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5)

[법륜스님의 하루]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2025.03.11.)

Buddhastudy 2025. 3. 17. 20:09

 

 

첫째,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마음을 욕망’, ()’이라고 합니다.

이를 가치중립적으로 표현하면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구는 기본적 욕구, 상대적 욕구, 지나친 욕구로 나뉩니다.

 

-기본적 욕구는 생존을 위한 것이므로 충족되어야 합니다.

-상대적 욕구는 욕망이라고 하며, 스스로 절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나친 욕구는 탐욕이라 부르며, 경계하고 버려야 합니다.

 

특히 상대적 욕구, 즉 욕망은 스스로 조절하지 않으면 끝이 없습니다.

만약 내가 돈이 없다면 1억만 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죠.

지금은 돈이 없으니깐 1억이 대단한 것 같겠지만

막상 1억을 가지면 10억을 가진 사람과 비교하게 됩니다.

요행히 10억을 갖게 된다면

다음에는 100억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이렇듯 욕망은 끝이 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끝이 없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겁니다.

 

둘째, 살아온 습관대로 안 될 때

일어나는 마음을 성냄’, 즉 진()이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제각기 습관이 다 다릅니다.

입맛도 다르고, 화장실에 가서 휴지 쓰는 방식도 다르고, 빨래하는 방식도 달라요.

이렇게 사람마다 습관이나 가치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 등이 조금씩 다 다릅니다.

그런데도 자기 식대로 하려고 하니까 갈등이 생기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움직이는 것은 계속 움직이려고 하고

멈춰있는 것은 그대로 멈춰있으려는 관성의 법칙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늘 자기 식대로 하려는 습관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과 부딪히면 짜증이 나고, 심하면 화가 납니다.

 

셋째, 알지 못해서 일어나는 마음을 어리석음’, ()’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쥐약인지 모르고 먹거나 낚싯밥인지 모르고 삼키는 것처럼

좋은 일인 줄 알았지만

결국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또한, 화가 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욕심에 눈이 멀어 판단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결국 욕심과 분노 역시 근본적으로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일으키는 원인은 모두 무지입니다.

무지를 세 가지로 나누면 탐진치(貪瞋痴),

즉 욕망, 성냄, 어리석음입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의 마음을 부정적으로 일으키는 원인입니다.

마치 맑은 물에 독을 타듯이

맑은 마음에 세 가지의 독이 스며들면

화내고, 짜증 내고, 미워하고, 불안해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삼독심이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사실 괴로운 마음은 우리의 본래 마음이 아닙니다.

원래 깨끗한 물에 독을 탄 것이기 때문에 독만 제거하면 해결이 됩니다.

그래서 삼독심을 버리면 괴로울 일이 없어집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삼독심을 버릴 수 있을까요?

그 원인을 잘 살펴보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탐진치 삼독의 첫 번째

욕망의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보통 원하는 대로 되면 기분이 좋고

원하는 대로 안 되면 기분이 나쁘고

이렇게 마음이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데 원래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될 수가 없습니다.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을 뿐

다 될 수가 없어요.

되면 다행이고, 안되면 다시 하면 됩니다.

다시 해서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포기하면 되지, 괴로워할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좋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되는 일이 꼭 개인에게 좋은 일인가요?

역대 대통령의 말로를 보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실은 어떤 일이 안 되어서 개인에게 더 좋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뜻대로 되어서 많은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만약 내가 어떤 남자를 좋아해서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해봅시다.

다행히 그 사람하고 결혼하게 되었는데

막상 결혼하고 보니

이 남자에게는 이미 다른 여자들이 여럿 있었어요.

왜냐하면 그 여자들도

다 이 남자와 결혼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된다는 게 과연 좋은 것일까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내가 원하는 일에 목을 매죠.

그래서 욕망이라는 것은,

첫째, 원한다고 다 될 수도 없고

둘째, 된다고 반드시 좋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되, 되는지 안 되는지에 연연해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때로는 안 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안 되었는데 그래도 하고 싶으면 다시 하면 돼요.

