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가 비교적 유럽 열강의 식민지화에서 자유로웠다고
지난 영상에서 말씀드렸지만
유럽의 침공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한 발 늦게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뛰어든 이탈리아가
아프리카를 노릴 당시
이미 대부분의 아프리카 땅은 식민지화가 되어 있었기에
그나마 독립국가로 남아 있던
이 아프리카의 뿔 지역을 노리게 됩니다.
당시 에티오피아의 국왕은 메넬리크 2세로
에티오피아 주장에 따르면
성서의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인물이었죠.
에티오피아는
뿌리 깊은 기독교 국가였기에
비교적 유럽과의 관계가 좋은 편이라 볼 수 있었습니다.
국가 시설의 현대화를 돕고
메넬리크 2세의 참모 역할을 한
스위스 태생의 알프레드 일그는
유럽 땅의 메넬리크를 ‘아프리카의 기독교 군주’라 언급하였고
실제로 에티오피아 궁정의 명성을 높이는 기사를 쓰기도 하였죠.
그 결과 메넬리크 2세의 이름은 유럽에서 어느 정도 알려졌고,
이후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축음기 메시지를 교환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메넬리크 국왕은
이탈리아의 식민지에 대한 야망을 견제하기 위해
특히 1890년대 초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에서
현대식 무기와 탄약을 획득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근대 이후 전쟁을 치르는 이탈리아로부터
어떻게 무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우찰레 조약 때문인데요.
1889년 5월, 이탈리아가 에리트레아를 점령한 후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는 이 조약을 맺게 되죠.
조약의 주요 내용만 보면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보장하고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해주며
그 대가로 에티오피아는 일부 영토를 이탈리아에 양보하는 것이었죠.
이때 이탈리아의 군사적 지원은
무기와 탄약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근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조약 체결 당시
이탈리아어와 에티오피아의 암하러
두 가지 버전의 조약문이 사용된 것인데요.
이때 이탈리아어 조약문에만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의 보호령에 들어간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죠.
이후 이것을 알고
1894년 메넬리크 2세에 의해 조약은 폐기되었고
이를 구실로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해 오게 되죠.
아무튼 그동안 메넬리크 2세는
에티오피아의 현대화를 이루고
차근차근 현대식 무기를 확보해 갔으며
외부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에티오피아 내 지방 세력들을 통합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전쟁 시에는
약 73만 명에서 120만 명 정도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병력이 총기를 보유하고 있었죠.
또 이미 전달드린 바와 같이
높은 산악지대가 펼쳐진 에티오피아였기에
실제 전쟁에서 에티오피아의 게릴라 전술에 이탈리아는 고전하게 됩니다.
결국 이탈리아는 6천 명 이상의 인명 피해를 입는 큰 패배를 당하며
1896년 물러나게 되죠.
이후 1935년 10월
다시 한번 무솔리니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
이번엔 전투에서 승리하여
1936년 5월,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게 됩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죠.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에서 세력을 확장해 나갔지만
에티오피아 게릴라군은 계속 저항하였고
수도 함락 이후 몇 년이 지난 1939년 말 기준으로 보았을 때도
여전히 에티오피아 고지의 4분의 1을
에티오피아 게릴라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죠.
에티오피아의 셀라시의 황제는
전쟁에 패배한 후 런던으로 피신하였지만
이후 1941년 영국군과 함께 에티오피아에 돌아와
에티오피아 저항군과 힘을 합쳐 이탈리아 군을 무찔렀으며
돌아온 셀라시에는 다시 에티오피아 황제로 복권됩니다.
이탈리아에 잠시 점령은 당했지만
완전히 정복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게릴라 활동을 하였고
다른 유럽 세력의 도움을 받기는 하였지만
결국 식민화를 이겨낸 에티오피아였죠.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기를 보시면
하나같이 녹색, 노란색, 빨간색이 많을 텐데요.
그 이유는 국기들이 대부분
에티오피아의 옛 국기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이죠.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해 나가는 아프리카 국가들은
식민지를 이겨낸 에티오피아를 모델로 세우고
국기도 에티오피아와 동일한 색으로 대부분 만들었습니다.
아무튼 식민시대와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이렇게 식민 통치를 이겨낸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저항의 상징이 되었으며
셀라시의 황제는 아프리카 대륙의 리더가 될 수 있었죠.
1963년 5월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30개의 아프리카 독립국 정상들이 모여
아프리카 통일 기구를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 아프리카 통일 기구는
2002년 7월 9일에 아프리카 연합으로 발전되었고
AU 본부는 지금도 아디스아바바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엔 아프리카 경제위원회’ 같은
주요 국제기구의 본부도 위치하고 있어
아프리카의 정치적, 외교적 수도라 불리게 되죠.
자 이번에는 한국전쟁에 대해 얘기해 볼게요.
