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꼽으라면
거의 대부분이 사성제를 말합니다.
사성제는 세존이 처음으로 내린 법이며
불교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성제를 모르면 불교를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성제는 고집멸도의 매우 단순한 네 글자로 이루어졌지만
이것을 정확히 이해하는 수행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는 사성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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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고의 진리는 뭘까요?
괴로움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아상에서 일으키는 고와 존재에서 일으키는 苦입니다.
나가 있다고 여기면 그와 동시에 나를 이롭게 하려는 의식이 발생하는데
이것을 뭉뚱그려 아상이라 합니다.
아상엔 여러 괴로움이 따라붙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생로병사입니다.
이에 비해 존재의 고는
나와 상관없이 존재가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괴로움입니다.
존재함으로서 저절로 생겨나는 고인데
이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아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의식입니다.
정리하면
아상의 고는 생로병사이고
존재의 고는 진리에 대한 갈애입니다.
그렇다면 세존이 설한 고는 어느 쪽일까요?
수행이란 아상에서 시작하면 계속해서 아상을 만족하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아상은 어떡하든 생로병사를 해결하기 위해
깨달음도 만들고, 깨달음의 열매도 기가 막히게 꾸며냅니다.
아상은 생로병사에 매여 있는 나를 오온으로 조합된 가아로 놓고
이것을 털어내면 진짜 나가 있다는 논리를 세웁니다.
그 진짜 자는 자존하는 순수의식이어서 생로병사와 무관하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 생로병사를 가아에 붙여 날려 버리고
그 이후에 남은 ‘바탕의 나’에다 열반과 해탈, 영생 같은 이상향을 붙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상이 심리적 만족을 얻기 위해 날조하는 기본적인 패턴입니다.
그래서 생로병사를 목적으로 한 수행은 결국 아상 노름으로 귀결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세존은
두 번째, 존재의 고를 가르치려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세존이 존재의 고를 설했다면 단 한 명의 제자도 얻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어느 누가 발등에 떨어진 생로병사의 불을 외면하고
형이상의 존재에 귀 기울이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세존은 어쩔 수 없이 생로병사의 고를 설했고
제자들이 수행의 과정에 존재의 고로 옮겨가기를 내심 바랐습니다.
하지만 세존의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습니다.
불교의 태동부터 오늘날까지 생로병사의 고가 사성제의 첫 단추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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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集의 진리는 무얼까요?
집이란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이론입니다.
여기에도 두 가지가 존재합니다.
첫 번째는 상대적 분별심이고
두 번째는 착상입니다.
분별심은 흔히 아는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대상과 비교하면 한도 끝도 없이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수행의 방향을 ‘분별 타파’로 정하게 됩니다.
여기서 생각을 관하고, 생각을 버리고, 생각을 멈추고, 생각을 소멸하는
모든 수행이 발생합니다.
결국 생각을 타깃으로 정하면서 생각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이지요.
즉, 상상 속의 깨달음에서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고를 생로병사로 놓으면
집은 분별심으로 이어지지만
고를 진리에 대한 갈애로 놓으면
집은 착상이 됩니다.
착상이란 생각에 달라붙어 있는 의식을 말합니다.
이 얘기는 차원의 설정값에 딱 붙어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고차원 의식을 지향한다면
집은 분별이 아니라 착상으로 봐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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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滅의 진리는 뭘까요?
집을 분별로 놓으면
멸은 분별의 소멸이 되고
집을 착상으로 놓으면
멸은 착상의 소멸이 됩니다.
분별은 마치 늪과 같아서
그것과 다툴수록 점점 더 상상속의 세계에 빠져듭니다.
그래서 깨달음도 상상으로 꾸며내는 것입니다.
반면에 착상을 소멸하려면 이성에 기댈 수밖에 없고
결국 영력의 발달과 더불어
진리적 각성을 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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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道의 진리는 뭘까요?
앞에 멸을 하기 위한 방법이 도입니다.
멸의 대상을 분별로 여긴다면
오늘날 수행자들이 하는 여러 가지 수행법을 두루 하시면 됩니다.
특히 팔정도에서 제시하는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처신
그리고 올바른 정진으로 선정을 추구해 나가시면 됩니다.
하지만 멸의 대상을 착상으로 여긴다면
그런 평범한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팔정도에 나온 것처럼
윤리의식을 함양하는 것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만의 독창적이면서도 우수한 수행법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와 간화선, 그리고 밝달선(存在禪)입니다.
1) 먼저 위빠사나로 차원의 설정값에 의해 착상하는 것을 관합니다.
쉽게 말해 생각에 속지 말라는 뜻입니다.
2) 그리고 간화선으로 제1원인을 화두로 삼아 이성을 궁극으로 끌어올립니다.
3) 마지막으로 밝달선으로 그냥 있는 의식, 또는 존재하는 의식을 회복합니다.
이 3가지 수행법이 도의 진리이고 세존이 세상에 내놓은 불교의 정통 수행법입니다.
실제로 세존은 이 3가지 수행법으로서 무상정등각을 얻었으니까요.
이것이 일명 삼정도이고
여기엔 팔정도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위빠사나로서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을 이루고
제1화두를 참구해 정념과 정근을 이루고
밝달선으로써 정정을 이루게 되니까요.
그래서 진짜 팔정도는 삼정도 안에서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팔정도만 닦으려 한다면
초등학교 윤리공부로 전락하는 것은 물론이고
노자가 말한 무위에도 역행해 실효가 없게 됩니다.
사실 팔정도는 세존께서 다양한 성향의 제자들이
마찰을 빚지 않도록 세운 윤리규정입니다.
이제 수행자들은 선택해야 합니다.
생로병사의 고에서 분별의 집
그리고 분별의 멸을 거쳐
팔정도를 수행할 것인지
아니면 존재의 고에서
착상의 집
그리고 착상의 멸을 거쳐 삼정도를 수행할 것인지를
양자택일해야 합니다.
신앙인들처럼 심리적 만족을 원하느냐?
아니면 학자들처럼 진리적 탐구를 추구하냐에 따라 선택은 갈릴 것입니다.
당신은 진정으로 어떤 수행을 하기를 원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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