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들이 추구하는 목적지가 어디일까요?
그건 바로 열반입니다.
열반이란 번뇌망상이 소멸되어 지극히 청정한 의식의 경지를 말합니다.
이런 열반에 이르려면 무조건 통과해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해탈입니다.
해탈이 되지 않고 열반에 이르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럼 해탈이란 도대체 어떤 상태를 말할까요?
해탈이란 쉽게 말해 '대상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대상이란 외계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에 이 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착을 끊어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우면 그것이 해탈입니다.
아비담마에서는 해탈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14가지의 예를 들어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자유
비양심에서 벗어난 자유
몰수치심에서 벗어난 자유
흥분에서 벗어난 자유
탐욕에서 벗어난 자유
사견에서 벗어난 자유
자만에서 벗어난 자유
성냄에서 벗어난 자유
질투에서 벗어난 자유
인색에서 벗어난 자유
후회에서 벗어난 자유
나태함에서 벗어난 자유
혼침에서 벗어난 자유
의심에서 벗어난 자유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해탈의 사례를 찾자면 끝없이 나옵니다.
그래서 해탈을 한 문장으로 줄여
'어떤 관념이나 생각으로부터 풀려나 자유롭게 된 의식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착도 생겨나지 않는 완전한 해탈에 이르면
정말로 해탈한 것이 맞을까요?
완전한 해탈의 상태가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제 어떤 외계의 대상에 대한 얽매임이 없어 사사무애事事無 得한 경지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진리나 지혜를 비롯해서 '나'에 대한 애착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음의 안팎으로 일모의 착도 남아있지 않으니 완전무결한 해탈이 맞긴 맞습니다.
그러면 정말로 이것이 해탈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 해탈하지 않은 것이 하나 남아있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바로 해탈입니다.
지금 해탈의 상태에 매여 있지 않나요?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는 해탈하였지만
해탈 자체에서는 자유로워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해탈에서도 벗어나야 진짜 해탈일 것입니다.
물론 해탈 상태에 있는 의식은 이런 걸림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더라도 외부적으로 봤을 때는 해탈에 걸려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해탈마저도 해탈해 진짜 해탈이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해탈마저 해탈했으니 정말로 해탈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해탈마저 해탈한 '탈脫 해탈의 상태에서도 벗어나 자유로워야 합니다.
이렇게 반복하면 '탈脫의 무한대 해탈'이 됩니다.
해탈을 무한히 해탈해야 하고
결국 영원히 해탈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싯다르타가 브라만교의 해탈을 경험하고
그것이 해탈이 아니라고 본 이유입니다.
모든 착을 끊어 자유로워진 상태'라는 것은 사실상 해탈이 아니라
그건 그냥 해탈의 꿈이라는 것입니다.
해탈하여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정한 해탈을 원한다면
해탈을 해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꿈만 무한히 반복하는 결과만 초래하니까요.
그렇다면 진짜 해탈을 하려면 어떻게 할까요?
여기에 대해 예수님이 명확히 답을 내렸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2~36절>
이 얘기는 해탈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아는 길 외에는 없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알아야 해탈이 되지, 마음을 비워 해탈하려면
해탈이 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럼에도 수천 년 동안 거의 모든 수행자들이
着을 끊어서 해탈하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물론 착을 끊어 전체의식을 회복하는 것이
진리를 깨우치는데 도움이 되는 건 맞습니다.
가령 부산에서 서울에 갈 때 대전에 이르는 것은
분명 서울로 가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수행자들은 대전을 목적지로 알고 그곳에 멈추고 맙니다.
대전만 가면 깨달았다고 하고 그곳에 눌러앉는 것이지요.
이는 애초부터 서울이 어딘지 모르고 막연히 그 이름만 들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수행자들은 대전 정도만 올라오면
그곳이 서울인 줄 착각하고 안주하게 됩니다.
여기에 경종을 울리며 기치를 올린 것이 불교입니다.
싯다르타는 브라만교의 어설픈 깨달음을 부정하며
무상정등각無上正等을 들고 나왔습니다.
무상정등각이라는 표현 자체가
기존의 깨달음과의 차별성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가령 '진짜 참기름이라고 강조하면
기존의 다른 참기름은 진짜에 못 미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무상정등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최상의 지혜라는 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바라밀을 더 명확히 표현하면
'진리적 자각'입니다.
정리하면, 진리적 자각을 얻으면
무상정등각이라는 서울(깨달음)에 도착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예수가 말한 ‘진리적 자유’와 세존의 ‘진리적 자각’은 부절이 합하듯 꼭 들어맞습니다.
하지만 수행자들은 이런 얘기는 귓등으로 흘리고
오로지 힌두교가 깃발을 꽂고 있는 대전에서 해탈의 만족을 얻고 있습니다.
아무튼 해탈해선 해탈할 수 없습니다.
해탈은 무한 반복하는 뫼비우스의 늪에 빠져 있으니까요.
오로지 진리만이 해탈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해탈이 곧 자유이고
진리만이 그 자유를 우리에게 선사할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着을 끊어 해탈하면
해탈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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