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전에 34살 된 아들이 자살했습니다.
자살도 살인인데 그 죄로 나쁜 데 떨어진다면
그 기간을 줄이기 위해 제가 무엇을 해줄 수가 있을까요?//
네. 먼저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아픔은 이해가 됩니다마는
또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요.
그러나 아들이 눈이 안 보이면,
날 때부터 눈 안 보인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눈이 안 보여도 또 좀 불편할 뿐이지 사는 데 지장이 없는 거예요.
장애인 등록하고 살아가면 되거든요.
그런데 눈에 집착해서
‘눈이 안 보이고 살 바에야 죽는 게 낫겠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스스로 자살을 하게 된다.
그러면 그것을 ‘사로잡힘’이라고 그래요.
그 생각에 딱 사로잡혀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면 자기가 생각할 때는
‘아들이 그 눈이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서로 도와가면서 살면 되지 죽을 거까지는 없지 않으냐’
이런 생각이 엄마로서는 들잖아요.
그런데 그 아들과 똑같이 지금 본인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정신적으로 똑같은 지금 증상입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거기에 딱 사로잡혀서
지금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옆 사람이 볼 때는
‘그 생각을 놔버리고
이제 자기 인생을 좀 행복하게
남은 인생이 1년이 되든, 10년이 되든 좀 살면 어떨까?’
이렇게 옆의 사람들은 다 그렇게 보여지는데
자기는 ‘아들이 죽었는데 내가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느냐?
아들한테 뭔가 도움이 되어야지’
이 생각에 콱 사로잡혀 있듯이
아들은 눈에 탁 사로잡혀서
자기 생을 마감한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들을 가지고 자기가 교훈을 얻는다면
‘아들을 좀 내려놓는 것’
아들은 나름대로 그냥 그런 생을 선택했다.
자기가 자기 생을 선택한 거예요.
나는 눈이 안보여서 불편하게 사는 것보다응 생을 마감하는 게 낫겠다.
우리 아들이 선택했기 때문에
“그래, 네 뜻을 존중한다, 엄마는.
엄마로서는 아쉽지만, 그래도 엄마는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래서 다음 생이 있다면
다음 생에는 건강하게 잘 살아라.
또는 어디 간다면 좋은데 가라”
이렇게 놓고, 자기는 자기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이게 아들의 죽음에서 자기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질문자가 하는 행위는
아들과 똑같은 병을 가지고 있다.
똑같은 상태로 행동하고 있다.
어쩌면 자기의 이러한 편집증이 아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이런 사고가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탁 놔버리는 것
이것이 수행 차원에서의 천도라는 거예요.
‘우리 아들’하고 잡고 있던 거를 탁 놔버리는 것
이것이 진정한 해탈이고 천도다.
이것은 수행 차원에서 하는 얘기에요.
그러기 때문에 금강경에서 나오는 게 바로 이거예요.
‘우리 아들’, ‘내 눈’, ‘내 재산’,
이게 상이에요.
요렇게 움켜쥐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상이라는 것은 그냥 생각일 뿐이지
허망하다, 아무런 실체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건 잡으려야 잡을 수도 없고, 잡을 것도 없다.
이걸 탁 깨닫는 게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죽은 사람에게 금강경을 읽어주면 좋다’ 이 말은
금강경을 읽으면 좋은데 간다, 이 얘기가 아니라
금강경의 내용을 확 알아버리면
“아, 이거 내가 상을 지었구나,
내가 상을 붙들고, 허상을 붙들고 있구나”하는 걸 확 깨달아 버리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죽은 사람에게 금강경을 독송하면 복이 된다’
이런 말이 나온 거라는 거예요.
금강경 가르침으로 하면
여기서 자기가 탁 내려놓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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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종교적으로는 어떠냐?
이 깨달음이 안 되는 사람은 종교적인 위로를 받아야 하거든요.
옛날부터 종교가 어떻게 생겼느냐?
이 인간의 심리는 모를 때 두려움이 생깁니다.
뭘 모를 때.
어이 되는지 모를 때 두렵다.
낯선 데 가면 두렵잖아요.
그 낯선 곳에서 오는 게 아니라
아는 곳에 가면 안 두렵고, 낯선 곳에 가면 두렵다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아는 사람을 만나면 안 두려운데 낯선 사람을 만나면 두려워.
왜? 모르기 때문에.
아는 일을 하면 괜찮은데 처음 하는 일은 두려워.
왜? 모르기 때문에.
그러니까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다.
그런데 우리가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에요.
죽음이 두려움이 아니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이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데서
인간은 벌써 5천 년 전에 아이디어를 낸 거예요.
죽은 뒤에 좋은 데 간다.
천국에 간다.
극락에 간다.
좋은 곳에 간다.
그러니까 아쉽긴 하지만 좋은 곳에 간다 하니까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내가 죽어도 여기보다 좋은 데 간다.
우리 아들이 죽어도 여기보다 좋은 데 간다.
그래서 이게 종교가 생긴 거예요.
그래서 이것이 위안이 된다.
이게 사실이냐?
이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에요.
사실이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좋은데 간다’, 이 생각을 함으로 해서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진다.
두 번째, 인도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좋은 해결 방법을 찾은 거예요.
이게 뭐냐?
환생한다.
다시 태어난다.
좋은데 가도 저 멀리 가버리는데
이거는 다시 이곳으로 온다 하니까 훨씬 더 안심이 되죠.
그래서 인도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대해서 많이 울지 않습니다.
화장도 며칠 놔놓고 하는 게 아니라 오늘 죽으면 바로 화장해 버립니다.
왜?
빨리 오려면 빨리 집착할 육신을 없애 버려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그래서 ‘이걸 빨리 놔 줘버리면 빨리온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위안이 된다.
