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신지학 같은 오컬트 분위기를 조성해도
“도대체 지금의 나처럼
이렇게 진리에 무지하고 어리석고 천박한 사람이
스스로 인생 계획을 짠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차라리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는 편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지학 이야기로 시작한 것은
너무 엄격한 뉘앙스를 풍기는 불교에 비해
좀 틈이 있게 이야기하고 싶은 이유도 있었습니다.
이참에 좀 격이 없이 이야기를 해보죠.
모든 일들이
각자의 카르마의 제한 내에서 일어나도록 계획돼 있습니다.
그래서 마하리시는 말합니다.
“지금 나의 모든 고통과 슬픔, 기쁨, 성공, 실패는
모두 과거 어의의 결과,
즉 전생의 결과입니다.”
더 세밀하게는 마하리시는
“어떤 사람이 부채를 집어들면서
그 행위가 자기가 태어난 순간부터 정해진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렇습니다.
그것은 정해진 일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카르마를
무거운 업장을 지고 태어나는 보복의 기능으로 느낍니다.
아무리 균형 성장을 이야기해도
내 일상이 내 마음대로 잘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 고통을 선의로 해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행의 관점에서는
그래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케세라세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곧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 뜻대로”라는 박티 요가의 신조이며
불교 방하착의 의미입니다.
내 의지가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오쇼는 말합니다.
“이생의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이 한마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통에서 구했는지 모른다.”
방하착을 조금 더 넓혀보면
그것은 차라리 자유입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
저 들판의 백합화를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도 아니한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거두지도 않는다.”
이 경구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안토니 드 멜로라는 카톨릭 예수의 사제에게
깨달음의 경험을 정의해 달라고 청하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깨달음이란
필연의 운명에 절대적으로 협조하는 것입니다.”
마하리시의 제자인 안나 말라이 스와미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대가 외부적 사건들에 대해 걱정해 봐야 소용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런 정해진 행위들에 대해
아무런 통제권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생에서 그대는
자기가 누구인지 깨닫는 것이지
그대의 인생 각본을 새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자 그렇다면 인생을 각본대로 산다는 것이
무작정 그렇게 따라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좀 진지하게 정리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없는지
각본대로 살면서 우리는 지금 이 현실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안나 말라이 스와미는 말합니다.
“라마나 마하리시께서는 언젠가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의 모든 행위는 예정되어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권은
육체와 동일시할 것이냐? 진화와 동일시할 것이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선택의 자유는 오로지 진하냐 아니냐 뿐이다”
저는 집에서 채소 담당이라
파 마늘, 양파, 담근 무를 언제든 조리할 수 있도록
잘 다듬어 놓는 것은 제 몫입니다.
만약 내가 지금 양파를 까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각본 속에 있었으므로
아무리 싫다 좋다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투덜투덜해도 결국은 그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신과 싸우는 일이어서 전혀 승산이 없습니다.
그래서 양파를 까느냐 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죠.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즐겁게 양파를 까느냐?
아니면 신과 싸우는 전혀 승산이 없는 게임을 하면서 계속 투덜거리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누가 말했듯
“당신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 공헌하고 싶다면
우선 당신의 그 불평불만이나 그만두라”는 말처럼 말이죠.
달리 말하면 좋다 싫다는 생각의 내용물에 매몰되어서
그런 자기 생각에 갇혀 있든지
아니면 깨어서 그런 생각에 빠지지 않을 것인지만이 유일한 선택지입니다.
그것이 바로 실질적인 수행이기도 합니다.
마하리시의 말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오로지
“진아냐 아니냐” 뿐인데,
그것은 다른 말로는 “생각이냐 깨어 있음이냐” 하는 선택지이고
또한 “에고냐 성령이냐” 하고 묻는 뜻입니다.
좀 더 확장하면
모두가 같이 겪을 공업을 포함한 나의 각본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통해 신의 결재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전체를 위한 최선의 길이며
신의 섭리이자 계획입니다.
신의 뜻은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변경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 뜻대로”이고,
바로 그것이 에고의 소멸로 가는 길이며
거기에서 내 뜻은 없고 내 안의 하느님이 살게 됩니다.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고통은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스스로 짠 각본대로 일어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좋고 싫음이고 탐진치입니다.
신심명은 이렇게 이릅니다.
단막증애 통연명백
단지 싫어하고 좋아하는 마음만 없으면
툭 트여 명백하리라
도모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결과는 하느님의 소관입니다.