그래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꼭 괴로울 일이 아닙니다.

 

두 번째, ‘성냄의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마다 습관이 다 다르고 제각기 성질이 다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솜과 쇠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솜은 부드러움이 있는 대신에 약하고

쇠는 단단한 대신에 부드러움이 없습니다.

서로 다를 뿐이지, 좋다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거예요.

숯과 다이아몬드 중에는 어느 것이 더 좋을까요?

당연히 다이아몬드가 더 좋다고 생각하나요?

만약 북극에서 불을 못 피워 얼어 죽을 위험에 처했다면

다이아몬드가 쓸모 있을까요?

그때는 숯이 더 좋습니다.

숯이 있어야 불을 피워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제각기 성질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괴로움 없이 살 수 있는가?

 

그래서 욕망과 성질을 자제하고 어리석음을 깨우치면,

사실은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딱 부딪히면

찰나에 무지가 일어나서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찰나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항상 보고, 듣고, 냄새 맡고, , 감촉, 생각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찰나만 놓쳐도 기존의 습관대로 흘러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어리석음을 깨우쳐 지혜를 얻게 되면

괴로움이 아예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알아차림을 근본으로 해서 놓치면

다시 하는 일을 꾸준히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계··(··) 삼학을 닦는다고 합니다.

 

삼학 중에 계()는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지만

스스로 제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감정이 확 올라오는데 제어하면

약간의 스트레스가 생깁니다.

남한테 피해는 안 주지만, 본인에게 약간 스트레스가 됩니다.

그래서 선정을 닦아서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을 정()이라고 합니다.

선정을 닦을 때의 알아차림은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계율을 지킬 때의 알아차림은 갈애(渴愛)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갈애를 알아차려서 제어하고

느낌을 알아차려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거예요.

이렇게 계정혜 삼학을 닦아가면

괴로움 없이 사는 게 가능해집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원리를 발견하시고 가르침을 전하셨습니다.

 

이것을 교리상으로 정리하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四聖諦),

즉 고집멸도(苦集滅道)입니다.

고집멸도의 첫 번째가 고성제입니다.

 

일어난 현상을 파악해서

지금 내 상태가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불안하고 초조한 것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즐거움도 괴로움이에요.

이혼하는 것만이 괴로움이 아니라

결혼하는 것도 괴로움입니다.

시험에 떨어진 날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합격한 날도 괴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이것을 알면 합격해도 즐거움에 들뜨지 않습니다.

만약 합격했다고 들뜨면

반대로 떨어지면 괴로워지게 되니까요.

합격하면 합격했구나하고 알면 되고,

떨어지면 떨어졌구나하고 알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고집멸도의 두 번째는 집성제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무지, ‘알지 못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무지를 깨우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남한테 빈다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무지를 좀 더 세분화하면,

본인 하고 싶은 대로 하려는 탐심,

본인 성질대로 하려는 진심,

이치를 모르는 치심,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이때 탐심과 진심도 모두 치심에 속합니다.

그래서 무지를 타파하고, 탐진치 삼독을 제거하면

우리는 괴로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멸성제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마음이 순간적으로 무지에 빠지지 않으려면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도성제입니다.

 

불교에서는 알아차림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8가지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도(),

즉 팔정도를 이야기합니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이것이 팔정도(八正道)입니다.

 

부처님이 하신 첫 설법이 중도, 사성제, 팔정도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전부예요.

그래서 오늘로써 공부가 다 끝났고 졸업해도 되겠습니다.

 

그러나 불교 공부는 이해하는 것에 멈추면 안 되고

직접 내가 삶 속에서 체험을 해야 합니다.

불교를 철학적으로 접근하면 교리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우리의 삶 속에서

괴로움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찾아 나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목표는

죽어서 좋은 데 가는 것도 아니고

빌어서 복 받는 것도 아니에요.

괴로움이 없고 속박이 없는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는 것이

불교를 공부하는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