했어요? 했지. 계급제도를 부정하셨어. 옳고 그런 게 없는데 뭘 부정해. 그러나 사람이 똑같은 사람이 차별이 있다고 사람이 믿을 때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지, 인간 존재가 차별이 있을 수가 없는 거다. 그러나 저 사람은 태어나서 이제까지 차별이 있다고 살았으니까 저 사람의 세계, 마음세계 안에서는 차별이 있는 것도 인정을 하기 때문에, 차별하는 인간을 보고 때려 죽여버려라. 저런 놈은, 이렇게는 절대 안했다 이 말이오.

그러나 부처님은 늘 말씀하셨어. 내 법안에서는 나는 그거는 안한다 이거여. 내 법안에서는 안 된다 이거야. 이 말 이해하시겠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부처님은 혁명적인 사람이오. 세상이 어떻게 가든 나는 그건 안하겠다는 거요. 내 법안에서는, 적어도 수행그룹인 이 상가 안에서는 용납을 안하신거요. 그렇다고 부처님이 그걸 때려 부수자고 무기들고 나가서 싸우지도 않으셨어. 이게 불법이오.

그러니까 어떤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 순종하고 살았다. 계급제도를 놔 놓고 살았다. 봐라, 부처님이 계급제도 부정했는데 아직도 인도에 계급이 있지 않느냐? 이렇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떻게 보면 아니 그 사회 계급을 부정해 버렸으니 이건 과연 어떤 혁명가 보다도 더한 혁명적인 삶이다. 이렇게 평가하게도 되는 거요. 그러나 여기서 불교는 수행인데. 그 힘이 수행이라는게 세상을 순종하는게 아니에요. 그렇다고 반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것에 오류를 능히 보시되 그 오류를 일으키는 한계마저도
(끊어짐)

그 동안 우리 불교는 그저 순종하고 수용하는 하는 쪽으로, 지 맘만 닦으면 되지 세상은 관심 없다. 이게 불법이라면 부처님은 뭐하러 계급을 부정하고 남녀평등을 얘기했겠어요. 그런데서 우리는 일상적으로는 어떻다? 옳고 그르고 자신의 판단이 일어납니다. 내가 오늘부터 옳고 그른 판단 안해야지 한다고 안 일어나는게 아니라, 자기 관점에서 일어나요. 그러나 지금 우리가 중요한 것은 그것을 절대화해서 안 된다. 고집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자신의 관점에서 본 것일 뿐이다. 이렇게 내려놔야 되.

동시에 자신의 의견을 내 놓고, 당당하게 밝히고, 자신은 그에 따라 살 수가 있어. 그러니까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무한한 자유가 있어. 그러나 니는 틀렸다고 자꾸 얘기하는 것는 남의 삶에 뭐하는 거다? 간섭하는 거요. 자신의 자유를 쟁취하고 살면서 남의 자유를 우리는 방해한다. 이거야. 그러니까 우리 옛날에 남북을 통일해야 된다. 북한을 수용해야 된다. 이런 얘기 못했어. 그런 얘기하면 반공법에 걸리고, 국가 보안법에 걸리고, 빨갱이라고 누명을 쓰고 그랬어. 엄청난 고통을 겪었어.

그런데 지금은 북한을 돕자든지, 북한에 일정한 장점을 우리가 받아 들이자든지, 남북이 화해와 통일로 가자. 이런 주장을 보편적인 할 수가 있어. 그거 한다고 잡아가는 사람 없어. 그런데 이렇게 하는 좋은시기가 왔는데 우리에게 지금 어떤 문제가 있냐? 북한은 나쁜 놈이고, 저런 놈하고 용서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린 어떠냐? 저놈은 나쁜놈이고, 저 놈은 반통일 세력이고, 저런 놈 잡아넣어라. 이렇게 말해도 안 된다. 아시겠어요? 그 사람도 뭐다? 그렇게 말하고 생각할 자유가 있다.

그래서 제가 옛날에 그 뭐요. 국회의원 나온 사람 들 낙선운동 한 거 있죠. 시민단체에서, 그죠? 그 스님이 안한데 그런 이유가 있다. 옛날에 우리 같은 사람, 국회의원 나왔으면 박정희 시대나 전두환 시대에 해당이 되나? 안되나? 안되지. 너 옛날에 뭐한 놈, 해서 다 안된다고 그랬어. 그러면 우리 얼마나 억울했어요. 그런 것처럼 지금 그 사람들도 옛날에 너, 처벌도 없고 니 옛날에 부정부패 공모했으니 국회의원 하지 마라. 이렇게 할 권한은 없다고 난 생각해. 그거를 알릴 수는 있어. 아시겠어요?

