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성제, 중도, 팔정도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연기법이 이해가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 경전 강의도 신청하고 불교사회대학도 신청했습니다.
연기법이라는 게
믿음인 건지, 아니면 확연하게 보는 건지
헷갈리기도 하고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연기법을 체득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마(Dharma)라고 합니다.
담마라는 말은 진리라는 뜻입니다.
담마는 인도말로 진리이기 때문에, 비단 불교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두루 널리 쓰이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특별히 ‘붓다 담마’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는 어딘가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곧 진리입니다.
한문으로는 실상(實相)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실제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존재의 실상이 바로 연기입니다.
따라서 ‘연기를 믿는다’ 이렇게 표현하면 안 됩니다.
‘연기법을 이해한다.’, ‘연기법을 본다.’, ‘연기법을 안다.’
이렇게 표현해야 합니다.
연기법을 믿는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불교에서의 믿음이란
사색해서 알거나, 법문을 듣고 알거나, 경험을 통해서 확연하게 아는 것을 말합니다.
경험을 통해서 확연하게 아는 것이 가장 깊은 믿음이에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믿는다’라는 말의 기저에는
늘 못 믿는 요소가 함께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는
믿음이 아주 견고한 것 같지만,
뜻대로 안 되면 곧바로 믿음이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이 무엇인지 확연히 알아버린 일에 대해서는
뜻대로 되고 안 되고 관계없이
그 믿음이 견고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대신주(大神呪)이다’라고 표현합니다.
확연히 알아버린 지혜는
이 세상에 그 어떤 믿음보다도 더 깊은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신비할 신(神) 자를 쓴 것은,
믿음이 그만큼 깊고 견고해서 거의 무의식화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무의식화되어 있으면
의식적으로 생각해서는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은 일까지도 능히 해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이런 일을 신비하다거나 기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로부터 믿음이 견고하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간절하다는 것은 그 마음이 아주 깊다는 것입니다.
‘간절하면 하늘이 감동한다’라는 표현도 있잖아요.
일상적으로 불가능한 일마저도 간절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은 신비주의로 접근해서는 안 되고
믿음이 깊어서 내면에 무의식화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행위를 할 때는 애를 쓰면 안 됩니다.
애를 쓰니까 힘이 들고, 힘이 드니까 지쳐서 그만두게 되고,
또다시 마음을 내고, 이것이 반복되는데,
무의식화된다는 것은 힘이 하나도 안 든다는 뜻입니다.
그냥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굉장히 힘들게 일하는데
믿음이 무의식화된 사람은 힘이 안 듭니다.
종교적인 믿음이든 깨달아서 생긴 믿음이든 그 믿음이 견고하면
심리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비슷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믿음은 그 믿음이 지속되지 않아서 회의감이 듭니다.
믿었는데 그게 뜻대로 안 되면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연히 알면 그런 의심이 없습니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이 진리라면,
댐을 만들다가 실패했다고 해서
물이 거꾸로 흐른다고 의심하지 않는 것과 같아요.
확연히 안다는 것은 그런 의심이 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종교에서 강조하는 믿음은,
예를 들어 휴거(부활 승천)를 믿는다든지 종말을 믿는다든지 하는 것처럼
좀 맹목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집회를 할 때도
굉장히 동원이 잘 되고, 행동도 거침이 없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조마조마하는 마음이 없이 그냥 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갖는 문제점은
사실이 아닌 것도 믿음에 의해 사실인 것처럼
착각하게 될 위험이 매우 크다는 점입니다.
어떤 환상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믿음이라고 해서
미신(迷信) 또는 우상숭배(偶像崇拜)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견고하면 좋은 일이지만,
반드시 사실에 기반을 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종교와 철학은 차이가 있는 거예요.
철학은 이해를 중요시해서
생각이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는지, 말이 되는지를 따집니다.
그러나 믿음은 논리적으로 따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철학은 사유를 주로 하기 때문에
때로는 행동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량분별(思量分別)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입만 살았다고 표현하기도 하죠.
