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올라마음학교

[현대선25] 삶을 통째로 받아들임 / 피올라 현대선 5강 "삶이 깨어나는 순간" 8회

Buddhastudy 2024. 8. 19. 19:37

 

 

그러면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제가 어떤 사람한테 이런 얘기를

진짜 너무 진리가 절실하게 알고 싶다고 해서

저희 사무실로 최근에 찾아오신 분이 있어서

내가 진짜 2시간 가까이 이런 얘기를 했어요.

 

좀 아시겠냐?”고 했더니 이분이 뭐라고 하냐면

거 이상하네요. 알 듯하면서 모르겠는데

아니 어떻게 그 깨어났다는 분들 말씀은

내가 다른 무선 스님 얘기 들어봤는데

그때는 다 할 것 같은데

나오면 하나도

그래서 뭘 어쨌다는 거야 아무 말도 기억이 안 남고

알 듯하면서 모르겠고

도대체 그렇다고 또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겠고

이게 뭔지 모르겠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런 말을 했어요.

여러분 여러분도 지금 비슷한 심정이죠?

그게 왜 그런지 알아요?

벌써 미세하게 여러분의 생각이 정리를 하려고 하는데

정리가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알 듯 모를 듯하다는 거야.

 

그것도 바로 생각병 증세인 거야.

내 생각으로 정리해야 하는 건데 정리가 안 되네.

저 사람이 뭔가 말하는데

그 말하는 실체를 내가 생각으로 정리가 안 돼.

 

그러니까 내가 말씀드리는 게 이거예요.

여러분이 삶을 통째로 그리든

하늘에는 해 떠 있고, 밖에 나가 봐요.

그럼, 여기 저 서울 시내 빌딩들이 쫙 있고

쫙 여기 뭐 길이 있어서

차들이 막 다니고 있고

여기저기 사람들도 다니고 있고

여기 가로수도 있고

또 여기도 뭐 빌딩들이 있고, 뭐 여기 뭐 주택들도 있고

뭐 여기 새도 한 마리 날아가고

이거 아니에요, 세상이?

 

그런데 이런 것들이

지금 여러분들이 보면

우리는 이 중에서 뭘 쳐다볼 때 거기 가서 바로 떨어져요.

건물 보면 건물에 떨어지고

새 보면 새에 가서 꽂히고.

 

근데 깨어난 사람은 이 전체를 있게 하는

이 삶 전체를 있게 하는 이 자리가 있잖아요.

이 자리를 잃지 않아요.

이 자리가 해를 보고, 이 자리가 건물을 보는 거예요.

그래서 보되 빠지지 않고, 보되 걸리지 않고, 보되 보지 않는 거예요.

 

알기 쉬운 말로 굳이 말한다면

개체가 전체를 보는 게 아니고

전체가 개체 속에서 전체를 확인하고 있어요.

 

여러분은 지금도 알겠다, 모르겠다라는 그 생각 속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사실은 아까 자기 이름을 20번 외울 때와 마찬가지로

알겠다하는 것도 내면에서 알고 있는 이 앎이 있고

내가 모르겠는데하는 것도 내면에서 보고 있는 이 앎이 모르겠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안다 모른다를 동시에 다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럼 내가 하나 물어봅시다.

여러분은 원자폭탄 만드는 공식을 알아요? 몰라요?

근데 왜 모르면서 이렇게 태연자약할 수 있어?

 

모르는 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모르는 것을 이렇게 보고 있는 이 앎을 자각하는 게 중요해.

 

여러분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걸 어떻게 다 알겠어?

알 필요도 없어.

 

저기 저 길 가는 저 엿장수 아저씨의 그 엿 하나 20cm짜리 팔면

단가가 얼만데, 이익이 얼마 남는지를 다 알 필요는 없어.

길에서 종이 나눠주는 아줌마가

하나 나눠주면 얼마 남는지에 대해서 그렇게 연구할 필요는 없어.

 

그러니까 알고 모르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요.

알고 모른다는 것에 빠지지 말라는 거예요.

 

왜 모른다는 것에 빠져서

자꾸 수행하고 노력하고 더 알려고 하는 거야.

 

이 공부는 세상에 공부하고 거꾸로에요.

이 공부는 알든 모르든 상관없어.

모르는 것만 알면 돼.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돼.

요거를 이 앎이 내가 모른다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요.

모른다는 것도 내가 품어

아는 것만 품는 게 아니야.

아시겠어요?

 

선악 미추, 모든 좋은 추억과 나쁜 추억을 다 품어.

