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반야심경

법륜스님 반야심경-제01강 반야심경 개관

Buddhastudy 2017. 5. 15. 20:17



 

안녕하세요. . 오늘부터 반야심경 강의를 하겠습니다. 저는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입니다. 반야심경은 우리 한국 불교도들이 누구나 다 법회를 할 때, 지극하게 독송하는 경전입니다. 매일매일 독송한다할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어렵고, 심오하다 해서 뜻을 잘 모르고 독송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이렇게 반야심경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공부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반야심경, 이럴 때 반야심경은 불교의 경전입니다. 불교의 경전에는 크게 나누어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대승경전, 하나는 소승경전입니다. 소승경전에는 아함경이라고 해서 4가지 아함경이 있습니다. 빨리어로는 니까야라. 이렇게 부릅니다. 그리고 대승경전에는 크게 나누어서 방등부, 그리고 반야부, 법화부, 열반부, 화엄부. 이렇게 나눌 수 있는데요,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반야심경은 반야부에 속한 경전입니다.

 

우리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는 금강반야바라밀경, 이 금강경도 반야부에 속하는 경전입니다. 이 반야부에 속하는 경전은 아주 많습니다. 전체적으로 대반야 600권이 있는데요, 아주 많은 분량입니다. 그 많은 경전의 내용이 가장 요약되어있다. 그렇게 짧은 글 속에 요약되어있는 게 반야심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제목까지 포함해서 270. 제목을 제외하면 260자로 되어있는데요, 사실은 굉장히 짧은 경전이죠.

 

그 속에 불교의 대승사상, 공사상이 가장 압축되어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 공부를 할 때는 한자 한자 놓치지 않고 다 살펴봐야 됩니다. 그것은 워낙 경전이 압축되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짧은 경전을 가지고 여러분과 오랜 시간 공부를 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경전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얘기했는데, 그러면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게 뭘까?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은 이를 말합니다. 깨달은이의 가르침이다. 불교라고 하는 것은 깨달은 이의 가르침이다. 그럼 깨달은이가 무엇을 가르쳤느냐? 깨닫지 못한 이를 깨닫게 해주기 위한 가르침이에요. 그러니까 깨닫지 못한 사람들, 이것을 우리가 중생이라고 그러죠. 이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깨달은이의 가르침을 듣고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 또 이런 질문이 있겠죠. “왜 깨달아야 합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있는 우리 모두는 인생살이가 괴롭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로 해서. 또 많은 속박을 받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가 사람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굉장히 속박을 받으면 어떻게 되느냐? 나는 새를 보고 부러워합니다. “나도 저 새같이 날아봤습니다. 좋겠다. 훨훨 날아가고 싶다.” 그런데 사람이 새가 되어 되겠어요? 이것은 사람이 얼마나 속박을 받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사람이 또 굉장히 괴로움을 받으면 어떠냐? 차라리 저 소가 부럽다. 저 개가 부럽다. 이래요. 사람이 아무리 힘들지만, 소가 되거나 개가 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소나 개가 사람을 부러워해야지. 이것은 이 세상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괴로움이 아주 극한에 처할 때 이런 마음이 든다. 이거에요.

 

그래서 이 괴로워하는 사람들,

이것이 중생이에요.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들 벌레들까지 다 포함해서 중생이다.

이렇게 광의로 말하기도 하고,

 

또 좁혀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어리석어서 괴로워하는 사람,

이것을 중생이라고 한다.

 

그럼 이런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있다. 이거야. 어떤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도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 수가 있다. 행복하게 살 수가 있다.

 

어떤 괴로움도 없는 행복,

어떤 속박도 없는 자유,

그런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뭐라고 그러냐?

붓다다. 부처다. 이렇게 부르는 거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괴로움에 살고 있는 중생들이 괴로움이 없는 속박이 없는 그런 세계에 갈 수 있느냐?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좀 자유로워질 거 같아요?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아요?

 

첫째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있어야 된다. 돈이 있어야 된다. 그런데 돈 많은 사람들,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요즘 우리 사회에서 돈이 제일 많은 사람이 문제가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 괴롭겠어요? 안 괴롭겠어요? 괴롭겠죠. 돈이 산처럼 쌓여있어도 괴롭다.