그 이유는 행위가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행은 종교적인 요소와 철학적인 요소를 다 포함하되
또한 이 두 가지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연기법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이치를 충분히 이해해야 하는 철학적이고 과학적 요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철학이나 과학과 다른 점은
내가 경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론적으로 아는 것은 설명과 이해를 통해 가능하지만
내 괴로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존재가 연관되어 있다고 머리로는 알아도
막상 일을 하다 보면
‘내 일이냐, 네 일이냐?’ 하고 따지게 됩니다.
의식적으로는 하나라고 알고 있지만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내 일, 네 일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너와 나를 나누던 무의식적인 습관이 마음속에 남아있기 때문에
특별한 어떤 경험을 통해 확연히 깨닫지 않는 이상
현실에서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치 지구가 둥글다고 머리로 이해하지만,
일상에서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해가 뜨고 진다’라고 말하지,
지구가 자전해서 해가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한다고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일상에서 우리가 경험적으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인식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도는 것이지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내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것은
태양이 뜨고 지고를 반복하니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인데
지구에 사는 우리는 지구가 도는지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조용히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공중에 떠 있는지, 가고 있는지, 서 있는지 구분하기 힘든 것과 같습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이치를 학교에서 배웠지만
현실에서는 어릴 때부터 경험해 온 대로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인공위성을 타고 지구 밖에 나가서
지구가 동그란 공같이 생겼다는 것을 경험하고 오면 훨씬 낫겠죠.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안 되잖아요.
마찬가지로 연기법도
불교대학에서 과학적인 설명을 듣고 나면
머리로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시골에 사는 노인들이
지구의 자전이나 공전에 대해 듣고 이해하는 정도가 그리 높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초적인 지식이 없으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일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들도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어서
이해하는 척하는 걸 수도 있어요.
연기법은 여러분들이 성인이 되어서 처음 들었으니 생소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모든 삶은 개별 존재의 집합이라는 관점에서 배우고 익혀왔잖아요.
늘 어떤 현상을 볼 때마다
주는 것과 받는 것, 이기는 것과 지는 것과 같이
이분법적 관점에서 세상을 보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연기적 관점에서는 모든 존재가
내 몸의 일부와 같이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뼈와 살처럼 딱 붙어 있는 연결은 아니지만,
조금 더 자세히 살펴서 원자적 관점에서 보면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우리의 몸 하나하나가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자 단위에서 보면
사람과 공간까지도 단지 원자의 밀집도가 다를 뿐이에요.
지금 이 순간에도 여기에 밀집되어 있던 원자가 이동하여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밖에 있던 원자가 안으로 들어오기도 합니다.
음식을 먹으면 우리 몸 안으로 들어오고,
다시 몸 밖으로 배출되기도 합니다.
개개인이 독립적인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마치 자동차의 부속품을 이것저것 다른 것으로 갈아 끼워도
자동차가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덩어리가 하나라고 생각하고
다른 것들과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전체가 다 똑같다는 말은 아니에요.
손가락 하나하나가 다 똑같지는 않잖아요.
각각의 손가락이 분리되어 있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것이 자연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분리된 개별 존재의 모임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고 듣고 경험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에요.
관찰하는 데 있어서 시간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지구는 둥글지만 우리는 평평하다고 느끼는 것도
관찰의 한계 때문에 발생하는 착각입니다.
그리고 어려서 이치를 잘 모를 때
모든 존재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인식한 것이
살면서 업식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내 업식에 비춰서 세상을 인식하기 때문에
실제의 모습 그대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왜곡해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 관찰의 한계 때문이고
둘째, 업식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있어서 왜곡되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개별 존재의 집합으로 인식하고 있는 거예요.
이런 현상은 과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원자를 하나의 알맹이라고 봤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원자 안에 다른 요소가 있다고 인식했습니다.
