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경험에 이름을 붙인다. 언어화가 되면 다음에는 이것으로 생각을 한다.
경험이란 생리적 반응, 감각, 그리고 이미지의 혼합이다. 아직 명명되지 않은 상태, 기분만 존재한다.
여기에 이름이 붙여지면 그것을 통한 생각까지 더해져서 기분은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정서가 된다.
회복을 위한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디.
또 하나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이다. 정서가 아닌 기분에 머무는 것이다.
이름을 붙여 고착화시켜 놓지 않으면 기분을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덜 휘말려들게 된다.
이렇게 보는 것이 마음 공부의 출발점이 된다.//
오늘은 이름 붙이기에 관하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경험을 하게 되면 경험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고 싶어합니다.
언어화라고 하죠.
이 언어화가 되고 나면 즉, 이름이 붙고 나면
그걸 가지고 생각을 합니다. 사고를 정리하고
그리고 언어를 딱 붙이고 나면 정서, 감정이라고 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생각이 감정을 증푹시키기도 하죠.
이렇게 해서 우리의 경험은
언어로 이름표가 붙게 되고
그 이름표를 가지고 생각하고
그리고 정서가 만들어지고, 이렇게 되겠습니다.
그런데 경험이라고 하는 것에 보면 기분이죠, 기분.
기분과 정서는 비슷하지만
정서는 언어화와 사고의 과정을 한겹 더 거친 결과다. 이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기분을 만들어내는 경험의 영역이라고 하는 것은
1) 생리적인 반응일 수 있죠,
호흡, 맥박, 땀이 난다든지, 눈동자가 커진다든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 생리적인 반응이죠.
2) 감각, 외부의 어떤 기류, 공기를 느끼는 거죠.
차다 덥다, 뜨겁다 아니면 분위기가 싸하다, 훈훈하다, 이런 것을 감각하는 것이죠.
3) 이미지, 기억과도 관계가 있겠죠.
내가 한 대 맞았다, 또는 그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눈초리, 이런 것들.
이게 이미지가 되겠습니다.
이런 것들이 생리적 반응과 감각과 이미지가 기분을 만들어내는데
사실은 언어화하기 이전에는 경험이 있고, 경험의 내용들만 있는거죠.
이 내용들이 주는 기분이 있는 거죠.
그런데 그것을 만약에 우리가 이런 상황을 ‘왕따’라고 하는 이름을 붙였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그럼 naming이라고 하고, 그 상황을 스스로 규정한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남이 규정하면 낙인 찍는다. 낙인찍는 거죠.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꼬리표를 단다, 이런 내용도 되겠습니다.
그래서 일단 왕따라고 하는 꼬리표가 붙으면, 낙인 찍히면
사람들과 나는 왕따로 생각하고 거기서 나의 감정, 사람들의 감정은 훨씬 더 증폭되어서 움직이는 것이죠.
이럴 때, 우리의 경험이 언어화 되는데
원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화 되기 전의 경험이라는 것은
생리적 반응, 감각, 이미지 등이 만들어내는 기분에 근거했다.
그런데 그것에 꼬리표를 붙이고 나면
그것이 생각을 만들고 훨씬 더 증폭된 감정인 정서가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증거를, 근거를 한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恨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 않습니까?
우리는 한이 많아, 한이 많아서 한민족이다, 이런 농담도 있을 수 있는데
다른 민족들은 이 한이라는 말을 이름이죠, 언어를 제시했을 때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기기 힘들죠.
왜냐하면 자기들 경험 영역에서 그런 것이 주된 것이 아니었다는 거죠.
그런데 포르투갈에 ‘파두’라고 하는 전통음악이 있지 않습니까? 민요 같은 것인데.
거기에 검은 돛배라는 노래가 있죠.
이 노래는 항구에서 배를 타고 멀리 바다로 떠나는 남편들을 배웅하면서 부르는 노래다.
여자들의 마음을 나타내는 노래다,
이 사람들은 한의 개념을 알고 있잖아요.
즉, 저 먼 바다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그런 사람이 많았을 테고.