 

돈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완전한 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이렇게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돈만 갖고 안 되니까, 여기에 권력이 있어야 됩니다. 출세를 하면. 그래서 여러분들이 돈벌 게 해 달라. 승진하게 해 달라.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걸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왜 그런가? 출세를 하고 싶다. 권력을 갖고 싶다. 권력을 가지면, 지위가 높아지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세상에 권력가진 사람, 얼마나 고통이 많습니까? 지위가 높은 사람, 얼마나 고통이 많습니까?

 

얼마 전에 보니까 최고 높은 지위에 있었던 분이 거기를 내놓고 나와서 너무너무 기뻐하는 이제 자유다. 책임 안 져도 된다.”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권력이 도리어 괴로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돈이 있고 권력이 있어도 괴로운 사람이 있어요. 세상 사람들로부터 욕 얻어먹으면 괴롭죠? 비난 받으면 괴롭다.

 

그래서 칭찬받고 싶어 하고, 인기가 있고 싶어 합니다. 인기가 떨어져서 괴로운 사람 얼마나 많습니까? 유명한 배우, 유명한 체육선수, 유명한 작가, 이런 분들 인기가 오를 때는 세상이 다 자기 거 같다가 인기가 떨어지면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그래요. 그런데 인기라는 것도 명예라는 것도 우리를 이 괴로움에서 이 속박에서 완전하게 벗어나게 할 수가 없다.

 

그럼 어떤 것이

우리를 이 괴로움에서 이 속박에서

완전하게 벗어나게 할 수가 있느냐?

바로 깨달음이다.

 

우리가 이렇게 괴로운 것은

어떤 신의 벌도 아니고,

전생의 죄도 아니고,

태어날 때 생년월일시가 잘못 태어나서 그런 것도 아니고,

우연히 생긴 것도 아니고,

이것은 오직 우리가 어리석기 때문에 일어난다.

바로 이 어리석음에서만 벗어난다면

이 모든 괴로움은 사라진다.

 

그것은 마치 어떤 거와 같으냐? 이 방안이 깜깜할 때, 이 방안에 와서 어떤 물건을 찾을 때, 모두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시간을 많이 허비하고도 찾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오히려 찾다가 이 물건, 저 물건, 넘어뜨려서 손해가 많이 나는 이런 것과 같다.

 

며칠을 찾아도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불을 탁 켜게 되면 이 방안에 있는 것들이 한눈에 착 보이게 되요. 며칠 몇 달을 찾아도 못 찾던 것을 단박에 찾을 수가 있다. 아무리 복잡해도 다른 것을 건드리지 않고, 자기가 필요한 것을 바로 잡을 수가 있다. 마치 어두운 방에 불이 탁 켜졌을 때와 같은 것이 깨달음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 부처님을 이렇게 찬탄했어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심과 같다.

길을 잃고 헤매는 자에게 길을 가르쳐 주심과 같다.

무엇인가 덮여서 거기 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그 덮은 것을 벗겨내어 한눈에 확 볼 수 있도록 해주심과 같다.

어두운 밤에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런 상태에서

불을 밝혀 등불을 비춰주심과 같다.

이것이 깨달음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 깨달음을 얻게 되면,

이 모든 고뇌, 모든 괴로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이렇게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자,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이것을 니르바나, 열반이라고 그래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이것을 해탈이라고 그럽니다.

깨달음을 이루어 해탈을 증득하고 열반을 증득한 자를 붓다. 부처. 이렇게 부릅니다.

 

이렇게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자를 우리가 붓다라고 부르고,

자기 스스로는 깨달음을 못 얻었지만, 깨달은이의 가르침을 듣고 도움을 얻어서 자신도 깨달았다. 이런 사람도 역시 붓다에요. 그러나 이것을 구분해서 이런 분은 아라한이라고 한다.

아라한이란 말도 붓다의 열 가지 명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깨달은이를 붓다, 부처님.

