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3)

법륜스님의 하루_ 이 분은 한국 불교의 중흥조이자 민족 독립운동가입니다. (2023.06.25.)

Buddhastudy 2023. 10. 11. 20:04

 

 

 

오늘은 근세 한국 불교의 중흥조이시고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이시며

독립운동의 막후 기둥이셨던

백용성 조사님의 탄생 15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내년이면 160주년이 되기 때문에

일만 명이 모여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며

대한민국의 국운 융창을 발원하는 대법회를 열려고 합니다.

 

 

-어려운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키워간 어린 시절-

용성조사님은 1864년 이곳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탄생하셨습니다.

14살에 남원 덕밀암에 계시는 혜월 선사를 은사로 출가를 하시고

스승의 지도로 전국을 다니시면서 선정을 닦는데 집중을 하셨습니다.

용성조사님의 스승이신 혜월 선사는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 선생과 깊은 인연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최제우 선생이 동학을 창시하고 법을 선포하자

많은 사람이 따랐지만

감영에서는 불온한 이야기를 한다고 체포를 했습니다.

다행히 초기였기 때문에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고

이후 최제우 선생은

법은 동쪽에서 이루었지만, 법을 펴는 것은 서쪽으로 가야겠구나하고

경주를 떠나서 전라도 남원으로 왔고

덕밀암을 찾아가서 혜월 선사에게 방을 하나 빌려서 1년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곳에서 동학의 많은 사상을 정립하고 저술했습니다.

그리고 경주로 돌아가 법을 전파하다가 체포되어

혹세무민(惑世誣民) 한다는 죄목으로 순교를 하셨습니다.

최제우 선생의 신상을 숨겨줬다고 해서

혜월 선사는 승적이 말소되고, 가택연금을 당했습니다.

그런 때에 용성조사님이 그곳으로 찾아가서

그분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혜월 선사와 최제우 선생은

선천시대는 왕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시대였지만

후천시대에는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얘기를

서로 교감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사람이 곧 하늘이다하는 가르침을 편 것이 동학이었기 때문에

동학은 조선왕조에서 많은 탄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영향을 받아서 용성조사님은

어릴 때부터 민족사관이 또렷했고

어려운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자비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혼란기에 그분은 세상에 관여하지 않으시고

줄곧 수행 정진하셔서 도를 이루셨습니다.

그 도를 완전히 자기화하기 위해 오랜 기간 보림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 선방의 조실이 되셔서 많은 제자들에게 그 가르침을 전수하셨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와 평생 동안 나라의 독립을 향해-

그러나 그분도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나라가 사실상 일본에 빼앗긴 상황에서

더 이상 수도만 하거나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세상으로 나오셨습니다.

 

먼저 중국으로 건너가서

나라가 실질적으로 멸망하면

임시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하셔서

상해에 임시정부를 마련할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겉으로는 중국의 고승들과 대담을 나눈다는 형식을 갖추었지만

실제로는 임시정부를 구성할 기반을 갖추는 일을 하셨습니다.

 

1910년에 한일 합병이 강제되자

용성조사님은 서울로 올라오셔서 종로의 가정집을 사서

대각사라는 절을 창건하시고,

지금의 서초동 우면산에 위치한

백제불교 초전법륜 성지인 대성초당에 은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전국을 다니시면서

옛날에 정승을 했거나 육판서를 했거나, 8도 감사를 했거나, 고을의 사또를 한

조선왕조 관리들을 찾아가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당신들은 그동안 나라의 녹을 먹고 잘 살지 않았냐.

이제 나라를 빼앗겼으니

여러분들이 나라를 되찾는 일에 나서 달라.

직접 참여하지 못하면 재정을 지원해 달라.’

 

6년을 전국으로 다니시면서 설득하셨는데

모든 사람이 지금은 때가 아니다하며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라도 남원 땅에 사는 만석꾼 임동수 거사만이

용성조사님의 제안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동참을 했다고 합니다.

그분의 후원을 받아서 종로 대각사를 창건하고

새로운 불교를 홍보하는데 힘쓰는 한편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손병희 천도교 교주를 만나서

나라의 독립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손병희 교주가 사실은 천도교에서

이미 은밀히 독립을 선언할 준비를 하고 있다라고 해서

두 분은 의기투합을 하게 됩니다.

 

스승과 스승 사이에서는 최제우 선생과 혜월 선사가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며 협력을 했고

대를 이어서 손병희 교주와 용성조사님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서로 은밀히 협력을 하게 된 겁니다.

이렇게 해서 천도교가 중심이 되고

불교와 기독교가 함께 협력하여

3.1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지도급 인사라고 하는 관료 출신들은

아무도 독립운동에 뜻이 없었고

일반 백성들은 먹고살기 급급해서 독립운동에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용성조사님은 천도교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중심이 돼서

3.1 운동을 주도하게 하였고

당시의 젊은 학생들이 광범위하게 이 운동에 호응하면서

3.1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당시에 우리나라 인구가 2천만 명 정도였는데

2백만 명이 참여했다는 것은

일제의 무력탄압에도 불구하고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낸

엄청난 성과였습니다.