그러면 그것은 한이 되는 거죠.
한이라는 단어가 없어도 한이라는 개념을 들었을 때, 느낌이 오는 거죠.
충분히 공존할 수 있고, 그것도 상당히 오래된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공명할 수 이는 거죠. 공감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이름은 경험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경험이 단어, 언어를 이해하게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나비와 나방을 구분하지 않습니까?
“저 불나방처럼 뛰어든다” 이런 표현을 쓰죠.
꽃과 나비, 이쪽은 좀 좋게 씁니다.
나비와 나방은 구분해서 쓰는데요, 프랑스 같은 경우는 나비와 나방을 구분하는 단어가 없다고 합니다.
그냥 둘 다 나비라는 개념의 ‘빠피용’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언어가 다르니까 다른 정서를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방법이 있어야 하겠죠.
우리는 “꽃과 나비가 서로 날아들고” 이런 표현과
“불나방처럼 불에 뛰어든다”하는 그 표현은
이 언어로는 빠피용이라는 언어로는 안 되는 것이죠.
/경험이 없으면 언어가 없다.
언어가 없으면 정서도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또 무상이나 苦같은 것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공의 개념인데
이것도 다른 사람이 들을 때는 관심도 없고 느낌도 없을 수 있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유대인 중에 불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눈푸른 스님들 중에는 유대인의 비율이 굉장히 높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경전에 대한 번역도 유대인 스님들이 주도가 되어서 많이 했습니다.
세계적인 영성가인 잭 콘필드 같은 사람도 유대인입니다.
이건 다 상좌로부터 이어받은 명상가인데요
유대인들은 무상하다, 괴롭다하는 것을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겁니다.
공감을 할 수 있는 거죠.
유대인들 중에는 불교로 개종하는 사람들도 많고 스님들도 많고, 그렇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경험은 반드시 경험이 반복되고 사회적인 경험이 되면 언어화가 된다.
언어을 가지고 우리는 생각을 하고
이 언어와 생각이 생리적 감각적 이미지적인 기분보다 훨씬 더 지속적이고 구조화 된 정서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언어가 얼마만큼, 언어화, 이름 붙이기가 얼마만큼 중요하냐?
특히 우리의 감정에,
이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죠.
우리는 마음공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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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혹은 정서를 회복하는 방법이 뭘까?
이것은 2가지가 있는데
1) 극복
내가 뭐, 싸움을 잘하든지 이렇게 해서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이 상황을 생리적으로 감각적으로 이미지적으로 굉장히 좋은 방향으로 경험의 내용을 바꾸어서
기분과 정서를 좋게 한다.
그러면 이건 당연히 회복, 극복되는 거죠.
극복해 내는 것이 진정한 회복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항상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겠죠.
확률이 높지 않습니다.
그럼 그동안 이런 나쁜 기분과 나쁜 정서에 의해서 파괴당해야 하느냐?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뭐냐하면
2) 이름 붙이지 않기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정서가 안 된다고 그랬죠.
구조화 된 정서에 머무르지 않고 기분에 머무르기.
기분이라고 하는 것은 생리적 반응이거나 감각이거나 이미지인데
기분은 가만히 놔두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멸한다.
기분은 생멸한다.
이렇게 사라졌다가 생겼다가 한다는 거죠.
이 기분이 생멸한다고 하는 것을 아는 순간에
우리는 이것이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이게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음 순간에는 다르게 된다.
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우리의 기분은 정서는 훨씬 경감될 수 있다. 회복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나는 끝났어”
“나는 실패했어”
“나는 루저야”
이렇게 스스로를 낙인찍는 순간에
그것에 수십 수백 배의 생각과 언어의 힘이 나의 정서를 고착시켜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빠져나오기가 매우 힘듭니다.
이름 붙이지 않고
기분의 상태, 생리와 감각과 이미지의 상태
그 상태에 버티고 계시면 그것은 또 다르게 바뀌고 사라진다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걸 아는 것이 마음공부의 출발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름 붙이기에 관해서
정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한번 알아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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