이 사람은 이러이런 경력이 있다. 그 선택을 누가 해야 된다? 국민이 해야 된다. 그 사람 국회에 나오면 안 된다고 말 할 수가 없다 이거야. 이런 사람이다. 이 사람. 그러니까 찍지 마라. 이렇게 말할 수는 있어. 그런데 찍지 마라고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좀 명령이야. 그러니까 이게 조금 도가 넘어간다 이 말이야. 그런데 역사적인 어떤 과정에서 보면 그럴 필요는 해요. 그럴 필요. 그런 운동이 한때 필요는 해.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은 잘못하면 오류가 될 수 있어.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리하게 해야 되. 늘 자기를 경계해야 되. 자기가 억울하게 당했다고 보면 나중에 자기만이 반대가 거꾸로 되고 옳고, 남은 그르게 될 수 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통일 하지 말자는 그 말하는 사람도 그럴 생각의 자유와 행동의 자유가 있어. 통일 하자고 생각하거나 통일 하자는 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고, 북한을 돕자 하는 주장을 우리가 하는 것만큼 북한도와주면 안된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우리는 뭐해야 된다? 나쁜 놈이라고 하면 안된다. 아시겠어요?

길거리에서 하다보면 욕을 하는 사람 있죠? 그죠? 그럴 때 저 놈의 시끼 반통일 세력이다. 저놈의 시끼 아직도 구태의연한 생각을 갖고 있는 놈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그 사람의 나이나,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이나,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럴 수도 있는 거요. 우리가 그러기를 얼마나 바랬어. 우리가 세상 사람이 다 북한을 굶어 죽든지 말든지 버려두자 할 때, 그래 도 도와 줘야 되지 않냐고 말하고 싶을 때 말할 자유를 우리가 갖기를 우리가 얼마나 원했어. 그렇게 행동하고 싶을 때 행동하기를 얼마나 원했어. 그런데 지금 그렇게 됐잖아. 우리의 자유가 억압받을 때 얼마나 답답했어. 그런 것처럼 그 사람도 내 견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 놓을 자유가 있고, 나에 대해서 반대할 자유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터무니없는 어떤 거짓말로 얘기한다면 그건 시정이 돼야 되겠지. 옛날 어떤 잡지에서 우리 jts가 ??에 어린이 영향식을 지원하고 하는데, 가 보니까 안한다더라. 거짓말이더라. 이렇게 해가지고 몇 페이지 글을 잡지에 실었어. 이럴 때 어떻게 보면 그 사람 그렇게 말할 자유가 있지.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니오. 그 자유를 문제 삼는게 아니라, 비판의 자유를 문제 삼는게 아니라 사실이 아니오. 사실이. 그래서 우리가 확인을 한 거요. 그게 그냥 단순한 개인적인 일이면 듣고 말면 되는데, 그게 북한을 돕는 모금 운동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래서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를 하고, 검찰에 고발을 해서, 사실 확인을 시킨 거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나중에 자기가 북한에 가서 확인해 보니 자기가 틀렸거든. 편집자가. 글 쓴 사람은 도망가고 없고. 교포가 썼으니까. 그러면 우리에게 막대한 손실이 왔어. 아무튼 그게 나중에 페이지는 5페이지 인가 6페이지로 그런 글을 썼지만 정정은 3줄쯤 들어가잖아. 그죠? ‘지난번 아무게 페이지 나온건 오류였음.‘ 이러고 끝난단 말이오. 그러면 그걸 보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나? 아~ 거 내 돈 줬더니 새끼 엉뚱데 썼구나. 이러고 끝나버린단 말이오. 그래도 그건 어쩔 수가 없어.

