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학은 19세기에 헬레나 블라바츠키를 중심으로 설립된
신지학협회에서 비롯된
밀교, 신비주의적인 사상, 철학 체계입니다.
알려진 것이 많지는 않고
오늘날 뉴에이지의 원조 정도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종교적 도그마를 몇 개의 기본 진리로 정리하는데
그것이 신지학의 세 가지 근본 원리입니다.
첫째는 모든 것들의 근본 원인인 유일, 무한의 원리가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카르마의 균형이며
셋째는 존재의 진화 발달입니다.
신지학은 서구 철학에서는 보기 드물게
카르마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점이 특이합니다.
I AM THAT 채널은
존재와 인식 편에서 윤회를 다루었는데
윤회적 세계관은 서구적 세계관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관점이어서
존재론에서 다루어도 무방했지만
차분한 이해가 필요한 내용이 많아 조금 뒤로 미룬 것이었고
앞으로는 자주 다루도록 할 예정입니다.
신지학에서는 카르마의 원리를
자연 안에 존재하는 되풀이되는 순환법칙으로서
깨진 균형을 회복하려는 끊임없는 흐름이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좀 더 인용해 보죠.
카르마는 우리의 도덕성에 적용되는 법칙이며
윤리적인 인과법칙이고
정의와 상벌의 법칙이며
탄생과 재탄생의 원인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단지 원인에 따라 발생하는 결과이고
작용과 반작용이며
모든 생각과 행동의 결과입니다.
카르마는 문자상으로 행위를 의미합니다.
신지학에서는 우주를 지성을 가진 전체로 보기 때문에
우주 안에서의 모든 움직임은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이며
이 결과는 또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행동하고
좋건 나쁘건 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며
우리들이 필연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반응은
결국 우리가 스스로 야기한 원인들로부터 발생하는 것이죠.
절대정의와 자유의지의 개념도
여기서 도출된다고 할 수 있는데요.
이것은 우리 자신과 세상의 현실을 냉정히 볼 때
궁금한 내용입니다.
의식에 대해서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의식수준이 다르고 차이가 난다는 사실은
이미 심리학에서 입증되었지만
왜 그런지에 대한 이해는 다른 문제입니다.
누구는 잘 참으며 온화하고
누구는 왜 잘 참지 못하고 불같은가?
왜 사람마다 그렇게 성격이 다른가?
그런 건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또한 물질적 환경은 사람마다 왜 또 그리 다른가?
왜 누구는 오지에서 기아와 극빈으로 고통받는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 고생을 하고
누구는 왜 부잣집에서 태어나 잘만 사는가?
악한 사람이 잘 살고 선한 사람이 못 사는 경우는 왜 그리 많은가?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왜 나는 이런 환경에서 이렇게 사는가?
왜 저 사람은 저런 환경에서 저렇게 사는가?
왜 이런 차이가 나는가?
왜 누구는 실패하고 누구는 성공하는가?
왜 이렇게 잔혹한 악과 전쟁과 범죄가 끊일 날이 없는가?
인류 역사 이래로 셀 수 없이 많은 의문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 불평등과 서로 다름은
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종교는 이 모든 것을 신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신이 어찌 그럴 수 있는가?
그렇다면 신이 없는 이만 못하지 않는가?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고, 부도 직전에 회생하며, 치명적인 암에서 살아남을 때
감사의 기도를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왜 애초에 신은 그런 시련을 주었는가?
하는 의문이죠.
이 세상은 이와 같이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설명할 수 없는 일로 가득해 보입니다.
과연 정의라는 것은 있는 것인지
그런 모든 것이 신의 책임인지 아니면 내 책임인지
나에게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는지
이런 의문들입니다.
우리가 절대정의와 자유의지의 핵심이라고 부르는
신지학 두 번째 원리는
환생, 윤회를 포함한 카르마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풀어서 이야기해 보죠.
우리가 제기한 의문들은
한 번의 생애만을 가지고는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윤회의 법칙은
내가 수많은 윤회를 거쳐
신에게 합일하는 전체 과정에 기초한 법칙입니다.
비단 신지학만이 아니라 많은 종교 전통에서 말하듯
탕자는 자신의 요구로 아버지의 재산을 분배받아
세상으로 나와 여러 가지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결국 굶어 죽을 지경이 되자
돼지우리에서 돼지를 치다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탕자가 겪는 그 하나하나의 사건이
바로 우리의 한 생입니다.
우리가 연기해서 이 세상에 올 때마다
우리는 거기서 매번 인생 계획을 미리 짭니다.