 

이 분이 깨닫지 못한 이를 위해서 깨닫지 못한 이, 중생이에요. 중생은 괴로움을 겪고 있는 자고, 고뇌하는 자에요. 그 괴로움과 고뇌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서 깨달음을 얻도록 깨달음을 이루도록 가르침을 폈다. 이것을 부처님의 가르침. 이것을 담마, 법이라고 그래요.

 

그 가르침을 듣고, 그 진리의 가르침을 듣고 자기도 깨쳤다.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모든 고뇌가 사라졌다. 이런 분을 승이라고 그래요. .

 

그래서 수행하는 자, 불자들은

첫째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합니다.

?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자, 우리에게 깨달음의 가르침을 열어주신 자,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분을 찬탄하고 공경하며 그분께 귀의한다.

 

두 번째는 그 깨달은이의 가르침, 우리를 깨닫게 해주는 그 가르침, 그 깨달음에 의지함으로 해서 나도 깨달아지는 그 가르침. 담마, 법에 귀의한다. 내가 이 법을 만난 것이 너무나 기쁘다. 내가 이 법을 만나지 않았으면 이 세상을 얼마나 헤매며 괴롭게 울부짖으며 살았겠느냐? 그것을 생각해 보면, 이 법 만난 것은 마치 물에 빠진 자가 밧줄을 잡은 것과 같고, 장대를 잡은 것과 같다. 그래서 이 법, 담마에 귀의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이들, 한두 분이 아니에요. 수많은 스승들이 있다. 그분들이 있으므로 해서 나도 희망이 있죠. 그 분들이 만약에 없다면, 비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났다 하더라도 내가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겠다는 확신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분들께 귀의한다. 나도 그분들처럼 되겠다. 또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수많은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겠다. 이런 희망이 우리에게 있다. 이것이 귀승입니다.

 

그래서 불자는 제일 중요한 게 뭐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

 

그래서 어떤 행사를 하든지, 첫 번째로 이것을 먼저 해야 됩니다. 깨달은이, 붓다에게 귀의합니다. 깨닫지 못한 이를 위하여 깨달은이의 자비로운 가르침인 법에 귀의를 합니다. 깨달은이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 정진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이룬 자, 또는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분들, 그 분들께 귀의합니다.

 

이번에 이 공부를 하는 동안, 여러분들께서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그리고 계정혜 삼학을 닦아가는 공부 가운데, 우리가 경전에 의거해서, 대승경전에 의거해서 그 다운 데에서 반야부계통에 반야심경에 의지해서 깨달음을 얻겠다. 이런 마음을 가지시고, 공부를 한번 해 봅니다. 열심히 해 보입시다. .

 

/반야심경/

, 그러면 이 경의 제목, 반야심경입니다. 그런데 이 제목이 원제목이냐? 아니에요. 이것은 축약해서 부르는 제목이에요. 원 제목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에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이것을 줄여서 반야심경이라고 한다. 이 반야라는 말은 깨달음, 완전한 지혜, 이런 얘기에요.

 

/반야/

우리에게 지혜가 다 있어요? 없어요? 있습니다.

이런 지혜는 반야라 안 그래요.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증득되는 지혜를 반야라고 그래요.

빨리어로는 빤야라고 그래요. 빤야.

이것을 우리 식으로 그냥 발음해서 반야라. 이렇게 말합니다.

 

//

이 심 자는 마음이다. 이런 뜻이 아니에요. 여기서는 핵심이라는 뜻이에요. 가장 핵심 되는 이런 뜻이에요.

 

//

그리고 경은 수트라, 부처님의 말씀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지혜에 대한,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깨달음이다. 부처의 지혜라고 했습니다. 그 부처의 지혜, 빤야에 대한 가장 요긴한 부처님의 말씀이 수록되어있는 경전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하/

이것을 조금 더 원 경전으로 돌아간다면, 이 반야라는 말만 해도 완전한 지혜라는 뜻이에요. 그래도 부족해서 앞에다가 마하반야다. 이렇게 수식어를 붙였어요. 이 마하라는 뜻은 한없이 많은, 한 없이 큰, 소위 무한대를 말합니다. 여기서 한없이 크다는 의미도 있고, 한없이 많다는 의미도 있어요. 그러니까 한 없이 크다, 한 없이 큰 것을 우리가 말할 때 보통 어떤 비유를 듭니까? 우주를 얘기하죠. 허공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과거의 용어로는 뭐라고 그래요? 삼천대천세계,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하죠.