우연히 같을 수는 있어도
결과는 내 뜻대로가 아닙니다.
그런데 에고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의견이 다른 정도만으로도 상황을 부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하느님 소관입니다.
바가바드 기타의 핵심 가르침은
행위의 결과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느님의 뜻이기에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각본대로 일어남으로
끌려가지 않고
그저 깨어서 바라보는 것이 수행이고
곧 중도 초월입니다.
신지학 협회 소속 여성 3명이
마하리시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신의 전체 계획, 설계는 정말 훌륭합니까?”
“그 설계도는 정말 훌륭합니다.
잘못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들의 잘못을 바로잡으면
전체의 계획은 올바르게 됩니다.
지난 몇십 년 동안 매우 신뢰할 만한 학자들이
환생에 관한 진지한 연구에서
매우 괄목할 만한 증거들을 쌓아 올렸고
그들의 수는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사실에 대해 관심의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책의 출판 당시
토론토 대학 의과대학 정신과 조교수인, 조일 휘튼 박사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인데
사람들이 무의식 속에서
자신에 관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최면술을 동원했고
최면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들의 90%가
이런 기록을 되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이 내용은 홀로그램 우주에 자세히 묘사돼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삶의 목적은 이렇습니다.
깨우치고 진화해 가는 것이며
여러분의 삶이 이런 과정을 촉진시킨다는 것이죠.
그들은 전생에서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들에게
보상할 기회를 주기 위해
그들과 함께 태어나기를 선택했고
어떤 여성은 37살에 강간을 당함으로써
그녀의 영혼을 송두리째 변화시켜
인생의 의미를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하게끔 하기 위해
그런 일을 스스로 각본에 넣어 계획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도 했습니다.
실험을 통해 그는
흔히 전생에 알고 지냈던 사람들과 함께 환생하며
그러한 우리의 선택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힘은
대개 애정이나 죄책감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처하는 물질적인 환경은
생에 따라서 크게 달라질 수 있지만
그의 도덕성, 관심사, 소질, 태도 등은
동일하게 남아 있음도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인생 각본과 관련이 있는 그곳의 빛의 존재들이 강조하는 점은
첫째는 사랑이며
두 번째는 지식인데
특히 자기 성장이나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지식을 추구하라고 터놓고 충고했으며
배움은 끊임없는 과정이어서
사후에까지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휘튼 박사는 말하기를
그 빛의 존재들이라는 이들은
자신의 피험자들을 통해 느낀 인상으로 보면
지상에서의 윤회를 끝마친 존재들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수시로
높은 지위와 엄청난 부를 소유한 사람들의 갑질을
언론을 통해서 접합니다.
좀 터놓고 말하면
그들은 그런 인생 각본을 짜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카르마가 허락했기에 그러는 것이죠.
그들은 최근의 여러 생 동안
그런 부자로 살았을 수도 있고
거꾸로 아주 가난하게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부자로서 또는 가난한 자로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는 깨우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놓고 말하자면
그들은 그간의 몇 생을 부자로 살아오면서도
우월감과 교만함만 계속 늘어났지
겸허함은 배우지 못했고
따라서 다음 생에는
스스로 자신을 심판해
남들에게 당하는 입장인 을의 처지로 각본을 짜고
각본대로 을로서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큽니다.
당하는 입장을 직접 경험하고 느끼면서
한없는 눈물을 흘린 뒤에야
비로소 을의 입장이 눈에 들어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켄 윌버가 말하는 ‘타인의 조망’이자
역지사지 경험의 균형을 통한 성장인 셈입니다.
마찬가지로 지난 몇 생 동안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아서
가난이 뭔지 그 서러움과 고통을 처절하게 경험하고 느낀 사람이라면
그는 이제 가난한 자로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가난에서 배울 것은 이미 다 배웠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들의 진보, 성숙, 즉 의식의 성장은
일직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완전한 합일 전까지는
온갖 상승과 하강을 그리면서 진행되기에
입장은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습니다.
켄 윌버는 합일까지의 전체 과정에서
완만히 상승하는 나선형 곡선을 그린다고 설명합니다.
윤회와 환생은
재미난 드라마의 소재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만 하면
우리 삶에 커다란 자유를 주는 원리입니다.
또한 그것은 무엇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
무엇을 성장시켜 깨달음으로 향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다용도, 만능의 스켈레톤 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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