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이들 어릴 적에 이혼을 하고, 고향인 대구를 등지고 여기로 온 지 어언 14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러니까 지금 큰애가 25살 둘째가 22살, 남매를 두고 있습니다. 둘째인 딸아이 때문에 스님께 자문을 구하고자 이렇게 나왔습니다.
큰아이는 제 스스로 알아서 척척해 내는 반듯한 성인으로 자라 주었고 둘째는 나이는 성인이지만 아직도 철없는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한 거 같습니다. 딸아이는 학창 시절 때 큰애와 달리 밖으로만 겉돌았습니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가출, 술, 담배 안 해 본 거 없이 제 속을 태웠고 그러면서 늘어나는 건 술이었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 이상 먹는 건 기본이고 필름이 끊길 때까지 먹어서 친구들에게 업혀 오기 일쑤고 그러지 않으면 남자친구네 가서 자고 오기도 합니다. 때려도 보고 달래 보기도 하고 딸아이 편에 서서 이해해 보려고 대화도 해 보았지만 술만 먹으면 모든 게 도로 아미타불이 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문제가 있나 싶어 심리 상담도 해 보았지만, 딸아이 동참이 필요하다 해서, 그것 또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지인을 통해 희망편지를 알게 되어 제 스스로 법당을 찾아갑니다. 즉문즉설을 통한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그 순간은 '그래, 스님 말씀대로 성인이 되었으니 독립시키고 정을 끊자' 다짐해 보지만, 막상 일상으로 돌아오면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큰마음 먹고 내보냈더니 지금 남자 친구와 동거한 지 한 달이 되어 갑니다. 존경하는 스님, 제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스님의 지혜로운 말씀을 듣고자 이렇게 용기를 내어 봅니다.//
술을 먹고 필름이 끊긴다. 그러면 기본적으로 심리가 억압되어 있다. 이렇게 알아야 됩니다. 이 사람의 심리가 억압되어 있다. 즉, 여러분들 남편이든 부모든 술을 먹고 주정을 한다. 그러면 “아, 심리가 억압되어 있구나.” 즉, 술을 먹지 않고는 맨 정신에는 얘기를 잘 못합니다. 그러니까 주정하는 사람들은 술 안 먹을 때는 착하게 보입니다. 말을 잘 안하니까.
왜 그러냐 하면 어릴 때 어떤 이유로 심리가 억압이 되어서 말이 하고 싶은데 목구멍에 걸려서 말이 안 나오는 거요. 머릿속에서는 엄청난 생각이 있는데, 여기 목구멍에 딱 걸려서 말이 안 나오는 거요. 그런데 술을 먹고 취하면 의식이 약간 가면 이 무의식이 발동을 합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맺혔던 것이 계속 반복되는 거요. 그게 주정이에요.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고 이렇게 되는 거요.
그러니까 약간 무의식상태에서 취해서 하는 얘기를, 취하면 할 얘기가 많다는 것은 마음이 억압되어 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요. 그러니까 그것이 남편이면 “아, 우리 남편 어릴 때 좀 자라나는 환경에서 심리가 억압이 되어 있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되요. 그러니까 나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든 술 먹고 잔소리 하고 주정하는 사람하고 살기 싫다 그러면 그냥 “안녕히 계십시오.” 이러고 헤어지면 되요.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내가 그 사람하고 관계를 맺을 거냐하는 것은 내 선택의 문제니까. 그런데 자식이 이렇다 하면 그것은 심리억압의 주 원인이 누구일 가능성이 높습니까? 부모일 가능성이 높아요. 남편은 내가 심리를 억압 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기 때문에 내 책임은 아니네요. 그러니까 내가 자비심을 내면, 엄마 같은 마음을 내면, 그 남편을 심리 억압을 풀어줘야 되겠다.
그래서 주정을 하면 들어주고, 등 두드려주고, “아이고 그랬어요. 그랬어요. 그랬어요.” 맞장구 쳐주고 이러면 심리적 억압이 더 해지지는 않아요. 조금씩 풀어질 수는 있지만, 그러나 어릴 때 맺힌 거니까 쉽게 풀어지지는 않습니다마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등을 두드려 주고 들어주면 그 남편의 주정이 그대로 있다 하더라도 아내는 괴롭지는 않다는 거요.