 

이것이 한 없이 큰 것을 이렇게 구체적인 어떤 예를 들어 설명할 때, 허공, 우주, 삼천대천세계, 이렇게 말하고, 그것을 하나의 상징적 언어로는 마하다. 이렇게 말해요. 84천 부처님의 법문이다. 이런 말 쓰지 않습니까? 이때 84천이라는 말은 한없는 수, 한 없이 많은 수라는 뜻이지, 아라비어 숫자로 팔만사천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경상도 가면 아주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사람들이 억수로 많이 모였더라.” 이렇게 말할 때 그것이 1억이라는 뜻이 아니고, ‘헤아릴 수 없이 사람들이 많이 모였더라.’ 이럴 때 억수이런 말을 쓴단 말이오.

 

그것처럼 팔만 사천이라는 말은 인도에서는 한 없이 많은 수를 뜻한다. 또 이것을 좀 더 실질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한 게 뭐에요? 갠지스강의 모래입니다. 항하사수. 항하라는 것이 강가강입니다. 강가, 항하. 항하사수라는 것은 강가강의 모래알 수입니다. 이 강가강이 엄청나게 크지 않습니까? 거기에 있는 모래수가 얼마나 많겠어요. 이것가지고도 부족해서 뭐라고 말합니까? 강가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강가강이 있고, 그 모든 강가강의 모래알 수. 이런 얘기, 이런 것도 다 마하에 속한다고 말 할 수 있어요. 마하라는 의미다.

 

또 미진수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미진수. 미진이라는 것은 아주 가는 티끌, 아주 가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먼지, 이런 얘기에요. 그런데 이 세계를 가루로 만들어서 먼지로 만들었다. 그 먼지수가 몇 개겠어요? 이건 강가강의 모래알 수하고는 비교도 없이 더 많죠. 이런 것을 미진수라고 그래요. 이런 것도 역시 마하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마하할 때 마하는 한 없이 큰, 또는 한 없이 많은, 그러니까 우리가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이, 불가사의,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다. 그 끝이 없다. 무유변. 이렇게 큰, 또는 많은, 이것을 마하라고 그런다. 그러니 이 빤야 앞에 마하가 붙어있다는 것은 이 지혜가 한 없이 크고, 그 지혜가 한 없이 세세하다는 거요. 그러니까 이것을 마하반야다.

 

/금강/

금강경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금강반야라고 표현하죠. 반야는 반야인데 앞에 뭐가 붙었어요? 금강이 붙었어요. 이 금강이라는 뜻은 부서지지 않는, 그 어떤 것도 부셔버릴 수 있는, , 여기서 부셔버린다는 것은 뭐겠어요? 번뇌입니다. 그 어떤 번뇌 망상도 다 부셔버릴 수 있는, 그 어떤 괴로움도 다 제거할 수 있는, 그런 지혜다. 이것을 무슨 지혜라고 한다? 금강반야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뛰어나고 무엇보다도 완전하다. 이런 의미로 금강이라는 말을 써요.

 

그러니까 결국은 금강반야나 마하반야나 의미는 같습니다. 이러한 완전한 반야, 완전한 깨달음만이 우리의 모든 고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이 모든 괴로운 속박을 끊어버릴 수가 있다. 그래서 이 바라밀다, 원래 말은 빠라밋다에요. 빠라라는 것은 저 언덕, 밋다라는 것은 건너간다. 바라밀다라는 말은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왜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고 그럴까? 여기서 이 언덕은 괴로움의 세계를 상징하고, 저 언덕은 괴로움이 없는 세계, 열반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 이 말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고에서 벗어나서 열반의 세계에 이른다. 예토에서 벗어나서 정토에 이른다. 극락세계로 나아간다. 이런 의미에요. 모든 속박,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이런 의미에요. 바라밀다가. 그러니까 모든 괴로움과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데, 뭐로 벗어난다? 깨달음을 통해서 벗어난다. 그래서 뭐라고 한다? 반야바라밀다라고 한다. 반야바라밀다.

