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 영토 확장
9세기 북유럽에는
약탈을 하거나 무역로를 개발하는데
뛰어난 바이킹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강을 타고 내려와 흑해에 도달하여
당시 무역의 거점이었던 콘스탄티노플에서
모피나 노예를 판매했죠.
그들의 무역과 거주지는 발전하여 요새화되어
노브고르드 공국이 되었고
882년 키예프 지역을 정복하며
키예프 루스를 건설하게 되죠.
여기서 루스가 러시아에 들어가는 그 루스입니다.
이후 여러 과정을 통해 영토가 확장되다
몽골의 침입 이후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되며
러시아는 여러 공국으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그중 두각을 나타낸 게
모스크바 공국이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모피 판매를 주요 산업으로 하였기에
모피 무역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고
러시아 땅의 통합을 이루고자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죠.
1480년 슬라브계, 루스계 민족들의 땅을 통합하여
러시아는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다시 힘을 찾아가지만
반면 몽골은 점점 쇠퇴하고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여러 칸국들로 분리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스크바 공국은 1547년 ‘루스 차르국’으로 이름을 바꾸며
러시아 제국이 되었습니다.
더 강해진 러시아는
안정적 발전을 위해 농업이 필요했고
1552년 남쪽의 몽골 타타르 왕국을 정복하여
비옥한 농지까지 얻게 되었죠.
이때 러시아 땅은 볼가강에서 흑해와 카스피에로
카마강에서 우랄산맥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아무리 권력이 군주에게 강하게 집중되어 있더라도
땅이 너무 넓어 버리면
비용도 많이 들고, 관리도 어렵죠.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신라말 지방에 대한 중앙의 영향력이 약해져
지방 호족들이 세력을 키워 고려가 건국되고
새로 건국된 고려도 지방을 더 잘 통제하기 위해
지방 호족들의 자식들을 인질로 삼아
수도에 있게 하는 기인제도 같은 방법을 쓰기도 했잖아요.
--정치 경찰
하물며 훨씬 큰 땅을 가진 러시아도
같은 고민이 있었겠죠.
이에 1565년 러시아의 이반 대제는 오프리치니키를 만듭니다.
이는 러시아 최초의 정치 경찰이라 보시면 될 것 같은데요.
그들은 차르
즉 이반 데즈에게 저항하는 사람이나 집단을 탄압하기 위한 존재로
이반 데즈에게 충성스럽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누구나 처형할 수 있었어.
이들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체제나 도시도 타겟으로 삼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자체적으로 공화제를 유지하던 노보고르드로
1570년 오프르치니키를 이끌고 노보고르드로가
최대 만 2천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죽였고
귀족만 무려 1,500여 명을 학살했습니다.
이 악명 높은 오프리치니키는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었지만
누구도 반역을 꾀할 수 없을 정도로
차르의 독재 권력을 확보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어.
이후 러시아는 모피를 얻고, 새로운 영토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용병과 호전적 탐험가들을 지원하여
동쪽으로 진출합니다.
1700년까지 동쪽으로 영토를 엄청나게 확장해 가지만
그만큼 전선도 넓어졌죠.
특히 동쪽과 남쪽에는 민족적 종교적으로 매우 다른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충성심이 상대적으로 낮았습니다.
이들을 제국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대량 학살, 추방, 문화 및 종교의 러시아화를 위한 시도들을 하죠.
하지만 그 드넓은 땅의 토착민들을
완전히 동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죠.
그렇기에 새로운 영토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위협을 줄이기 위해
이번에도 과거의 선택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는 정치 경찰을 더욱 강화하고
그들에게 더 많은 힘을 부여했습니다.
이런 역할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19세기에 러시아 비밀 경차 ‘오크라나’로 이어지고,
소련의 보안기관 KGB
소련 해체 이후에는 FIS, FSB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러시아 정부 부서는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제국 혹은 국가의 이름으로 용납되었죠.
이렇게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자치나 국민의 권리보다는
억압과 통제를 선택해 왔습니다.