뭐 건설공사 밑으로 가다가 위에 있는 돌멩이가 떨어져 대가리가 깨져도 어쩔 수가 없는 거요. 법에 따라서 보상을 받는 것 이상으로 어떻하나 그거를. 그렇다고 올라가서 떨어뜨린 놈 대가리를 깰 수는 없잖아. 그 인연이란 말이오. 그 법으로 보장된. 그러니까 맞아서 어쩔 수 없다가 아니라, 그게 법으로 보장된 범위 안에서 보상을 받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개인적으로 보복을 할 수가 없는 것처럼, 거 어쩔 수 없는 거요. 그러다 김용옥이가 우리 수자타아카데미 왔다가 김치달라는데, 밥좀 달라는데 밥 안줬다고 책에다가 욕을 억수로 써 놨어.

그래서 보살님한테 물어보면 학교가 뭐 밥해주는 단체도 아니고, 거기가 뭐 한국 사찰도 아니고, 인도 어린애들 돕는 단체고, 그런데 밥시간도 훨씬 지났는데, 딱 규칙이 12시에서 1시까지 밥먹기로 하고 다 치우고, 4시쯤 와가지고 어떤 사람이 와서 인사하고 뭐하는데 본 사람 같아. 그래 생각해서 안내해 줬는데 갑자기 밥을 내 놔라 그런 거요. 김치하고. 그래서 시간이 안돼서 안된다고 그랬다는 거요. 그랬더니 기분이 나빠서 휘갈겨 쓰는 거요. 아시겠어요?

그 어떻게 보면 명예회손이라고 할 수도 있지. 그런데 그 어쩔 수 없잖아. 누가 그래서 그걸 가만 놔두냐 그래. 가만 놔두지 어떻게, 천하 김용옥이를 누가 건드려. 건드렸다가 욕 얻어 먹을라고. 그게 언론의 자유요. 자기 관점에서 글을 쓸 자유가 있는 거요. 그걸 어떻게. 자기 나름대로 평가할 자유가 있고. 그러니까 김용옥이 아니오. 예수도 부처도 지맘대로 말할 자유가 있는 사람 아니오. 안그러면 누가 그러겠어.

그러니까 그것이 현실하고 안맞다 이 말이오. 학교에서, 우리 학교에 살아보면 작년에도 총 맞아 죽었잖아, 그죠.? 우리도 담장 없이 조용히 살라고 처음에 했어. 그런데 소가 자꾸 들어 와가지고 학교에 도저히 안돼서 조그마한 울타리를 쳤어. 그 다음에 강도가 들어왔어. 그래서 담장을 조금 높였어. 그 다음에 떼강도가 들어와서 물건 다 가져 갔어. 그래서 또 울타리를 또 친 거요. 그러니까 와서 보고 왜 한국에서 여기까지 와서, 인도학교는 담장도 안쳤는데 왜 우리 학교는 담장쳤냐? 인도학교는 아무것도 없어 담장 안쳐도 되는데, 우리는 애들을 위한 컴퓨터니 교육 기자재를 갖다 놓으니까 담장을 안 칠 수가 없는 거요.

그러니까 그렇게 말한 그날 저녁에 총 맞아 죽었단 말이오. 사람이. 그러니까 그랬으면 그런 글을 안 써야 되잖아. 그렇게 또 글을 써 재끼는 거요. 인도학교는 담장도 안치고 참 자연스럽게 했는데 한국사람은 여기까지 와서 담장을 쳐서 감옥처럼 올려놓고. 그래도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요. 그 사람이 나쁜게 아니오. 그 사람이 봤을 때 그는 거기서 살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여행 중에 봤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볼 자유가 있는 거요.

그런데 내 관점을 고집하면 어때요? 이 자식 지 눈깔이로 보고 이게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은 그건 자기 관점에서 보는 거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 사람이 말한다고 다 옳다고 생각하면 안되지만, 또 그 사람은 그런 말이 틀렸다 이리 말할 수도 없는 거다. 그런데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을 두고 아까처럼 그렇게 말했을 땐 시정을 해야 되지만, 이거는 객관적인 사실은 담장을 쳤다는 것은 사실이오? 아니오? 사실이오. 김치를 달라는데 안준것도 사실이오? 아니오? 사실이오. 그러니까 그건 사실을 왜곡한건 아니란 말이오. 줬는데 안줬다. 이렇게 썼으면 사실을 왜곡한 건데.