 

이것은 중국에도 영향을 주어서 5.4 운동이 되고

베트남과 인도에도 영향을 주고

멀리는 이집트까지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타고르는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불이라고 찬미했습니다.

 

이렇게 3.1 운동에 참여한 이유로

용성조사님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국가보안법 혐의를 받고

6개월의 조사와 16개월의 형을 받아서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출옥을 하게 되어 나오니까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을 받은 제자들이

종로 대각사를 팔아버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민간인 집에 은거하면서

후원자들의 협조를 얻어서 다시 대각사 창건을 하셨습니다.

 

당시 기존의 불교는 대부분이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을 했기 때문에

불교라는 이름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셔서

아예 새로운 이름인 대각교를 창시하셨습니다.

 

()이란

대각(大覺), 즉 크게 깨달은 자라는 뜻입니다.

인도 말로 번역하면 마하보디입니다.

그래서 계율을 바로 세우고, 법을 전하고, 경전을 번역하고,

올바르게 수행하는 재가 수행자들의 길을 여는 등

불교를 바로 세우는 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이유-

또 한편으로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여러 지원 활동을 은밀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불교가 그래도 국민에게 조금이라도 체면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은

용성조사님께서 3.1 운동에 참여하셨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대부분의 불교는 친일 행각을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불교 입장에서는 친일 행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조 500년간 너무 탄압만 받았는데

일제 강점기에 와서 일본이 불교를 약간 옹호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협조하면

불교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불교의 발전과 자신의 안위만 생각했지

나라를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백성을 어떻게 편안하게 할 것인가?’ 하는

큰 안목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용성조사가 계시지 않았다면

한국 불교는 해방 이후에 부끄러워서 얼굴도 제대로 들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렇게 용성조사님은

불교의 발전만을 위한 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일을 함께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불교의 중흥조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라고도 볼 수 있는 겁니다.

 

안타까운 점은 용성조사님의 활동에 비해

그 평가는 너무나 빈약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해방 이후 좌우 대립으로 인해 나라가 분단이 되면서

그 업적을 사실대로 평가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6·25 전쟁까지 치르면서

독립운동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습니다.

특히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많은 희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분단 이후에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는

지금까지도 많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물론 민주화 이후에 일부 명예 회복을 하신 분들도 있지만

아직은 많은 분들이 명예 회복을 하지 못한 실정입니다.

 

또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정부의 수반(首班)이 되지 못하면서

그 법통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용성조사님의 업적들은

더욱더 제대로 평가되기가 어려웠습니다.

나라에서 못했다면 불교 안에서라도

용성조사님에 대한 독립운동사를 높이 평가해주어야 했는데

친일 행적을 했던 사람들이 종단을 계승하는 바람에

용성조사님의 불교 개혁운동에 대한 것은 일부 평가를 했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는 역사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어요.

 

 

-대한민국의 국운 융창과 한반도의 평화를 발원하며-

그렇지만 용성조사님께서 말씀하셨던

불교의 지성화는 바른 불교로

불교의 대중화는 쉬운 불교로

불교의 생활화는 생활불교로

많은 정토회 회원들이 재현해 나가고 있습니다.

 

대중이 주체가 되어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실현하고 있고,

또한 기후 위기를 막는 환경실천, 한반도의 평화, 빈곤퇴치, 사회정의와 민주화를 실현하는 일도

지난 30년 동안 꾸준히 진행해 왔습니다.

용성조사님께서 100년 전에 꿈꾸셨던 일들이

오늘날 정토회를 통해 하나씩 실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년에는 용성조사님의 탄신 160주년을 맞이해서

대한민국이 통일의 희망을 품고

전 세계인들이 동경할 수 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가 되도록 하기 위해

국운 융창을 선포하는 대법회를 열려고 합니다.

 

이 도량에 1만여 명의 사람들이 참가하여

발원하는 대법회를 열어서

국민의 행복과 나라의 발전, 그리고 세계의 평화를 염원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뜻깊은 행사에 종교와 이념을 넘어서서

각 종교의 지도자와 정부의 주요 인사도 참석하도록 해서

용성조사님의 큰 꿈이 실현되도록 하고자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내년 음력 58일은

무조건 시간을 비워 놓으셔야 해요. 아시겠죠?

 

그날 아프면

앰뷸런스를 타고 오고, 들것에 실려서라도 오고,

청년들은 그날 결혼식을 잡지 마시고요.

해외 출장이 있으면 취소하세요.

만약 그날 돌아가시는 분이 계시면

장례식을 하루 앞으로 댕기든지 뒤로 미루든지 해서라도

다 함께 모여서 160주년 대법회를 기념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