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올라마음학교

[현대선23] 모든걸 아는 앎 / 피올라 현대선 5강 "삶이 깨어나는 순간" 6회

Buddhastudy 2024. 8. 12. 19:22

 

 

그러면 한번 실습을 해봅시다.

여기 초보들도 많기 때문에

하신 분들은 좀 지루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다시 반복하는 의미에서 한번 해봅시다.

 

지금부터 자기 이름

성은 빼고 이름

이름이 세 글자나 네 글자인 분 있어요? 없죠?

대개 두 글자 아니면 외자죠.

자기 이름을 20번을 반복합니다.

 

그런데 20번을 반복하는데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세면 안 돼요.

그냥 머릿속에서 눈을 감고 세는데

예를 들어

제가 교장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면

이렇게 세면 됩니다.

교장 하나, 교장 둘, 교장 셋, 교장 넷

이러면 이십 번까지 셀 수 있잖아.

정확하게 20번입니다.

 

내가 이거를 치면 시작하고

끝난 사람은 조용히 손을 들었다가 내리세요.

그러면 제가 거의 다 끝난 것 같으면 다시 종을 치겠습니다.

그러면 끝난 거예요. 아시겠죠?

 

자기 이름 모르는 분 없죠?

 

*!

(눈을 감고

천천히 이름을 20번 세어보세요)

 

20번을 벌써 샜다는 건

그건 아닌데

그거는 망상을 떤 거지 다시 세세요. 천천히

그렇게 빨리 셀 수가 없어요. 양자 컴퓨터가 아닌 한.

 

빨리 세신 분은 다시 한 번 해보세요.

다시 한 번 20번을 세보세요.

 

.

.

.

*!

 

네 좋습니다.

거의 하신 것 같아요.

 

여러분이 이걸 세면서

여러분 안을 좀 분석을 해보면

예컨대 제가 제 이름을 20번을 센다고 하면

교장, 교장 둘, 교장 셋, 교장 넷, 교장 다섯, 교장 여섯... ”

이렇게 하면서 세겠죠.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의 생각이, 분별 활동이

20까지 세면서 분별할 겁니다.

그죠?

 

그런데 이 마음이라는 공간 속에서

이런 것이 이렇게 구름처럼 일어나요.

생각이.

그래서 그게 반복돼요. 지속돼요.

하나, , ...

 

20번 세면 사라지죠.

그런데 이 전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내면의 눈이 있어요.

아는 앎이 있다고

앎이야 앎.

이거 다 알고 있으니까

셋 다음에 넷, 넷 다음에 다섯 하는 거지.

 

그 앎은 이거 세기 전부터 있었고

셀 때도 있었고, 세고 난 다음에도 있어요.

지금도 있어요.

 

이거에 한번 여러분이 집중해 봅시다.

~!

여기 그 앎이 있어요. 없어요?

있죠

 

*!

이 소리에 있어요. 없어요?

이 칠판에 있어요. 없어요?

여기 에어컨에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이 허공에 있어요. 없어요?

 

여러분 잘 보면

이 세상이 다 내 앎이야.

 

요게 분별이 일어나기 전의 각성 상태예요.

이걸 깨어있음이라고 그래요.

 

모든 깨어 있는 사람은

눈동자가 초롱초롱합니다.

흐리멍텅 할 수가 없어. 썩은 명태처럼.

 

?

자기 앎 그 자체가 돼 있기 때문에.

앎을 또 의식하는 게 아니야.

이미 그 자체야.

 

여러분은 이미 그것이라고

그래서 모든 걸 아는 거예요.

나한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것을 다른 말로는 양심의 눈이기도 해요.

여러분이 나쁜 짓을 도둑질한다거나 거짓말을 한다거나 할 때는

얘가 알아.

그리고 속으로 뜨끔하든지

너 그러면 안 되는데

 

안 그래요?

얘가 다 알아

자동 CCTV, 이거 다 기록됐다 나중에 하나님한테 보고될지 몰라.

 

그러면 진리라고 하면 변하겠어요? 변하지 않겠어요?

변하지 않죠.

그러면 여태까지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구별해 봅시다.

 

여러분을 지금 괴롭히고 있거나

여러분이 좋아하고 있거나

여러분이 기다리거나 소원하는 것들은

다 변하는 것들이에요.

