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도 그랬지마는 선지식들이
일 년에 한 번씩이라든가 이럴 때 육법공양을 했습니다.
모두들 여러분을 가르치기 위해서 너무나 과거의 선지식들이
너무 애를 쓰신 것 같아요.
그랬건 만도 그거를 뜻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뜻을 못 받고 있다는 얘깁니다.
첫째 우리가 촛불을 켜놓을 때
어떠한 심정으로 촛불을 켜는지
그것조차도 잘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불을 켜놓을 때는…, 항상 내가 그러죠.
주인공에다가, 오직 한 군데다가
몰입을 해서 거기 놓아라.
잘된 거든 잘못된 거든
모든 거를 감사하게 놓고
또 ‘거기에서만이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거기다 전부 놔라.
일거수일투족 다 놔라, 이랬죠.
그것이 바로 저 촛불 켜는 거와 같습니다.
저 촛불을 켜면
초와 불과
불을 켜놓으면 초는 닳습니다. 녹습니다. 녹죠?
여러분들 다 잘 아시죠?
녹으면 그것이 바로 이 업 덩어리, 이 몸체,
이 속에 든 그 모든 인과성, 유전성, 업보성, 영계성 또는 세균성
이 다섯 가지의 문제를
다 몸으로 태우는 거를 말하는 겁니다, 녹이는 걸.
우리가 그렇게 놓지 않으면 녹지를 않아요.
절대로 끊어서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을 해서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칼로 베어서 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건.
그래서 그렇게 해서 촛불을 켜놓을 때는
진짜 그 마음의 불을 켜서
내 몸과 같은 초가 녹아서 녹아서 다 녹게 되면 그거 어떻게 되죠?
불도 없고 초도 없죠?
그 도리를 알면 바로 깨친 겁니다.
초도 없고 불도 없다
그 가운데 뭐가 있느냐?
예전에는 ‘할’ 하기도 하고
주장자로다가 ‘부처가 어딨습니까?’ 하면 골통을 치고
또는 ‘부처가 어딨습니까, 부처님 법은 어떤 겁니까?’ 해도 손가락 하나를 들었고
‘인도에서 달마스님이 한국으로 온 뜻은 뭡니까?’ 해도
‘저 뜰 안에 잣나무다.’ 하고
이렇게 그냥….
뭐 그 말은 다 말로 할 수 없이
방편상 내뜨리신 말들이
전부 생사를 갈라내는, 생사를 파괴할 수 있는 그런…,
바로 함이 없는 말씀을 모두 해놓으셨거든요.
똥둣간에 가다가 물으면
‘똥 친 막대기다.’ 이렇게 대답을 하시고,
이거는 뭐 말로 할 수 없이 다 그 일화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뜻을 누가 아느냐는 얘깁니다.
왜, 남전이 왜 고양이를 죽였을까?
이르지 않는다고 죽였을까?
그건 왜 그렇게 했을까 하는 것과
조주가 왜 머리 위에다 신발을 얹어가지고 나갔을까?
이런 등등 말입니다.
이 도리를 알면
그건 정말 부처 아닌 부처가 돼서
그 마음이 일체 보살이 돼서 허공에 꽉 찰 겁니다, 아마.
그런데 요만한 거 가지고 시비를 하고
요만한 거 가지고 싸우고
요만한 거 가지고 응어리가 진다 하고
요만한 거 가지고 온통 한 집안에
그래 세상을 움켜쥔다고 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한 가정, 한 도량을 이끌어 나가지 못하고
그냥, 화합해서 이끌어 나가지 못하고
싸움들을 하고, 온통 말다툼을 하고
이혼을 하느니 죽이니 살리니 하고
그렇게 한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대답이 있겠죠.
“그렇게 하게 하니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러겠죠.
그러나 그게 아니거든요.
그것이 바로 놓지 못하는 까닭에 그런 일이 소멸되지 않죠.
지금 촛불 얘기했죠?
그다음에 우리가 물을, 다기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기물을 놓되, 우리가 다기물을 놓는 것은
우리 마음의 그 모든 것을, 오욕을
다 깨끗이 씻어내는
그런 청수로서 대응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 한 다기물이
한 바다로 친다면
모든 것을 우리가 거기다 놓고 간다면
작은 물, 땅 속에서 흐르는 물 전부 모이게 되면
바닷물로 이룬다.
우리가 지금 ‘한군데다가 몰입해서 놔라’ 이러는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러면 바다를 이룬다.
바다를 이루면 그 바다의 물이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수증기로 올라가서 정화해서 다시 내린다.
다시 내릴 때 얼마만큼 사람들이, 아니 사람들뿐만 아니라
요만한 벌레 하나도. 요만한 풀 하나도 안 먹는 게 없이
다 평등하게 공법으로서 배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다기물 한 그릇 놓는 것도
어마어마한 뜻입니다, 그게.
