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제가 어떤 사람한테 이런 얘기를
진짜 너무 진리가 절실하게 알고 싶다고 해서
저희 사무실로 최근에 찾아오신 분이 있어서
내가 진짜 2시간 가까이 이런 얘기를 했어요.
“좀 아시겠냐?”고 했더니 이분이 뭐라고 하냐면
“거 이상하네요. 알 듯하면서 모르겠는데
아니 어떻게 그 깨어났다는 분들 말씀은
내가 다른 무선 스님 얘기 들어봤는데
그때는 다 할 것 같은데
나오면 하나도
그래서 뭘 어쨌다는 거야 아무 말도 기억이 안 남고
알 듯하면서 모르겠고
도대체 그렇다고 또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겠고
이게 뭔지 모르겠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런 말을 했어요.
여러분 여러분도 지금 비슷한 심정이죠?
그게 왜 그런지 알아요?
벌써 미세하게 여러분의 생각이 정리를 하려고 하는데
정리가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알 듯 모를 듯하다는 거야.
그것도 바로 생각병 증세인 거야.
내 생각으로 정리해야 하는 건데 정리가 안 되네.
저 사람이 뭔가 말하는데
그 말하는 실체를 내가 생각으로 정리가 안 돼.
그러니까 내가 말씀드리는 게 이거예요.
여러분이 삶을 통째로 그리든
하늘에는 해 떠 있고, 밖에 나가 봐요.
그럼, 여기 저 서울 시내 빌딩들이 쫙 있고
쫙 여기 뭐 길이 있어서
차들이 막 다니고 있고
여기저기 사람들도 다니고 있고
여기 가로수도 있고
또 여기도 뭐 빌딩들이 있고, 뭐 여기 뭐 주택들도 있고
뭐 여기 새도 한 마리 날아가고
이거 아니에요, 세상이?
그런데 이런 것들이
지금 여러분들이 보면
우리는 이 중에서 뭘 쳐다볼 때 거기 가서 바로 떨어져요.
건물 보면 건물에 떨어지고
새 보면 새에 가서 꽂히고.
근데 깨어난 사람은 이 전체를 있게 하는
이 삶 전체를 있게 하는 이 자리가 있잖아요.
이 자리를 잃지 않아요.
이 자리가 해를 보고, 이 자리가 건물을 보는 거예요.
그래서 보되 빠지지 않고, 보되 걸리지 않고, 보되 보지 않는 거예요.
알기 쉬운 말로 굳이 말한다면
개체가 전체를 보는 게 아니고
전체가 개체 속에서 전체를 확인하고 있어요.
여러분은 지금도 ‘알겠다, 모르겠다’라는 그 생각 속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사실은 아까 자기 이름을 20번 외울 때와 마찬가지로
‘알겠다’ 하는 것도 내면에서 알고 있는 이 앎이 있고
‘내가 모르겠는데’ 하는 것도 내면에서 보고 있는 이 앎이 모르겠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안다 모른다를 동시에 다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럼 내가 하나 물어봅시다.
여러분은 원자폭탄 만드는 공식을 알아요? 몰라요?
근데 왜 모르면서 이렇게 태연자약할 수 있어?
모르는 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모르는 것을 이렇게 보고 있는 이 앎을 자각하는 게 중요해.
여러분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걸 어떻게 다 알겠어?
알 필요도 없어.
저기 저 길 가는 저 엿장수 아저씨의 그 엿 하나 20cm짜리 팔면
단가가 얼만데, 이익이 얼마 남는지를 다 알 필요는 없어.
길에서 종이 나눠주는 아줌마가
하나 나눠주면 얼마 남는지에 대해서 그렇게 연구할 필요는 없어.
그러니까 알고 모르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요.
알고 모른다는 것에 빠지지 말라는 거예요.
왜 모른다는 것에 빠져서
자꾸 수행하고 노력하고 더 알려고 하는 거야.
이 공부는 세상에 공부하고 거꾸로에요.
이 공부는 알든 모르든 상관없어.
모르는 것만 알면 돼.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돼.
요거를 이 앎이 ‘내가 모른다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요.
모른다는 것도 내가 품어
아는 것만 품는 게 아니야.
아시겠어요?
선악 미추, 모든 좋은 추억과 나쁜 추억을 다 품어.
그게 앎 아니에요?