안 그래요?

 

변하지 않는 건 뭐야?

지금 이 앎밖에 없어

모든 걸 알고 있는 이것밖에 없다고

이걸 다른 말로는 생명의식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부처예요.

 

그러면 여러분은 또 생각에 빠지기 때문에

내가 추가로 경계하는 말로 드리는 말씀인데

우리 보통 이 중생심을 가진 사람들은

3등분 하기를 좋아해요.

 

누가, 무엇을, 어떻게

그래서 내가, 이것을, 본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앎을 부처자리다고 하면

어떤 망상을 떠올리게 되냐면

그러면 내가 이걸 아는 게 부처자리라면 이건 뭡니까?

알려지는 것은 뭡니까?

앎의 대상이 되는 건 뭐냐?고 물어볼 수 있어요.

 

근데 앎의 대상에 따른 이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이것이

생각에 떨어지는 거야.

왜냐하면 앎의 대상이 되는 이것은 무엇입니까?’도 앎이야.

이거를 알아차림의 알아차림이라고 그래요.

알아차리는 걸 또 알아차리고 있는 거야.

 

좀 전문적인 불교 용어들이 있는데

그런 거 하면 여러분들이 머리 아파지니까

내가 굉장히 쉬운 말로 풀어서 얘기하는 거예요.

 

즉 모든 것은

이렇게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이 변하지 않는 이 진리

모든 것을 인식하고 알고 있어요.

이것은 동시에 보고 있고, 알고 있어요.

장님도 보고 있어요.

?

자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있어요.

그리고 알고 있어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 없는 지렁이도 알고 있어요.

자기라는 존재가 여기 있다는 것을.

 

그리고 여기에 일어나는 모든 주체, 객체, 행위라고 하는

삼분법의 것들이 전부 생각이라는 것을

우리가 더 한 번 더 알아차리면

그때는 모든 것이 정보화 돼 버려요.

더 이상 실체가 아니고

이름들이 다 떨어진다고.

 

내가 아까 말했지.

이게 우리 감옥이라고

이게 우리 감옥이에요.

 

여기서 볼펜이라는 이름이 떨어지면

이것도 그냥 앎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러분의 생명력이 진짜로 살아나는 건 이때부터예요.

진리가 드러나는 건 이때부터라고

모든 것이 살아있게 돼.

죽은 게 아무것도 없어.

 

여러분 길 가다 돌멩이를 보고

, 저 돌멩이 살아있네요하면

옆에 사람이 미쳤다고 그럴 거야. 안 그래?

돌멩이가 어떻게 살아? 그렇죠

 

그런데 우리는 미세하게 모든 걸 다 죽였어요, 자기조차도.

무슨 말이냐면

너를 보면서 너는 내가 이해하고 알고 있는 아무개야라는 생각으로

지금 살아있는 너를 죽여버렸어. 그죠?

 

저 사람은 그런 사람

우리 선생 저런 사람

당신 이런 사람

아무것도 살아있지 않아.

 

심지어 나조차도

과거에 나를 지배하고 있던 모든 생각, 감정, 감각 속에서 나를 정리했기 때문에

나는 그 속에 갇혀 있어요.

아무것도 살아있지 않아.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고통스럽게 된 거예요.

삶이 이렇게 힘든 거야.

우울하고, 권태스럽고,

아무것도 새로운 게 없는 거야.

 

이런 걸 다 여러분이 앎으로, 앎 그 자체로 거듭날 때

생명력 그 자체로 거듭날 때 모든 게 살아나기 시작해요.

모든 게 살아나는 비밀은

모든 것에서 이름이 떨어져 나가는 거야.

이름이 떨어져 나간다는 건 뭐야?

내 분별이 끝을 보이는 거야.

자기 분별의 끝을 보는 거야.

그 시작, 원인을 보는 거야.

 

이거 다 내가 만든 환상 쇼였구나. 환영이었구나.”

그러면서 꿈을 깨는 거예요.

여러분이 꿈 깨는 것이 바로 지금부터야.

그럼, 세상이 다 살아나요?

 

실상을 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실상을.

허상이 아니고.

여태까지 내가 만든 허상을 본 거예요.

이제는 실상을 보는 거예요. 아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