그게 앎 아니에요?

 

나한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

근데 아무것도

다만 알고 있을 뿐 남아 있질 않아.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붙잡고 있거나 그거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 분별할 게 없기 때문에.

마치 하늘에 뜬 구름처럼 보는 거예요.

 

정보라는 게 실체가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없는데 왜 자꾸 있다고 만드냐고.

 

도도 마찬가지예요. 깨달음도 마찬가지에요.

실체가 없어요.

3차원 공간에 실체가 없어.

?

3차원 공간을 만드는 게 도거든.

근데 왜 자꾸 3차원 안에서 찾아

생각으로, 감정으로, 느낌으로.

그러면 못 찾지, 죽을 때까지 해도 못 찾아요.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삶이 뭔지를 보면 되요.

여러분, 이 삶을 지금 여러분이 한번 느껴봐.

막연하죠.

느낄 수 있어요.

이 삶을 느껴보라고.

 

*!

이게 느낀 거 아니요?

이렇게 체험했잖아.

*!

이건 체험 아니에요?

이것도 삶을 느낀 거지.

지금 이렇게 삶을 느끼고 있잖아.

 

모르겠는데요.

뭐 뜬구름 잡는 얘기 같은, 뭔가 할 듯 모를듯 한데..”

이렇게 삶을 느끼고 있는 거 아니야.

뭘 더 이상 어떻게 느껴.

 

뭔가 정리하려고 하는 저 눈빛들..

그걸 좀 내려놔요.

그게 에고가 하는 짓이거든

뭔가 정리해서 알아야 되겠다.

 

얘 좀 내려놓고

그냥 이 삶을 그대로 받아들여봐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야.

저항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그럼 뭐가 있느냐?

여여한 텅 빈, 허공 같은 마음이 있어요.

근데 이게 살아있어.

 

그리고 그것이 이런 오온이 왔다 갔다 하는 이 짓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

여러분들은 아무것도 없던 이것 속에서

진리가 빛나고 있음을 보게 돼요.

 

그거에 다른 이름이 생명이고

다른 이름이 안욕다라 삼먁삼보리에요.

무상정등각이고, 별게 아니여.

 

자기가 답답하고 뭔가...

여러분은 내가 마스터에서 공부 가르쳐준 거 가지고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이미 공부 다 끝났어요.

근데 왜 아직도 마스터하고 나서도

보림하고, 또 다른 공부하고, 또 저한테까지 와서 물어보느냐?

이유는 간단해요.

자기가 분별해서 정리하려고 들기 때문에.

에고가 정리해서 알려고 들기 때문이야.

알아서 어쩌겠다는 건데?

무슨 서태지야? ‘난 알아요

알아서 어쩌겠다는 건데?

 

알든 모르든 이런 것은 다 정보 활동에 불과합니다.

정보 활동은 여러분을 바꿀 수 있는 실제가 아니에요.

뭐만이 여러분을 바꿀 수 있냐 하면

여러분 자신이 이 정보를 가지고

얘를 붙들거나 얘가 귀하다고 붙잡을 때

그것이 나를 바꿔요.

나한테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그런 짓을 다 내려놓으면

본래의 나 스스로 충만하게

이미 전지전능한 자리에서

충만하고, 여여하게, 감사와 은총으로, 지복 속에서 빛나고 있게 돼요.

그걸 스스로 알게 돼요.

 

그게 지금 여기 그냥 있는데

그걸 못 만나고 못 보는 이유가

다 지가 자기 눈앞을 가려요.

온갖 생각. 분별. 감정으로.

그게 그렇게 세월이 걸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독교에서도

어떤 다른 영지주의나 이런 데서는

너희는 이미 다 구원됐다 그래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너희들을

지옥으로 누구 심판해서 보내고

이런 거 안 한다, 다 구원됐다.

 

근데 문제는

하나님을 자기가 심판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예요.

 

아니 지금 세상이 왜 이 꼬라지야

이거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이런 짓을 이렇게 세상이 돌아가겠어?

우크라이나 전쟁이 하나님은 뭐 하시는데?

저렇게 나쁜 놈이 더 잘 되고.”

 

이게 다 하나님을 심판하는 거거든.

그 말에 이면엔 뭐가 있어요?

하나님이라면 이래야 되는데 왜 당신은 안 걸었어?

정신 좀 차리쇼.

이 얘기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만치 자기 생각을 하나님보다 더 믿는 거예요.

그리고 그 생각 가지고 모든 걸 심판하고 있는 거야.

그게 중생살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못 벗어나는 거예요.

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