그걸 두고 자기 느낌을, 자기의 견해를 표현했기 때문에 그것은 그렇게 할 자유가 있는거요. 제 말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어요? 그걸 가지고 시비할 수 없어. 그런 걸 갖고 다 시비해 버리면 우리가 말하는 언론의 자유가 없어지고 사상과 이념의 자유가 없어지는 거요.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불교 나쁘다. 이렇게 말하는 거는 기분은 들으면 안좋지만은, 그것 갖고 시비할 일은 아니오. 그런데 불상을 깨트린다든지, 불상에다 페인트를 칠한다든지, 이거는 뭐다? 시정이 돼야 될 일이오. 그거는. 그거는 완벽하게 현행법정으로도 남의 재산이나 남의 신념에 해를 끼쳤기 때문에 이건 그냥 놔두면 안 돼. 그것도 자유니까 놔두자. 그거 아니란 말이오. 아주 강력하게 시정이 돼야 될 일이다.

이게 참 어려운 일인데, 옳고 그른 것이 없지만은, 여러분들이 또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며 행동해야 되나 하는 거를 여러 예를 들어서 설명은 했는데 조금은 이해가 되요? 될 거 같애요? 이것 되면 끝났어. 불교. 이거를, 이것을 불교 교리로 말하면 제상이비상이다. 제상이 비상인줄 알면 즉견여래다. 이 말이 있죠? 그런데 제상이 공한 줄만 알면 끝났다고 하지만은 이거 갖고는 소승의 수준을 못넘어서. 즉 이것은 옳고 그름이 없다 수준이야 아시겠어요? 비상이기 때문에, 상이 상이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또한 상이 있는 게 뭐다? 여기까지 가야 보살의 경지다 라고 말할 수 있어.

이것을 금강경 표현을 빌면 뭐다? 인욕바라밀이 인욕바라밀이 아닐세. 이 말이 제법이 공하다는 얘기요. 아시겠어요? 그다음에 다시 뭐라고 한다? 그 이름이 뭐다? 인욕바라밀이다. 이것이 바로 공중에 다시 상이 일어난 도리를 말한다. 옳고 그름이 없는 가운데 옳고 그름이 일어나는 도리다. 이것을 우리가 법성게 표현을 빈다면 법성게 첫 구절이 뭐죠? 법성원융무이상이다. 법성은 법의 성품은 둥글고 두루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다. 옳으니 그르니 할 게 없다 이 말이오. 그 다음에 뒤에 넘어가면 뭐요?

불수자성, 스스로의 성품이 없다. 이 말이 뭐요? 공하다 이 말이오. 그 다음에 뭐요? 수연성,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다. 다시 옳고 그른 게 일어난다 이거요. 이 동네 가면 동산이 되고, 저 동네 가면 서산이 된다. 이런 얘기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화엄경의 도리를 말한다면 이와 사가 둘이 아닌 도리. 이사무애 법계의 도리다, 이 말이오. 반야심경대로 말하면 색즉시공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시 뭐다? 공즉시색이다. 이런 얘기요. 이게 보살도요. 색즉시공만 하면 이게 소승도리가 되는 거요. 이 시비가 끊어져가지고, 그냥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가만 앉아 있는 거요. 본래 옳고 그른게 없으니까.

그러나 보살은 다시 거기에서 옳고 그른 도리가 일어나서 중생을 교화하는 거요.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고, 병든 사람 구하고, 이렇게 길거리 가서 뭐하고? 여중생 추모도 하고, 또 뭐도 하고 소파개정운동도 하고, 인연을 따라서 다시 몸을 나툰다. 이게 보살도요. 그러나 그 마음속에 분노가 없기 때문에 이것이 수행자와 수행자 아닌 사람의 큰 차이다.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해. 이렇게 까지 얘기해줬는데도 모르면 그건 뭐 천하 어디를 가도 알아듣기 어렵고, 또 오늘 알아들었다 그러면 이것 참 굉장한 사람이야.

불교 10-년 20년 공부해도 이렇게 까지 아는 사람이 드물어. 이게 애매모호한 거요. 이게 사실 애매모호한 게 아니라, 아주 확연한 도리인데 이걸 생각으로 하면, 이게 이거 같기도 하고 저거 같기도 하고, 알거 같기도 하고, 모를 거 같기도 하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아주 애매모호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거요. 사량 분별로 이걸 살피면 애매모호하고, 흐린, 안개 낀, 눈에 ??껍데기 바른 것처럼 되고, 이것이 딱 체득이 되면 어떠냐? 확연해서 헷갈릴 염려가 (끊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