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돈 버는 기계인가? 나는 왜?
속알이를 하고 있는데, 이걸 알아줄 사람이 없어.
나 이것 때문에 너무 너무 속상해~
내 마음은 나밖에 몰라요.
스스로 내가 나를 위로해 줄 수 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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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로하고 사랑할 때 현실이 바뀝니다.
오직, 나만이 나를 위로하고 사랑할 수 있어요.
키우는 화초에 물을 좀 줬어요.
일하느라 얘네들한테 신경을 안 쓰니까
비실비실해 보이네요.
그래서 화초에 물을 주면서
고맙잖아요.
얘네가 우리한테 주는 좋은 느낌이 있는데 많이 신경써 주지 못하니까.
그래도 얘네들은 그 자리에 묵묵하게 있죠.
우리는 믿는 거죠.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하는 나
간혹 정신이 피곤하거나 그럴 때, 직장 생활 오래하다보면 그래요.
“도대체 내가 돈 버는 기계인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라고 하면서
스스로 나한테도 위안을 못 줄 때가 많습니다.
슬프죠.
그럴 때 저 같은 경우는
주로 운동을 하거나 자연이랑 많이 옆에서 호흡을 해요.
산에 걷거나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있으면 뭔가 위안을 받는 느낌이 많이 들어요.
누가 솔직히 내 마음을
열 수도 없잖아요. 알 수도 없잖아요.
누가 내 마음을 알겠어요.
각자 각자의 마음을 누가 이해하겠냐고요.
제 부인이 제 마음을 알까요?
내 엄마아빠가 제 마음을 알까요?
내 자식이 내 마음을 알까요?
몰라요.
내 마음은 나밖에 몰라요.
그런데 나밖에 모르는 이 마음도 나는 못알아주고 있잖아요.
이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이 그렇게 등산을 좋아하는 이유가
산으로 그냥 가면 자연에 파묻혀 있으면 거기는 그냥 다 받아줄 거 같거든요.
다 이해받고, 다 용서해 줄 거 같고, 뭔가 나를 다 그냥 품어줄 거 같은
그러니까 자연에 대한 경외심도 들고, 존경하는 마음도 들고,
계속 다니다 보면, 또 자연을 느끼다 보면, 자연에 내가 이렇게 숙이게 되죠.
머리가 이렇게 숙여집니다.
우주 앞에 당연히 인간이 숙여지게 되는 거예요.
우주에서부터 나오는 존재이고
우리는 또 우주의 일원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인식의 벽이 허물이지게 되면
내 스스로 우주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자연이 우리한테 베풀어주는 이런 힘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히 머리만 똑똑하고 지능이 좋으면 잘 산다라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그런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갖고 계속 살다보니까 이렇게 된 거죠.
나중에는 “내가 돈버는 기계인가? 도대체 나는 왜 이러구 있는 거지?”라는
스스로의 의문을 던지게 됩니다.
던질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런 생각조차 들지도 못하죠.
그냥 이렇게 살다가 우리 부모는 나보다 더 힘들었으니까 그래도 난 이 정도면 행복한 거야.
그러면서 그냥 묻혀서 그렇게 살아요.
그래서 솔직히 마음공부를 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데라고
그런 기대를 안고서 기웃기웃 거립니다.
도가 되신 스님이라든가, 이런 사람들 옆에서 이런 소리를 듣고, 저런 소리를 듣고 있으면
머리로만 들으면 어, 그렇게 될 거 같아.
그런데 그 얘기를 뒤집어서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라면 똑똑하고 가방끈 길고, 정말 돈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정말 부자로 잘살고
앞으로도 잘 살아야만 합니다.
그럼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잘 살아야만 하는데, 그렇지 못하잖아요.
아이큐가 높고, 가방끈이 긴 사람은 행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줄을 서서 커트라인으로 딱 잘라버리고 그 위에 있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 밑에 있는 사람은 취급도 안 하잖아요.
우리 사회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구조적인 프레임 안에 갖혀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계속 그렇게 살다 보니까
스스로 자괴감도 들고,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됐는지조차도 잘 모르는 그런 상황에 빠진 거죠.