--민주주의 시도
하지만 민주주의의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데요.
1985년~ 1991년까지
소련 최고 권력자로 재임하며 냉전을 완화한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 체제로 변환시키고자
민주주의적 요소를 강화했습니다.
당시 수십 년 동안 유지되어 온 계획 경제와
과도한 국방비 지출에 따른 경제 침체를 탈피하고자
시장경제 도입까지 추진하고
1990년에는 공산당 일당 독재를 폐지하고
다당제와 의회제도, 언론 자유 보장 등
정치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초반에는 개혁 정책이 먹히나 싶었고
여러 분야에서 반쯤 성공했지만
안타깝게도 경제와 관련하여서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공산당에 의해 결정되는 물품의 가격이
갑자기 자율경제체제에 맡겨지다 보니
엄청난 혼란이 발생하게 된 것이죠.
결국 1991년 소련의 경제성장은
마이너스 11%였고, 외채는 4배가 되었습니다.
당시 자유 지수는
지금과 비교해 상당히 높았습니다.
하지만 자유든 민주주의든
아무리 정의롭고 멋진 철학이라도
먹고 살기 힘들면 다 소용이 없는 게 현실이잖아요.
결국 1991년 8월 쿠데타로
고르바초프에 이어 옐친이 지도자가 되고
소련은 15개 공화국으로 해체되었습니다.
이 순간 민주주의와 폭력의 중요한 선택의 기로가 있었는데
이번에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크렘린궁은 후자를 택했습니다.
1991년 체첸이 독립 선언을 했는데요.
옐친은 당시 체첸 지도자인 조하르 두다예프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무리하게 군을 투입하는 결정을 합니다.
또 1993년 옐친이
기존 소련 체제의 전직 의원으로 대부분 구성되어 있던
인민대표회의와 최고회의를 폐지하려 하자
러시아 공산당 등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옐친을 탄핵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옐친은
T-80 전차를 데려와 국회의사당을 포격해 버립니다.
당시 러시아 정부 통계의 사망자는 187명이지만
최고회의 추산으로는 약 2천 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죠.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폭력적인 수단을 택했지만
경제나 사회적 부분에 있어서는
고르바초프가 시행했던 자유민주주의 정책을
상당 부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경제는 계속해서 악화되어 갔죠.
--푸틴 이후
이후 옐친은
자신이 직접 선택한 후계자인 푸틴에게 정권을 물려줍니다.
푸틴은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양당제, 다수의 정당, 대법원 등
여러 기본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집권당인 통합러시아당이
소련 시대에 공산당 역할을 하며
사실상 1당 체제로 운영되고 있죠.
또한 푸틴 시기에 유가나 천연가스의 가격이 급상승하는 등
환경적 이점을 기반으로 경제가 안정되어 갔으며
이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강화해 나간 고르바초프와 옐친 시기에
경제적으로 몰락했던 경험과 대조되며
민주주의를 표방한 푸틴의 강력한 제국주의에 대해
국민들이 지지를 보내왔습니다.
또한 지리적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아우르고 있으며
지금도 22개 공화국, 9개 크라이스(영토), 4개의 자치구, 1개의 자치주 등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약 200개의 소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정부 입장에서는 이 광활한 영토를 유지하려면
압도적 통제 능력이 필요한데
간단한 방법이 전제주의, 제국주의의 형태인 것이며
역사적으로 폭력과 억압이 동시에 가져오는 안정감을
국민들도 경험하였기에
체제를 수용하는 것이죠.
또한 경험적으로도 자유와 민주주의는
체첸의 분리와 같이
또 다른 불안과 붕괴의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겠죠.
러시아의 전제주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러시아의 지리적 특성과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러시아에 만들어진 공유된 믿음의 결과로
오프리치니키부터 이어져
러시아의 핵심적 역할을 해왔던 정보기관인 KGB 출신의 푸틴이
장기 독재가 이어지고 있는 이 상황에서
당분간 실제적인 민주주의의 실현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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