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연기설은 조건과 원인에 의해
나가 형성되고 그렇게 그 날을 특정
할 것이 없다는 불교의 대표적 이론
입니다.
쉽게 말을 삼라만상의 인연으로 촘촘하게 엮여 있어서
나라는 존재를 따로 떼어 개념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가령 코끼리가 한 마리 있는데 어느 날
코가 상하로 흔들리면서 나 라고 주장하고, 귀가 좌우로 컬러 기면서 나라고 외치면 이상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것은 삼라만상의 한 부분이면서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되어 있어서
나 라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어색합니다.
여기서 나라고 할 것이 없다
나의 실체가 텅 비어 있다는 불교의 무아론이 힘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12연기설은 어떤 것일까요?
1. 무명
무명이란 진리에 대해 모른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존재의 실상이고 이것은 다른 말로 제1 원인 혹은 실존입니다.
제1원인은 자존성과 영원성 그리고 불변성을 동시에 만족하는 그무엇인데
이것을 깜빡 잊으면서 모든 정보 현상이 시작하게 됩니다.
2. 행
무명에서 어떤 정보들이 정처 없이 발생하는 것이 행위입니다
혼돈의 카오스 상태라고나 할까요
3. 식
식이란 정보들이 차츰 방향을 잡아나가는 과정입니다.
쉽게 말을 정보의 질서로 보면 됩니다.
4. 명색
정보들이 구분될 정도로 윤곽을 갖추면
이름도 붙고 자신만의 특성을 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정보가 기본적인 구색을 갖추게 된 것을 일러 명색이라 합니다.
5. 육처
정보를 분류하기 위해 생겨나는 6가지 정보처리 기관이 육처입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가, 촉각과 이것들을 종합한 느낌으로
정보를 분류하게 됩니다.
6. 촉
육처에서 정보를 종합하면
그 정보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싹틉니다
다시 말해 어떤 대상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여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촉입니다
7. 수
정보가 환영이 아니라 어떤 실체를 지녔다고 판단하면
그것들에 의식이 쏠리게 됩니다.
즉 정보를 끌어 당기려는 현상이 생기는데 이것이 수입니다.
8. 애
정보를 모으다 보면 그것에 대한 관심이 부쩍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 생기는데
이것이 애입니다
9. 취
애가 커지면 그것에 대한 집착이 생깁니다.
즉 소유욕이 생기는데 이것이 취입니다.
10. 유
이쯤되면 정보를 취합해서 모종의 판단을 내리는 주체
다시 말해 나가 있다고 분명하게 여기게 됩니다.
나가 실제 한다고 굳게 믿게 되는 단계가 바로 유입니다.
11. 생
나라는 것은 개체를 말합니다.
삼라만상이 개체로 쪼개지면서
마치 천지가 창조될 때 만물이 대개로 갈라져 나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생입니다.
12. 노사
개체라는 것이 있게 되면 결국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뒤에 해체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을 노사라고 합니다.
이상의 12연기를 종합해보면 이러합니다
진리를 몰라 정보들이 산발적으로 튀어나오고(무명/행)
그것들이 차츰 방향을 잡아갑니다(행)
그러다가 윤곽을 갖추면서 자신만의 특성에 생겨납니다(명색)
그러자 이런 정보들을 구분하기 위해
안이비설신의의 6가지 정보분류가 가능해지고 (6처)
이렇게 정보를 취합다보니 정보가 실제 한다고 여기게 됩니다(촉)
그러자 정보를 수집하려고 하고(수)
그렇게 정보를 모으다 보니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 생깁니다(애)
여기서 소유욕이 발생하고(취)
소유욕과 더불어 나라는 의식이 강하게 굳어집니다(유)
나의 틀이 갖춰지자 삼라만상이 개체로 산산이 쪼개지고
이렇게 개최로 독립하게 되면서 시공의 제약에 걸려 해체를 맞게 됩니다.
이것이 불교의 12연기설입니다.
정보들이 모여 들고 그것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라는 관념이 생기고
그래서 아무리 따져봐도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무아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됩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나라는 것이 정보들의 합성에 불과하다면
그 정보들이 흩어지면 나는 없는 건가요?
이제 12연기에 의해 굴러가던 오온의 나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바탕에 진짜 나가 있다면 도로 힌두교가 됩니다.
참나(아트만), 본성, 불성 같은 것이 등장하면서
열반, 해탈, 영생이 가능해집니다.
구원의 길이 활짝 열리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반면에 바탕에 나가 없다면
유물론처럼 되면서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니 수행자들이 어느 길을 선택할까요?
바로 전자의 힌두교 논리입니다.
그런데 힌두교로 가자니 창피하고, 그렇다고 무아를 고수하자니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수행자들은
다음과 같은 희론을 대안으로 꺼내듭니다.
1.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말은
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즉 무아의 무는 마우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2. 오온의 나가 사라지고 난 바탕엔 마음의 비춤이 있다.
마음은 저절로 존재하며 삼라만상을 반조하고 있다.
그 마음은 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가 아닌 것도 아니다.
3. 나는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있지 않고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없지 않다.
이상과 같이 무아와 참나 사이에 낀 불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해괴한 논리를 만들게 됩니다.
이런 풍토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면서
싯다르타의 무아는 자취를 감추고
그 자기를 희론과 참나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오온의 나가 사라지고 난 뒤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힌두교의 참나는 완전히 틀렸습니다.
참나, 본성, 불성같은 것이 있었으면
싯다르타는 무아를 주장하지 않았고
구태여 불교를 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가 사라지면서 완전한 무가 된 것일까요?
싯다르타의 무아론은 유물론의 철학적 이해였던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앞에 나오는 세가지 희론은 더더욱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매우 심각한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존재를 유와 무로 가르면서
차원의 설정값에 달라붙어 있으니까요.
지혜로운 수행자들은
유와 무를 통합해서
비유비무나 유미무로 답을 내려하지만
이것 역시 오십보 백보입니다.
바로 유와 무의 꽉 갇혀버린 의식
이것이 차원의 무시무시한 설정값입니다.
꿈속에서 상상으로 깨달음을 논한다는 얘기가
이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요컨대 유와 무에 존재의 비밀이 있습니다.
당신이 수행자라면
유와 무로써 제1원인을 풀어야 합니다.
혹자는 양자컴퓨터의 큐비트를 끌어오거나
제3의 존재 형태인 공을 등장시킬 수 있는데
그것 역시 유와 무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따라서 결국은 유와 무에서 승부를 봐야 합니다.
유와 무로 제1원인을 풀면 유와 무는 그 정체를 드러내면서
당신에게 존재의 코드를 선사할 것입니다.
싯다르타가 가리키는 무아가 심중에 떠오르며
“나는 누구인가?”의 화두를 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심리적 만족을 위해 수행하시나요?
그렇지 않다면 실존의 코드를 풀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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