그래서 천도재를 지내는 종교의식이
기독교는 기독교식으로, 불교는 불교식으로 종교의식이 나오게 되었다.
이 종교의 식이 사실이냐, 아니냐 라고 논하는 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게 생각함으로 해서 뭐가 있다?
심리적인 위로가 된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불교에서는
사람이 나쁜 짓을 하면 지옥에 가고
좋은 일을 하면 천상에 가는데
그 나쁜 자기가 남을 해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해서 지옥에 갔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죽어서도 그걸 깨우치면 나올 수 있는데
스스로 힘으로 나올 수 있는데
대부분 다 못 깨 치운다는 거예요.
아까 마약 했던 사람이 한번 갔다 오면 깨우쳐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는 거예요.
또 어떤 게 있으면 반복한다.
그래서 옆에서 다른 사람이 도와줘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남을 때리면 어떻게 합니까?
사과도 해야 하지만, 이걸 참회라 그래,
사과도 해야 하지만 배상 해줘야 하잖아요.
그래서 베풀어야 한다,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
제일 베푸는 공덕이 큰 게 뭐냐?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베푸는 거고
아픈 사람에게 약을 베푸는 거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거다.
그래서 백중재 같은 거 보면,
조상 영가를 천도하는 방법으로 음식을 마련해서
배고픈 사람에게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면
그 공덕으로 지옥에 있는 우리 목련존자 어머니가 구제가 되었다.
이런 설화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이 죽었을 때, 재를 지낼 때 가장 중요한 거는 베푸는 거다.
이 베푼다,
49재, 천도재할 때 재는, 제사 지낸다는 뜻이 아니고 베푼다는 뜻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자기가 가진 것 중에
만약 부모가 돌아가셨다면 부모를 위해서 자식이
자식이 죽었다면 자식을 위해서 부모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베풀고
병든 자에게 약을 베풀면 큰 공덕이 있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난다.
이거는 사실이냐, 아니냐, 이렇게 묻지 말고
그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이건 종교적인 해결책이다.
그러면 수행적 해결책은 뭐냐?
집착을 놔버리는 거다.
이것도 ‘아들이다’ 하는 상을 짓고 붙들고 있는데
그 상은 허망한 거다.
그걸 탁 놔버리면 내가 자유로워진다.
이거는 수행적 관점에서 하는 얘기이고
종교적으로는 어려운 사람에게 베풀어서 그 공덕으로 좋은 곳으로 가게 된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자기는 두 가지를 다 병행해 보세요.
‘아, 이게 상이구나’
‘아들이 눈에 집착하듯이 내가 아들에 집착하고 있구나’
‘아들이 저지른 바보같은 짓을 나도 동시에 하고 있구나’
‘아, 나는 바보 같은 짓을 안해야지.
그래, 너는 좋은데 가라.
나는 너를 통해서 내가 깨달음을 얻어서 나는 행복하게 네 공덕으로 살거야’
이렇게 탁 돌아오는 게 수행적 관점이고
그래도 마음에 안 없어지면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베풂으로 해서
‘아, 이렇게 하면 좋은데 간다’하니까
믿음을 통해서 안심을 하는 길이 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게요.
...
종이에 내가 아들 그림을 그렸어.
그리고 종이를 태웠어요.
그러면 그 종이 그림에 있는 아들은 어디 있어요?
그러나 사진을 찍어 놓으면 사진에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은 없어졌어요.
그런데 지금 질문자는
사진 찍어놓은 게 내가 생각하는 아들이거든요.
내가 지금 사진을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진을 보면서 어떠냐?
그 타버린 종이의 아들이 지금 어디 있을까? 지옥에 있을까? 천당에 있을까?
자꾸 이런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 종이는 태워버리면 아무것도 없어요.
남아있는 것은 내 생각 속에 사진찍힌 아들만 남아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질문자의 문제는
사진 찍힌 아들이 문제가 아니고
사진 찍힌 이 아들 말고
타버린 그 아들이 어디 있다고 자꾸 생각하는, 이게 큰 문제에요.
그래서 금강경에
그것은 상이고, 상은 허망하다.
하늘에서 구름이 코끼리 모양이 되었다가 용모양이 되면
아까 코끼리 어디 갔노?
이렇게 생각하는 거와 똑같다.
그건 코끼리 모양이 되었다가 용 모양이 되었다 이렇게
그래서 뜬구름 같다, 이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육신이라는 것은
해체가 되면 그림을 지워버린 거 하고 같아요.
그러면 또 딴 그림을 그리면 또 다르게 그려지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우리들의 몸의 원소는
식물의 요소가 되고, 동물의 요소가 되고, 다른 사람의 요소가 되는 거예요.
흑판에 그림을 그려놓고 지우개로 지웠다.
‘아까 그 그림 어디 갔노?’
이렇게 묻는 거와 같다.
그 그림이 내가 사진을 뇌속에 찍 놓은 것은 남아있지만
그 흑판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까 자기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지워라.
이게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
질문자님께서 병원에 가서 한번 진료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제가 볼 때는 기도를 하면서도
정신과 치료를 조금 받으면
심리를 안정시키데 훨씬 도움이 된다.
지금 자기 눈에는 그 그림이 보이고, 아들 그림이 보이고 이러기 때문에
옆에서 다른 사람이 아무리 얘기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한테는 확실히 그 존재를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은 우리는 그걸 또 이해해야 하고
그러나 약간의 치료를 겸하면
지금도 좋지만, 치료를 겸하면 상태가 더 좋아지지 않겠나.
이렇게 해서 제가 한번 여쭈어 보는 거예요.
...
'법륜스님 > 즉문즉설(2023)'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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