무슨 직업을 갖고, 누구와 결혼하고, 몇 명의 자녀를 낳고, 병에 걸리는 것도 넣고
배반당하기도 하고
피겨퀸 김연아처럼 세계적인 스타가 되는 것도 넣고,
콜롬버스처럼 신대륙을 발견하는 것도 넣습니다.
그리고 언제 죽을 것까지도.
모든 관련 당사자는 미리 합의하며
따라서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부분은 없고
그래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합니다.
우주 컴퓨터에게 이런 정도는 1+1=2 정도의 연산 문제일 뿐이어서
복잡한 일도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3미터짜리 목줄을 맨 개와 산책할 때
개의 행동반경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그 범위 내에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의 범위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한 번의 일생의 조유한 줄거리는
이미 윤곽이 잡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줄의 범위가 자유의 영역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자기 인생을 계획한다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지의 의미입니다.
다만 신지학의 제2원리에 따르면
우리가 인생 각본을 짤 때 카르마의 제안을 받습니다.
쉽게 말해
세세생생 인색하게 굴며 가식적으로 살던 사람이
다음 생에서 거부로 또 존경받으며 사는 각본을 짠다면
당연히 거부됩니다.
카르마는 균형을 잡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었나니”라는 표현이나
도덕경의
“하늘의 그물은 넓고 성기나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는 표현이
바로 그 부분을 설명합니다.
누적된 생에서 쌓인 개인 자신의 총체적인 역량에 의해서
다음 생의 선택권이 제한을 받는 것입니다.
신은 일체 관여나 개입하지 않으며 지켜볼 뿐입니다.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 국가, 행성 수준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을 불교에서는 공통의 업, 공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생 각본을 짤 때의 기준은 무엇이고
각본대로 산다면 각본은 왜 필요하고
각본대로 산다는 것의 의미는 뭘까요?
석가세존은 현실의 괴로움을 해결하지 못하는 도가 있다면
그것은 참된 도가 아니며,
참된 도라면 그 도를 수행하고자 하는 누구라 하더라도
바르게 도를 수행하면
괴로움의 소멸을
지금 여기서 맛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지향점을 가지고
신지학의 제2법칙인 윤회가
어떻게 절대적 정의에 부합하는지를 보도록 하죠.
인생의 각본을 짜는 목표와 기준은
신지학의 관점에서
크게는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한 영적 성장입니다.
자신의 성숙과 진화
즉 존재 수준의 향상입니다.
이와 관련된 성경의 교훈에
“있는 자는 더 많이 받을 것이오
없는 자는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숙할수록 조건이 더 좋아져서
진화가 가속되고
뒤쳐질수록 장애가 많아서 더 늦어지는
성숙과 진화의 한 면을 말해줍니다.
역설처럼 보이지만
성장의 법칙에는 정상입니다.
성숙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선과 악, 옳고 그름, 고통과 환희 등의 이원성을 넘어서
비이원, 합일로 향하는 것인데
그것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서는 넘어서기 어렵고
양자가 균형을 이루어야
비로소 위로 솟아오를 수 있습니다.
이원성의 대표격인
선과 악조차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성숙의 조건이 끊임없이 선을 선택하고자 하는 선악의 투쟁을 통해
자기 중심성과 에고를 감소, 약화시키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악이라는 것이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며
그것은 우주 창조의 원리 중 하나인 것이죠.
이것도 거의 모든 경전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불교의 쌍생쌍멸
오쇼가 말하는 “성인이 하나 태어나면 동시에 악인도 하나 태어난다”는 물론이고
양명학에서는 역설로 “착한 일을 하지 마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과 분쟁을 주러 왔다고 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해 십자가가 균형을 이루는 중간 지점에서야
비로소 새로 막대기를 통해 위로 갈 수 있으며
이것이 불가에서 말하는 양변을 여의는 수준입니다.
선과 악의 이원성을 넘어서서
비이원으로 진입하면
차별에 대한 틀이 사라지면서
모든 것이 나로 느껴지는데
거기서는 그전까지 악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다른 관점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이르러서 보면
카르마 업은
복수나 인과 응보의 개념이 아니라
경험의 균형이자 오히려 해방의 개념입니다.
카르마를 청산하면
나라는 생각 덩어리가 해체되면서
에고가 사라지고 슬프만 남아 합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스스로를 묻고 있던
믿음, 관념, 판단, 의견, 인상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깨끗한 자가 되어
하느님을 보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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