우리가 환자를 돌보는 게 힘들지마는
환자라는 생각을 해버리면 힘들지 않잖아요.
그런데 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괘씸하죠.
그러니까 그 자비롭게 받아들여서 “그런 치유를 해가면서 같이 살 거냐? 나는 그런 짓하면서 살기 싫다.” 그것은 자기 선택이오. 그것을 어떤 것을 좋다 나쁘다 쉽사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부모의 경우는 그 심리 억압의 주 원인이 자신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거요. 그러니 그게 5살 때 그랬든, 7살 때 그랬든, 10살 때 그랬든 사춘기까지, 그 이상은 심리적 억압이 잘 안됩니다. 아주 특별한 북한같이 저렇게 체제라든지, 군대 같은 그런 데서는 커서도 억압이 될 소지가 있지마는, 대부분 우리같이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어릴 때 억압이 되기가 쉽지 커서는 다 자기할말 하고 살게 된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어릴 때라는 것은 주로 영향 받을 수 있는 게 거의 90%는 부모다. 부모는 자기도 모르게 야단을 치거나 잔소리를 했지마는 아이입장에서는 그것이 어떤 상처가 될 수가 있다. 그래서 자기가 그런 증상이 나타나면 “아, 이 아이가 심리적 억압이 있구나.” 이렇게 받아들여야 되거든요.
심리적 억압이 없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예를 든다면 제사지내는데 참여했다가 어른들이 주는 술을 돌아앉아서 마시고, 몸은 약간 얼굴이 붉어지고 취해도 그런 절차를 거치고 술을 배운 사람은 술을 먹고 필름이 끊기고 주정을 하고 이런 게 없습니다. 심리적 억압이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은 술을 먹고 몸이 못 견디지, 이런 것은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을 첫째 부모의 책임이 좀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아, 내가 큰애는 더 야단치고 작은 애는 덜 야단쳤다.”하는 것은 내 생각이고,
똑같은 말을 해도
어떤 사람은 상처를 입고
어떤 사람은 상처를 안 입기 때문에
내가 세게 했느냐? 약하게 했느냐?
그것을 가지고 자꾸 따지면 안 된다.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첫째 애가 심리적 억압이 있구나. 그리고 그 원인이 나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더 이상 가중시키는 일은 안해야 된다. 지나간 버린 것은 어절 수 없다 하더라도 지금 또 그것을 갖고 내 책임인데도 마치 상대편 책임인 것처럼 잔소리를 하면 그 억압은 더 강화되지 개선이 안 된다. 이런 얘기요. 어릴 때는 그렇게 해도 따랐지만 커서는 그렇게 하면 반발을 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자식한테 뭐라고 얘기했는데 애가 신경질을 팍 내고 엄마한테 반발을 하면 벌써 여러분들 알아야 되요. “아, 얘가 심리적 억압이 있구나.” 즉, 엄마한테 저항이 있구나. 이것을 알아야 되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부당하게 아이에게 부당하게 어른이라고 엄마라고 했다. 이것을 말해요.
“그럼 요만큼도 안하고 어떻게 하느냐?” 그런 얘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벌써 반발을 하면 저항이잖아요.
억압이 있어야 저항을 하지
억압이 없는데 저항은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살펴서 알아야 된다. 그래서 더 이상 잔소리를 안 해야 되요. 그런데 잔소리를 안 하고 못 배기잖아. 그죠. 안 해야 된다고 알고도 안하고 못 배기는 것은 습관이라는 거요. 아무 이득이 없는데, 아이가 술을 안 먹으면 좋은데 먹는 거나, 내가 잔소리를 안 하면 좋은데 하는 거나, 똑같은 거요. 담배 안 피우면 좋겠는데 피우는 거나, 다 그냥 습관,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인 중독성에 들어가는 거요.
그런데 그것을 먼저 본인이 알아야 되죠. 그러면 지금이라도 억압을 안해야 되요.
그러면 함부로 하는데 내버려 두느냐?
그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잔소리를 해서 개선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려면 감화가 되어야 되거든요.
억압을 통해서는 일시적으로만 되지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참는 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한번 참고, 두 번 참으니까 보기에 좋아 보이죠. 명령을 딱 때리면 안하니까 어른이나 부인이나 사장이 보기에 좋아 보이죠. 그러나 두 번 세 번째는 터진다. 그러니까 “저게 또 며칠 가더니 또 저 짓 한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그건 되풀이 된다. 불교로 말하면 윤회할 뿐이오. 근본적으로 개선은 안 돼요. 그럼 반복되는 거지.