--
머리의 기능에 심취한 인간
머리의 함정에 빠지다.
이게 왜그러냐하면
인식이 그렇습니다.
그런 인식이 들게끔 하는 것이 있는데
마치 그런 거예요.
(기억하기 싫은 기억, 체험, 경험정보를 피하고, 덮고 도망가고 싶은 나)
그 인식을 들게끔 하면
내가 안 다치고, 내가 안전을 보장받는 거 같고
“더 이상 괴롭지 않아” 라는 그런 인식을 스스로 뭔가 주입받게 됩니다.
“아, 그 말이 맞아”라고 또 장단을 치는 나를 발견하게 되고
사회적 전반적인 분위기도 그런 쪽으로 몰고 가고
이렇다 보니 거기에 젖어있어서 나를 잊어버리는 거죠.
그냥 거기에 맡겨놔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차츰차츰 내 바깥으로 벽을 쌓게 됩니다.
그 벽은 너무 쌓다 보면, 내가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이런 문이라든가
그런 것조차 다 막아버리고 계속 이 벽을 쌓게 돼버려요. 내 주위로.
더 이상 외부랑 소통을 못하게 되는 지경이 된 거죠.
우리 인간은 지능이 있어서
혜택받았다고 하지만, 이 지능 때문에 굉장히 고통도 받고 있습니다.
다른 동식물들처럼 자연과 이렇게 우주와 서로 교감이 되어서
때가 되면 그들은 뭘하잖아요. 그렇게 고통받지 않습니다.
잘잘못, 편견, 판단, 이런 거 없죠.
자연은 그런 거 없습니다.
우주는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런데 오직 우리 인간만이 판단하고 편견을 갖고 상대적인 것을 대비시킵니다.
그러면 “나는 뭐지?”라고 스스로 자문하게 되는
여기서부터 되게 딜레마가 시작되는 거잖아요.
그것을 보호하려고 스스로 아까 말씀드렸지만 벽을 쌓고요.
--탐욕, 분노,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스스로 나를 구하는 길을 찾아봅시다.
그래서 그거에 대한 해답으로 뭔가 좋은 얘기를 듣는다고 해도
이걸 또 판단하고 곡해하고 왜곡하는 그 인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아무리 우리가 좋은 경전을 읽고
좋은 얘기를 듣는다고 한들
분명히 그 정보를 이용해서
“내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지?”
이거에만 탐욕에만 빠지지 않습니까?
계속 공염불인 거죠.
--자연상태로 돌아가자
그런 마음이 들기 이전에
뭔가 우리가 스스로가 판단이라든가 그런 마음들을 내려놓고
“자연상태로 돌아가자”라고 저는 말하고 싶어요.
내가 외롭고 내가 힘들고 내가 괴로울 때
내가 괴롭다는 걸 얘기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모르잖아요.
그런데 그 괴로움과 그런 것들을 잘 알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어요?
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내가 나를 위로해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당장은 누군가가 얘기해줘야 하는데 얘기해 줄 사람이 없단 말이에요.
진짜 속내를.
화병이나 속앓이를 하고 있는데 그걸 알아줄 사람이 없어.
나밖에 모르는데 그것도 인식에 의해서 알지도 못해.
왜 이러고 있는지조차 몰라.
이럴 때는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냥 산을 타거나, 조용히 숲길을 혼자 걷는다든가
식물이랑 대화한다던가
굳이 뭐, 나무 옆에 앉아서 “어~ 잘 있느냐?” 이런 대화가 아니더라도
속으로 마음으로 한번 느껴보는 거죠.
이 나무가 이 숲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왜 괴로운지
이것을 자연 앞에서 한번 외쳐 보는 겁니다.
“나, 이것 때문에 너무너무 속상해”라고.
(위대한 큰 점이 내면에 찍히게 됩니다.)
이러면 뭔가 보답을 받게 돼요.
뭔가 위로를 받게 돼요.
자연으로부터 내가 위안을 받는다고 할까?
그럼 편안한 마음이 듭니다.
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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