6.25 전쟁에 유엔군으로 참전한 국가들의 목록인데요.
놀랍게도 에티오피아 제국이 있습니다.
UN을 뜻하는 United Nations라는 말 자체가
미국의 루즈벨트와 영국의 처칠이
1943년 발표한 연합국 선언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이 선언을 계승하며
1945년 UN이 창설된 것이죠.
2차 세계대전 간 연합군 측
특히 영국에게 도움을 받았던 에티오피아는
UN 창설 연도에
곧바로 유엔 가입을 신청하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고
유엔은 회원국의 군사적 지지를 호소하였는데
이탈리아 침공부터 모든 과정을 겪은 에티오피아의 살리시의 황제는
안보 위기에 집단으로 대응하는
유엔의 집단 안보 체제에 적극적인 지지자로서
6,000명 이상의 에티오피아군을 한국전쟁에 파견하게 됩니다.
한국도 식민지를 겪었기에
식민 저항의 상징인 국가로서 일부 공감대도 있었겠죠.
또 잠시 후 말씀드릴 에리트레아 합병을 위해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것도
파병에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파병을 통해 한국에 온 에티오피아 각뉴부대는
한국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하게 됩니다.
아무튼 지대에서 파생되어
문화, 역사, 전쟁 등의 경험을 통해
왜 에티오피아에 아프리카 본부가 있는지
또 한국 전쟁에 참여하였는지까지 알아보았는데요.
이제 다시 물 얘기를 해볼게요.
지난 영상에서는 에티오피아가 가진 물의 힘
여러 강들의 발원지를 가진 잠재적 수력 패권국가로서의 모습을 보았다면
이번에는 물로 인한 약점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게요.
에티오피아의 약점으로 작용하는 물은
바로 바다입니다.
지도로 보셨다시피
에티오피아는 사방이 다른 국가들로 막혀
바다로 바로 나갈 수 없는 내륙 국가입니다.
하지만 과거엔 가능했습니다.
에리트레아가 에티오피아 땅이었기 때문이죠.
이탈리아는 1941년 에티오피아에게 지고
이후 아프리카 땅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요.
에티오피아의 셀라시에 황제는
이탈리아가 떠나며 다시 독립을 하게 된 에리트레아 땅을 노렸고
그 중요한 이유는 해상으로의 길을 얻는 것이었죠.
셀라시에 황제는 이탈리아 식민지에서 해방된 에리트레아가
독립 국가로 자립하기 어렵기에
에티오피아에 합병되도록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설득하였고
미국의 주도하에 1950년 12월
유엔 결의안 채택으로
결국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에 합병되었죠.
에티오피아는 해상로를 확보하는 이익이 있지만
미국은 왜 이를 승인했을까요?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럽과 중동에 가까운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는
지정학적으로 냉전시대에 소련을 견제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위치였습니다.
또 영상 내용으로 아셨다시피
기독교를 믿고 친서방적인 모습을 보여왔죠.
그렇기에 미국도 이 에티오피아 고유의 특성과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하고자 한 것입니다.
에티오피아는 냉전시대에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핵심적인 동맹국의 역할을 하였고
에리트레아 수도 아스마라에
비밀 정보 수집 기관과 해군 기지를 세우기도 하였죠.
미국이 태평양 동맹 라인에
한국을 포함시키고 미군도 주둔시키며 중국을 견제하고 있잖아요.
비슷한 것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이렇게 에티오피아와 미국 간의 상호 이익이 되는 관계를 본다면
유엔군 파병에 왜 에티오피아가 동참한 것인지
아프리카통일기구의 본부가 아디스아바바에 세워지고
왜 초대 의장이 에티오피아 황제 셀라시에가 되었는지도 이해가 되실겁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자유주의 진영의 적극적인 지지자로 계속 남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대기근, 급작스러운 인플레이션, 석유파동
에티오피아 내 인권 문제 등
여러 부정적인 현상들이 발생하여
결국 1974년 쿠데타가 일어나게 됩니다.
새로운 정부는 소련의 편에 서는 공산주의 정부였고
이후 에티오피아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죠.
상황은 악화되고 내부적 외부적 불안 요소들이 쌓이게 되며
결국 1993년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을 하게 됩니다.
에티오피아는 다시 내륙 국가로 돌아가게 되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는 내륙 국가가 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무역의 90% 이상이 해상을 통해 이루어지고
특히 지부티를 통과합니다.
홍해 바다를 가기 위해선 북쪽 나라를 거칠 수밖에 없는데
에리트레아와는 독립 문제,
독립된 이후에는 국경 분쟁 등으로 관계가 좋지 않았고
지부티가 홍해와 바브엘만데브 해협 사이에
중요한 해상 무역 거점이기에
대부분의 무역이 지부티의 도랄레항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 이 항구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보니
대안으로 지부티의 도랄레항뿐만 아니라
소말리아의 베르베라항, 수단의, 포트수단왕, 케냐의 라무항 등
주변 국가들의 항구 지분을 확보하고 있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에리트레아 항구로 가는 길도 개통시켜 나가고 있죠.