그러니까 한두 번 해서
몇 번 해보고 안 될 때는
그만해야 됩니다.
계속한다고 고쳐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고쳐질 것 같죠. 참으니까 상대가. 그러니까 잔소리하면 그래도 좀 낫다. 이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되풀이 되면 벌써 여러분들이 영리한 사람이라면 “아, 이것은 안 되는 거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무조건 “부몬데 어떻게 보고만 있어요?” 이런 얘기 하려면 그렇게 계속 하면 되요.
안 되는 것은 관둬야지. 뭐든지.
그런데 그것을 계속 하겠다는 것은
그냥 나쁜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이란 말이오.
어리석은 사람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요.
그러니까 벌써 이런 상태에서는 더 이상 잔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요. 해봐야 내 입만 아프고 나만 괴롭고, 갈등만 생기지. 그러니까 20살 넘었으니까 관둔다는 것도 있지만 이것은 내가 얘기한다고 개선될 수가 없는 거다. 그러면 나는 뭘 해야 되느냐? 그 원인 제공자로서 참회를 해야 된다는 거요. 그 원인 제공자라서.
아이고, 내가 키울 때 억압을 했더니
쟤가 지금 저 고생을 하고 있구나.
그런 식으로 봐야 되는 거요. 씻고 들어오면 “아이고 심리가 억압이 되니까 또 저렇게 됐구나.” 그것을 잘했다. 잘못했다고 보지 말고.
객관적으로 보면 잘못한 거지마는
본인도 그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본인이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요.
그러니까 술을 입에 대면 통제가 안 되고, 또 필름이 끊기고 그래야 그만두게 되고, 그렇게 되는 거요.
그래서 내가 지금 할 일은
내가 죄를 지은 게 아니라
내가 큰 잘못을 지은 게 아니라
내가 어리석어서
그저 잘 키우려고 잔소리를 한 게
결과적으로 잘못되었다.
밭에 거름을 잘 키우려고 너무 많이 줘서
웃자라게 만들어서 곡식을 망칠 때도 있고
또 거름을 너무 안 줘서 망칠 때도 있듯이
그것은 내가 곡식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러잖아요.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냐.” 이 얘기는 해봐야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자꾸 그런 생각에 여러분들이 집착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위해서, 나는 너를 위해서”
자꾸 이 얘기만 하잖아.
자식은 그렇게 해주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게 선이지,
내가 어떻게 해주는 건 욕망이지 선이 아니에요.
내 욕구지.
그런데 내가 너를 좋아한다. 이것은 내 욕구지 사랑이 아니에요. 상대가 필요로 한 것을 해주는 것이 사랑이에요. 그러면 이해가 필요한 거요.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 위에서 상대가 가까이 오는 것을 좋아하면 가까이 가주고, 멀리 있는 것을 좋아하면 멀리 있어주고 이게 사랑이지, “내 너 보고 싶다.” 이건 욕구지 사랑이 아니에요.
내가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얘긴 내 욕구에요.
여러분들이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은
그것은 여러분들을 위해서라고 할 수도 있지마는
내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는 것은 내 강요지.
그러니 근본적으로 돌아가서 보면 아무 일도 아니다.
첫째 스무 살이 넘었으니까 내가 잘 키웠든 못 키웠든 못 키운 것은 내가 참회하면 되고, 내 할 일은 끝났다. 그러니까 죽든지 살든지, 이렇게 살든지 저렇게 살든지 어떻게 해라? 이제 네 알아서 살아라. 이렇게 내려놓는 게 필요하고,
두 번째는 내가 볼 때 좀 못산다 싶으면 그것이 아까처럼 술을 먹고 필름이 끊어지고 이러면 심리적 억압이 있구나. 심리적 억압의 원인은 나겠다. 나는 잘한다고 잔소리하고 어떻게 했는데, 그게 아이에게 심리적 억압이 되었겠다. 즉, 내가 아이 생각 안하고 내 남편하고 못 살겠다 해서 이혼한 것은 아이에게 상처가 될 수가 있겠죠.
