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선과 깨달음, 말문을 막더라도

Buddhastudy 2024. 12. 30. 19:18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길()입니까?”

담 너머에 있다.”

그것을 묻는 게 아닙니다.”

무슨 도를 물었느냐?”

큰 도 말입니다.”

큰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

 

중국어 성경 요한복음을 보면

태초에 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태초유도, 도여, 신동재, 도취시신

개혁 한글판과 비교하면 뜻이 좀 분명해집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한국어 성경의 말씀이라고 한 것을

도라고 번역했네요.

중국어의 도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존귀한 도를 물었더니

담장 밖에 있지 않느냐고 대답한 겁니다.

그걸 물은 것이 아니라고 해도

끝까지 길 이야기만 합니다.

큰 길은 죄다 장안

즉 서울로 통한다.

 

부처가 뭐냐고 물었으면 답이 달랐을까요?

아마 이렇게 대답했겠죠.

법당에 앉아 계신다.”

똑같은 문법으로

그 부처를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다면

답은 또 어땠을까요?

열반하신지 오래되었다.”

 

이런 대답들은 장난스럽게 들립니다.

농담으로 놀리는 것처럼 보이죠.

 

우리가 글자로 이해하는 상황과 실제 상황은

좀 다를 수 있습니다.

물어보는 스님의 말투와 표정을 보고

조금 다른 수준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는 대답하는 스승이

질문하는 스님의 상태를 아주 문밖이라고 판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냥 말뜻을 가지고 대답을 피하죠.

물론 스님 스스로도

그걸 물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뜻으로 달려가 버렸습니다.

 

만약에 스님이 조금 문 가까이 있었다면

첫 대답에서 다시 묻는 내용이 달라졌을 겁니다.

 

담장 안에 지금 걷는 이 길은 어떠합니까?”

또는 소승이 직접 걸어 당도해야 할 길을 묻습니다.”

 

제자가 묻는 상태를 보아하니

질문의 의도 자체가 틀렸다는 걸

스승이 본 것입니다.

너는 지금 도가 무엇인지 따위를 물을 상태와 수준이 아니다.

어쩌면 말뜻도 모른다고 봐야지

그래서 담장 넘어 오솔길 아니면

서울 가는 길을 일러주는 것이니 알아듣거라.”

 

시쳇말로 이렇게 개무시를 당하면

기분이 좋을 리 없겠지만

이런 상황은 공부하면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자신의 경계이고 의식 수준입니다.

진지한 제자라면

스승이 왜 나를 무시하는지 살피는 것도 공부입니다.

 

큰 도를 묻는 자신이

일종의 자기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이런 경우도 공부가 되겠습니다.

도에 크고 작고가 어디 있습니까?

자존심이 상하고 선생 탓을 한다면

이 시간은 낭비가 됩니다.

 

어떤 것이 부처님들이 다 비추지 못한 곳입니까?”

산에 있는 귀신 굴속을 물어서 무엇하겠는가?”

비춘 뒤엔 어떠합니까?”

에잇, 요괴로구나.”

 

산을 오르는 길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정상에 올라서 보면 모두 오르는 길입니다.

주어진 길이 바위투성이로 거칠 수도 있고

부드러운 능선으로 수월할 수도 있죠.

그것은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주어진 조건이겠죠.

 

그러나 조건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조건 자체를 더 어렵게도 쉽게도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일어날 일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한 생각을 바꾸면 바위가 흙으로 바뀝니다.

 

선 수행의 여러 요체들이 있지만 결국은

말과 글, 의미가 가리키는 마음, 의식의 상태를

자신에게 직접 적용해서 느껴보는 것입니다.

실제 자체가 아닌 말과 글에서 못 벗어나

생각과 이해로만 따지는 그 버릇에서 뛰쳐나와야 합니다.

 

이런 관조 능력은 타고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영화관에 살기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영상을 비추는 영상의 빛과 스크린이 있다는 것을

그 아이는 알지 못합니다.

아이가 아는 것은 시네마 천국

영화 장면에 나온 영사기와 스크린일 뿐

자신이 처한 상황이 아닙니다.

 

선 공부의 좋은 점은

영화 너머의 스크린을 직접 보도록 하는 것이지만

영화 안에서 스크린을 봤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이 공부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스크린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스승은 눈높이를 맞춰야 합니다.

 

바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

저 시냇물 소리를 듣는가?”

듣습니다”.

그것이 그대가 바로 들어갈 곳이니라.”

 

진리가 무엇입니까?”

비가 오는구나

염화미소가 무엇입니까?”

우산을 들어라.”

 

성령의 술에 취하려면

우선 술을 빚어야 합니다.

쌀을 씻고, 누룩을 얹고, 술이 익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발효라는 과정은

사람에 따라 고통스럽습니다.

 

선문답이 이루어지는 장면들은 매우 극적이지만

저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익어야 합니다.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제게 의심이 있을 때는 어찌 합니까?”

큰일이냐? 작은 일이냐?”

큰일입니다.”

큰일이라면 동북쪽에서 보고

작은 일이라면 승당 뒤에서 보라.”

 

한 치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마음에 쌓인 찌꺼기를

거대한 진리를 갈구하는 재료로 여기게 되면

그 술병에는 무엇을 부어도 상한 술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 큰일에 비한다면

차라리 소변보는 일이 더 큰 일입니다.

 

무엇이 급한 일인지 스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오줌 누는 일이 작은 일이긴 하나

내가 몸속 가야만 되는 일이다.”

 

신광불매 만고휘유 神光不昧 萬古輝猷

신령한 밝은 광명은 영원토록 빛나리니

입차문래 막존지해 入此門內 莫存知解

이 문에 들어서면 일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대중이 좌정해 있으니 대사가 단상에 올라

중 하나를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대중들은 이 중에게 절을 하라.”

또 말하기를

이 중에게 무슨 점이 있기에 대중들을 보고

이 중에게 절을 하라 했겠는가?”
대중은 대답이 없었다.

 

지난번에는 돌기둥에 절을 하시더니

이제는 저희에게 돌기둥이 되라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