아무튼 미래는 더 나아질 거라 쳐도
지금 당장은 지부티항의 영향력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지부티로 가는 더 나은 화물기를 만들기 위해
2018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지부티까지 잇는
동아프리카 최초의 현대화된 전기 철도를 완공하게 됩니다.
이 철도는 장장 725킬로미터에 달하는데요.
여기에는 40억 달러 정도나 되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데
이 돈은 과연 어디서 났을까요?
원천은 최근 아프리카에 대대적인 투자를 해오고 있는
중국인데요.
이 철도는 동아프리카에 중국이 투자한
가장 큰 인프라 프로젝트라 볼 수 있죠.
그렇다면 중국이 왜 이렇게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아프리카에 투자를 할까요?
이것은 하나의 콘텐츠로 다룰 만한 주제이긴 하나
간단히만 말씀드릴게요.
일단 이 철도 건설에만
미화 40억 달러 정도의 막대한 비용이 들었습니다.
이 비용의 약 70%를
중국의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았죠.
건설에 대한 계약도
중국 국유기업인 중국 철도그룹과 중국 토목 건설공사의 수주를 주게 되죠.
철도 건설 간 중국 인력을 중심으로 건설이 진행되고
철도의 형태도 당연히 중국 표준을 따르게 되죠.
이런 과정들로 앞으로의 아프리카에서의 철도들도
중국의 표준을 따를 가능성도 더욱 높아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지 보수를 위해서는
중국의 힘을 빌려야 하고
하물며 작은 부품까지도 중국에서 수입을 해야 하죠.
이런 경제적인 이익들도 있지만
사실 중국이 통 큰 투자, 대출, 차관, 지원 등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 보니 중국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으며
이익 관계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편을 드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늘어나는 것은
여러 갈등의 중심에 있는 중국의 국제 관계에서 큰 힘이 되는 것이죠.
몇 가지 예만 잠깐 들어볼게요.
과거엔 대만과 30개국이 공식적으로 관계를 유지했지만
현재는 에스와티니 1개국만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20년 중국의 홍콩 국가보안법에 대해
거의 모든 아프리카 국가라 할 수 있는 53개국이 지지를 선언했고
작년 10월 UN 난민기구에서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인권을 논의하자는 제안에
소말리아를 제외하고는 모든 UNHCR 회원 아프리카 국가들이 반대표를 던지며
중국의 편을 들어주었죠.
국제사회에서 의결을 위한 투표권 행사 시
강대국 미국의 한 표든, 케냐의 한 표든
원칙적으로는 같은 한 표인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이유들로 인한 중국의 투자로
철도가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죠.
2018년 철도가 완공되고
이듬해인 2019년은 사업 운영비보다 수익금이 훨씬 낮았지만
최근에는 점차적으로 수익이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2022년 하반기 5개월간 철도 운영을 통한 수입이
4,740만 달러에 이르렀다는 언론 발표가 있었는데요.
이는 전년도에 비해 25% 이상 증가한 수치입니다.
하지만 중국으로부터 빌린 엄청난 부채를 갚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새로운 인프라를 활용하여 발전해 나갈지
혹은 부채의 덫에 빠져 국가 부도 사태까지 이어져 가고
결국 한반토타항의 운영권을
99년간 중국에 양도한 스리랑카처럼 될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네요.
에티오피아의 다양한 부분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높은 고온과 여러 강의 발원지를 가졌다는 지리적 강점과
식민지를 이겨내는 등 역사적 상징성은
에티오피아의 강점이며
인구도 많기에
앞으로 더욱 발전 가능성이 높은 국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랜드 에티오피아 르네상스 댐을 통해 전력을 생산하고
이를 지부티와 수단에 판매하여
4,1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는
올해 2월 자, 언론 기사 발표가 있었는데요.
이게 앞으로도 성공적으로 이어진다면
아프리카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전력 생산 국가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또 아프리카의 급수탑으로써
기술과 자연을 현명하게 사용한다면
에티오피아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내륙 국가로
해상으로의 접근성이 제한된다는 큰 걸림돌이 여전히 있으며
이 영상에서 자세히 다루진 않았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에 종종 나타나는
내전, 국경 분쟁, 부정부패, 극단주의, 해적 등의 여러 갈등 요소들이 있다는 것은
큰 약점이 될 것입니다.
영상을 통해 에티오피아와 더 가까워지셨길 바랍니다.
특히 한국 전쟁에도 참여한 고마운 나라 에티오피아인 만큼
앞으로 에티오피아가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영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켜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시청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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