친구들한테 가서 아빠자랑 친구들이 하는데 자긴 못하잖아. 그럼 그 아이한텐 상처가 되는 거요. 나는 내남자하고 사니 못하니 이게 내 문제지, 아이한테는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는 친구들하고 “우리 아빠가 뭐 사줬다. 어쩐다.” 하면 애가 할 말이 딱 없어지는 거요. 그러니까 자기가 아이한테 상처를 줬다. “아빠도 없는데, 내가 너희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느냐?” 그것은 내 변명이지 애한테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쨌든 내 부부간 입장만 고려해서 너희 입장 고려 안하고 내가 이혼을 했고, 또 내가 내 입장만 생각해서 나는 이렇게 힘들었는데 너는 왜 이러냐하고 잔소리를 했는데, 아이한테는 상처가 되었구나. 그러니 원인제공 중에 일부가 나다. 그러니 “아이고 네가 고생한다. 내가 엄마노릇 제대로 못해서 네가 고생한다.” 이렇게 내 어리석음을 참회하지 내가 죽을죄를 지었다. 또 이렇게 가면 자학증세가 됩니다. 그럼 애한테 빌빌 빌고 이래요.
애한테 빌 필요는 없어요.
내가 밥 먹여 주고 키워준 거로
내 할 일 다 했지,
다만 어릴 때 충분히 못해준 게 있으니까
그것을 속으로 나 혼자, 애한테는 할 필요가 없고
“아, 내가 너희 생각 안하고 내 생각만 하고 살아서
네가 상처를 좀 입었구나. 미한하다.”
이러면 술을 먹고 들어와도 그게 내가 원인제공자니까 데리고 오면 아이고 고생이다. 해서 눕혀주면 되고, 깨면 아침에 뭘 먹여주면 되고 이러지, 그거로 인해 괴롭지가 않다. 이 말이오.
그 관점에서 첫째 집착을 끊을 것. 어떻게 살든 죽든 그것은 자기 선택이오. 그래서 자살하든, 설령 남자하고 살다가 애를 낳든, 그것은 자기 인생이지, 그것을 내가 너무 관여할 필요는 없다. 이게 쉽지가 않다. 그러죠. 당연히. 엄마로서 그게 어떻게 됩니까? 그게 그렇게 안 되면 뭣 때문에 자식을 그렇게 사랑하면 애 어릴 때 이혼을 하지 말지 왜 그랬어요.
그러니 그런 거 다 빈말이오.
여러분들은 변명을 하지만,
스님이 볼 때는 다 빈말이오.
내 집착을 내가 못 끊는 거지
상대를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스님도 애 아빠 되어 봐라. 그런 말 할 수 있는가.” 나도 부모 되면 그렇게 못할 거요. 못하더라도 그건 나의 집착의 문제지, 그게 무슨 애를 위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는 거요.
두 번째는 내가 집착을 끊는데서만 되는 게 아니라 참회를 해야 된다. 원인 제공의 일부를 내가 갖고 있기 때문에 참회를 하고 그걸 불쌍히 여겨야 된다. 이 말이오. 그런 마음일 때 불쌍히 여기면 내가 괴롭지 않다는 거요. 더 이상 아이한테 심리적 억압이든 행동에 대한 간섭을 안 하게 된다. 그러면 자긴 좋아지지 뭐.
그런 딸이 있는 엄마도 행복하게 살아야 안 될까? 그런 딸이 있는 엄마는 불행하게 살아야 될까? 이혼한 엄마도 행복하게 살아야 되고, 애가 말썽을 일으킨 엄마도 행복하게 살아야 돼.
우리는 어떤 경우든 누구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거요.
“이것 때문에 나는 불행하다.”
그건 본인이 불행하고 싶어서 그런 거요.
거기에 원칙만 딱 정하면
자기 인생은 행복하게 살 수가 있다.
나는 행복한데 애는 어떻게 되느냐? 그것은 내가 불행하면 애한테 더 나쁘지. 내가 행복하면 그래도 애한테 조금이라도 더 좋게 할 수 있지. 어릴 때는 내 영향에게 자식에게 크지만, 지금은 내 영향이 그렇게 자식에게 크게 미치지를 않습니다.
내가 불행한 것 보다는 그래도 행복한 게 아이한테 좋은 영향을 준다. 오히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좋겠다.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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