그 부분이 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처음에는 빵에 건포도가 박히듯이 전자가 원자핵에 박혀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가운데 핵이 있고 바깥에 전자가 분포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조금 더 연구한 결과
여러 개의 전자가 층층이 원자핵을 둘러싸고 있다는
‘보어의 원자 모형’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밝혀진 사실은
핵이 가운데 있고 전자가 뿌연 안개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그 안개층의 밀도가 조금씩 다르게 분포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방식을 바탕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의 모습을 확연히 알기 전까지는
항상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추측할 수밖에 없는 거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을 개별 존재의 집합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을 처음 접했을 때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운 겁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부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연기법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부처님도 연기법을 깨달은 후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망설였다는 내용이 경전에 나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나자, 마왕 마라가 나타나서
‘다른 사람에게 법을 전하지 말고 여기서 멈춰라,
어차피 세상 사람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법을 전하다가 또 번뇌가 생길 테니 그만둬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다음에는 범천(브라만신)이 나타나서 부처님에게 말합니다.
‘이 세상 사람이 어리석지만 전부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마치 연꽃이 물속 깊이 있는 것도 있고,
수면 가까이에도 있고, 물 위에 있는 것도 있듯이,
이 법을 들으면 깨닫는 사람이 있을 테니 법을 설하소서.’
마왕은 아무리 법을 설해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니
전법을 하지 말라고 하고,
브라만은 법을 설하면 이해하는 사람이 있으니
설법을 하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망설였다는 내용은
어찌 보면 부처라는 일체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내용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부처님에게 망설임이 없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기록한 사람의 수준에서
그때를 생각하고 기록한 것일 수가 있는 거죠.
부처님은 깨달음을 전할 사람으로
가장 먼저 예전의 스승들을 떠올렸습니다.
법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을 알고,
법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은 사람인 스승을 떠올린 거예요.
그런데 스승은 이미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그다음으로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하고
6년간 함께 수행한 다섯 도반을 떠올립니다.
비록 부처님이 중도를 깨닫고 고행을 버리는 모습에
실망하고 부처님을 떠났지만
세상 사람들 중에서 이 법을 제일 잘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처럼 부처님이 처음에 설법하실 때는
아무에게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함께 수행한 다섯 비구가 있는 사르나트로 가셨습니다.
가는 동안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부처님이 함께 수행하던 다섯 비구가 있는 곳에 도착합니다.
그들도 부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할 수 있어서
부처님은 연기법을 먼저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연기법은 깨달으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처음부터 설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도와 사성제를 설하여
마음에 있는 어리석음의 장벽이 걷힌 후에 연기법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첫 설법에는 연기법이 나오지 않습니다.
후대에 사리푸트라가 아사지를 만나서
‘당신의 스승은 무엇을 가리킵니까?’라고 물었더니 아사지가
‘스승님에게 물어보세요. 저는 초심자라 잘 모릅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리푸트라가
‘배움이 있으니, 스승으로 모시는 거 아닙니까?
아는 것만이라도 알려주십시오’ 하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아사지가 처음 한 말이 연기법이었어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며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마치 두 개의 볏단이 서로 의지해 있는 모습처럼
하나가 있어서 다른 하나가 유지되고,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쓰러진다는 의미입니다.
사리푸트라가 이 말을 듣고
그동안 수행을 하면서
마음 한구석에 있던 풀리지 않던 의문이 탁 풀렸어요.
연기법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입니다.
특별히 더 알려고 애쓸 것도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때
왜곡시키는 업식으로 인해서 연기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개별 존재로 보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구슬을 꿰어서 만든 그물이 있는데,
우리 눈에는 구슬을 연결하는 줄은 안 보이고 구슬만 보이는 겁니다.
연결되어있는 사실은 안 보이고 반짝반짝 빛나는 구슬만 보이는
그런 상태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먼저 연기법을 이해해야 하고
일상에서 자기를 살피고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 삶에도 연기법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공 사상도
연기법에 기초해서 연기법의 다른 표현으로 나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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