나한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
근데 아무것도
다만 알고 있을 뿐 남아 있질 않아.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붙잡고 있거나 그거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 분별할 게 없기 때문에.
마치 하늘에 뜬 구름처럼 보는 거예요.
정보라는 게 실체가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없는데 왜 자꾸 있다고 만드냐고.
도도 마찬가지예요. 깨달음도 마찬가지에요.
실체가 없어요.
3차원 공간에 실체가 없어.
왜?
이 3차원 공간을 만드는 게 도거든.
근데 왜 자꾸 3차원 안에서 찾아
생각으로, 감정으로, 느낌으로.
그러면 못 찾지, 죽을 때까지 해도 못 찾아요.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삶이 뭔지를 보면 되요.
여러분, 이 삶을 지금 여러분이 한번 느껴봐.
막연하죠.
느낄 수 있어요.
이 삶을 느껴보라고.
*!
이게 느낀 거 아니요?
이렇게 체험했잖아.
*!
이건 체험 아니에요?
이것도 삶을 느낀 거지.
지금 이렇게 삶을 느끼고 있잖아.
“모르겠는데요.
뭐 뜬구름 잡는 얘기 같은, 뭔가 할 듯 모를듯 한데..”
이렇게 삶을 느끼고 있는 거 아니야.
뭘 더 이상 어떻게 느껴.
뭔가 정리하려고 하는 저 눈빛들..
그걸 좀 내려놔요.
그게 에고가 하는 짓이거든
뭔가 정리해서 알아야 되겠다.
얘 좀 내려놓고
그냥 이 삶을 그대로 받아들여봐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야.
저항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그럼 뭐가 있느냐?
여여한 텅 빈, 허공 같은 마음이 있어요.
근데 이게 살아있어.
그리고 그것이 이런 오온이 왔다 갔다 하는 이 짓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
여러분들은 아무것도 없던 이것 속에서
진리가 빛나고 있음을 보게 돼요.
그거에 다른 이름이 생명이고
다른 이름이 안욕다라 삼먁삼보리에요.
무상정등각이고, 별게 아니여.
자기가 답답하고 뭔가...
여러분은 내가 마스터에서 공부 가르쳐준 거 가지고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이미 공부 다 끝났어요.
근데 왜 아직도 마스터하고 나서도
보림하고, 또 다른 공부하고, 또 저한테까지 와서 물어보느냐?
이유는 간단해요.
자기가 분별해서 정리하려고 들기 때문에.
에고가 정리해서 알려고 들기 때문이야.
알아서 어쩌겠다는 건데?
무슨 서태지야? ‘난 알아요’
알아서 어쩌겠다는 건데?
알든 모르든 이런 것은 다 정보 활동에 불과합니다.
정보 활동은 여러분을 바꿀 수 있는 실제가 아니에요.
뭐만이 여러분을 바꿀 수 있냐 하면
여러분 자신이 이 정보를 가지고
얘를 붙들거나 얘가 귀하다고 붙잡을 때
그것이 나를 바꿔요.
나한테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그런 짓을 다 내려놓으면
본래의 나 스스로 충만하게
이미 전지전능한 자리에서
충만하고, 여여하게, 감사와 은총으로, 지복 속에서 빛나고 있게 돼요.
그걸 스스로 알게 돼요.
그게 지금 여기 그냥 있는데
그걸 못 만나고 못 보는 이유가
다 지가 자기 눈앞을 가려요.
온갖 생각. 분별. 감정으로.
그게 그렇게 세월이 걸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독교에서도
어떤 다른 영지주의나 이런 데서는
너희는 이미 다 구원됐다 그래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너희들을
지옥으로 누구 심판해서 보내고
이런 거 안 한다, 다 구원됐다.
근데 문제는
하나님을 자기가 심판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예요.
“아니 지금 세상이 왜 이 꼬라지야
이거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이런 짓을 이렇게 세상이 돌아가겠어?
우크라이나 전쟁이 하나님은 뭐 하시는데?
저렇게 나쁜 놈이 더 잘 되고.”
이게 다 하나님을 심판하는 거거든.
그 말에 이면엔 뭐가 있어요?
하나님이라면 이래야 되는데 왜 당신은 안 걸었어?
정신 좀 차리쇼.
이 얘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만치 자기 생각을 하나님보다 더 믿는 거예요.
그리고 그 생각 가지고 모든 걸 심판하고 있는 거야.
그게 중생살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못 벗어나는 거예요.
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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