우리가 이렇게 다기물을 한 걸 이렇게 놓지마는
그 마음의 생수라는 것은
항상 자기 마음
오욕을 씻어내고, 욕심과 집착을 씻어내고 다 이러면서
스스로 그렇게 씻어내면서 다기를 올려놨을 때는
그것이 바닷물을 이룬다, 이런 뜻이죠.
그래서 보살행을 한다, 이런 뜻입니다.
내 마음이 시시각각으로 찰나찰나 화해서 나투면서
보살로 화해서, 응신으로 화해서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일체 만물만생에게
다 이익이 가게끔
무주상 보시를 한다 이겁니다.
우리가 향을 또 켜놓습니다.
이거는 대략 하나 아니면 세 개를 이렇게 꽂습니다.
근데 개수가 문제가 아니겠죠.
그 뜻을 알아야죠.
우리가 향을 피워놓으면 그것은 양식이라고 합니다.
왜 양식이 되느냐?
이 향이라는 것은
모든 게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그 마음의 향이 있으면
언제나 배가 부르다는 얘깁니다.
배가 고프질 않아요.
그렇게 해서 양식이 된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내가 항상 말하는 공식(共食)이 된다는 얘기죠.
먹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 아닙니다.
모든 것에 공식이 된다.
그러니까 배가 고프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고
아주 정돈이 돼서 항상 향내가 난다.
그러니 세 개비를 꽂는 이유는
한 개비가 세 개비가 되고
세 개비가 한 개비가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은 초월 돼서 공해서 돌아가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개수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세 개비가 한 개비가 되고 그런 거니까
삼세가 일체가 되고
일체가 삼세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삼세를 갖다가
한꺼번에 일체로 만들어서 놓는 게
한 개비를 놓는 것도 되고
세 개비가 한 개비고
그렇게 자유자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거 생이나 현재 생이나 미래 생이나
모든 게 한데 합쳐져서
대천세계가 전부
그 향내를 맡고 다 배가 부르다는 얘기죠.
우리의 마음의 양식이 그렇게 공식으로 할 수만 있다면
이 향 한 개비를 꽂아놔도
죽은 영가들도 다 천도를 시키고
죽은 영가들도 다 해결을 할 수 있는
그런 묘미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가 꽃 공양을 올리죠.
여기도 다 있네요. 여기도 다 있죠.
꽃 공양을 올리는데
꽃 공양은
우리의 마음이, 마음의 꽃이 돼야
그 꽃 이파리가 지면 열매가 열리죠.
그래서 꽃과 과일은 항상 콤비입니다.
여기 콤비로 돼 있네요, 모두.
그래서 꽃이 피면 열매가 맺는다 이런 뜻이죠.
그러면 네 나무가
제 나무에서 꽃이 피고, 제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면,
이건 자기 자성을 말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 나무에서 꽃이 피어서
자기 마음의 꽃이 피어서 열매를 맺는다면
그 열매는 제 나무에서 무르익으면
일체 천차만별의 중생들이 다 먹고도 남음이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꽃 하나 놓는 것도
자기 마음을 갖다 놓는 거지
딴 거 아니에요.
또 우리가 ‘공양을 놓는다’ 이러죠?
공양을 놓는다.
우리가 지금 재사 지낼 때도
떡을 갖다 둥그렇게 하나 해놓죠?
그걸 이거를 전부 한데 합친 겁니다.
우주 삼세를 전부 합쳐서 놓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을 보면 다 연결성이 있어요, 삼세가.
삼세를, 다 연결이 돼 있어요.
과거가 있으면 미래가 있고
미래가 있으면 현재가 있고
이게 연결성이 돼서 다 돌아가니까
어떠한 연관성이 있어서 보면
꼭 삼세가 이렇게 엉켜져 있으니까
삼세를 다, 엉켜져 있는 걸 끊어야 만이
암도 그 악성이 없어지고
그냥 수술해도 나을 수 있게끔 되는 거예요.
이게 참, 연관성이라는 게
아주 극치적이기도 하고
이거는 이유가 없이 결과가 있는 게 없다는 얘기죠.
이 모두가 그래요.
에누리 없어요, 아주.
그러니 이 도리를
이 공양 이렇게 한 그릇 놓는 것도
이거는 닥치는 대로 먹어라, 이 소립니다.
‘닥치는 대로 맛있게 먹어라’
이 소린 밥 먹는 걸 먹으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하나 닥치는 대로,
가는 거 잡지 말고
오는 거 마다하지 말고
먹어 치워라 이거죠.
그러면 우리가 잘못된 게 있다,
잘못된 게 있는데
이거는 어떡하면 이렇게 잘못되게 하지 않나 하고
내버릴 생각을 하지 말고
여기다 넣어서 녹일 생각을 하세요.
녹이는 과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힘이 드는 것도 아닌데
왜 놓지 못합니까?
나를 보디가드 해주고
나를 이끌어주고
나를 전생에서부터 아니 수억겁 전생에서부터 진화시키고
형성시켜온 장본인인데
왜 그것을 못 믿습니까?
다 거기다 놓고, 믿고 놓고 이렇게 해서
어떠한 거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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