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현재 / 1930년대 어느 날
일상의 작은 평화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
그때 그녀를 흔든 것은 죄책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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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끼가 절실했던 때도 있었다.
배고픈 아이들은 엄마를 기다렸다.
수레를 끌고 구걸하던 그녀의 애간장도 그렇다.
일제강점기 그리고 전쟁
그 암울했던 30여 년
공생원을 지킨 고아들의 어머니
윤학자.
공생원
1928년 전라남도 목포에 세워진
고아들을 위한 보육 시설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밥 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좀처럼 웃지 않았다.
음악으로 아이들에게 웃음을 찾아주려 했던 윤학자
1935년 공생원 자원봉사 시작
1919년 조선총독부 관리였던 아버지를 따라 조선에 건너 온 그녀.
윤학자(다우치 치즈코)
여덟 살에 아버지를 따라
한국으로 건너온 일본인
조선에서 일본인들의 만행을 수없이 목격한 그녀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일본의 만행을 속죄하고 싶었다는 다우치 치즈코
아니 윤학자.
1938년 공생원 설립자
한국인 윤치호와 결혼
4남매를 공생원 아이들과 함께 키운 윤학자 부부
병든 아이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 살려달라 애원하기 일쑤였다.
끝내 아이가 숨을 거두면 수의를 지어 입히고
하룻밤 곁에 있어 주었다.
그렇게라도 엄마 품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1945년 해방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던 윤학자
~
자격 없는 나를 밀어낸다 해도
그대 잘못은 아닐 거예요.
혹시 내가 너무 아플까 봐
혹시 내가 너무 힘들까 봐
밀어낼 수 없어서 나를 안아준다면
그대만 보며 살게요..
~
그녀가 지켜준 공생원 아이들
그 아이들이 인간띠를 만들어 어머니 윤학자를 지켰다.
한국전쟁 중
행방불명 된 남편
끝까지
공생원을 지킨 윤학자.
30여 년간 그녀가 품었던 3천여 명의 아이들
3만여 명의 목포 시민들이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1963년 별세
최초의 목포 시민장
눈물로 배웅한 목포 시민들
공생원을 지키며
한복을 입고
한국말만 쓰려고 노력했던 윤학자
그 헌신적인 사랑에도
늘 아이들에게 미안했다는 사람
1963년 일본인 최초 문화훈장 국민장 수여
윤학자
(1912.10.31~1963.10.31)
소유,
윤학자를 기억하여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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