 

그러니까 깨달음만이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가장 완전한 길이다. 이 반야바라밀다에 대한 마하반야바라밀다에 대한 가장 핵심 되는 요긴한 부처님의 말씀이다. 뭐가? 이 경전이.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것이. 부처님의 어떤 말씀도 지혜에 대한 말씀 아닌 게 없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얘기 아닌 게 없어요. 그러나 이 경전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완전한, 그에 관계되는 가장 요긴한 말씀을 설하신 것이다. 이런 의미를 제목에 담고 있다.

 

실제로 이 경전이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안 있는지는 이제 공부를 해봐야 되겠죠. 제목만 거창하고 실속이 없는지, 아니면 제목처럼 정말 실속이 있는 그런 내용인지는 우리가 이렇게 살펴봐야 된다. , 이런 제목의 경전을 우리가 공부를 하겠다.

 

그런데 본론에 우리가 들어가기 전에 모든 부처님의 말씀은 어떻게 시작이 됩니까?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 이렇게 시작이 되죠. 여시아문으로 시작이 된단 말이오. 그런데 이 경전은 관자재보살, 이렇게 시작이 되요. 그러니까 여시아문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사실은 불경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불경이 아닌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우리가 독송하는 수지독송하는 이 반야심경은 반야심경 약본입니다.

 

이 반야심경에는 광본과 약본이 있다. 광본이라 하는 것은 여시아문으로 시작되는 전체 경전을 말하고, 그 가운데에서 서분과 유통분은 제외하고, 가운데 있는 정종분만 우리가 지금 독송을 하고 있어요. 이것을 반야심경 약본이라고 한다. 그러다보니까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라고 하는 여시아문 문구가 없는 겁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게 경전인데, 경전을 분석을 할 때 경전을 크게 3단락을 지어서 우리가 살핍니다.

 

/서분/

제일 첫 번째 단락이 뭐냐? 이 경전이 설해진 배경을 기록해 놓은 겁니다. 누가 설했느냐? 누구에게 설했느냐? 어디서 설했느냐? 언제 설했느냐? 이런 배경, 설해진 배경, 상황, 이런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을 우리가 이름하여 서분이다. 이렇게 말해요. 서분. 금강경 같으면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한때 부처님께서 많은 대중들과 더불어 비구들과 더불어 사위성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누구하고 1250인의 큰 스님들과 함께 계셨다. 그러면서 마침 식사 때가 되어서 가사를 두르시고, 바루를 드시고, 사위성내에 들어가셔서 차례로 밥을 비루시고, 그리고 본래자리, 기원정사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드시고, 바루를 씻어서 두시고, 옷도 다시 벗어서 두시고, 그리고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이 말은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삼매에 드셨다. 입정에 드셨다. 이런 얘기에요.

 

이런 어떤 배경을 설명하는 게 서분이에요. 그때 앉아있는 대중가운데, 1250명의 그 큰스님들, 수행자 가운데에서 더더욱 더 큰스님, 장로가 되시는 수보리 존자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먼저 부처님을 찬탄하고, 그리고 부처님께 질문을 하죠. 이런 배경이 있는 곳을 뭐라고 한다? 서분이라고 그래요. 서분.

 

/정종분/

그러면서 수보리가 부처님께 질문을 하기 시작하는 그때부터 본론이 시작이 된다. 문답이 시작이 된다. 이 말이오. 이것을 가장 으뜸 된다. 바르고 으뜸 된다. 그래서 정종분이다. 바르고 으뜸 되는 내용이다. 그래서 정종분이라고 그래요.

 

/유통분/

이래서 설법이 다 끝나면 부처님 설법 듣고 누가 깨달았는지, 그 모여 있는 대중 중에 어떤 사람은 크게 깨닫고, 어떤 사람은 좀 적게 깨닫고, 그 설법을 듣고 기뻐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있어요. 그리고 누구누구 깨달았는지에 대한 얘기도 나옵니다. 그리고 또 대중들이 모여서 이 좋은 법을 우리가 널리 전하겠다하고 발언을 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이런 것을 뭐라고 한다? 유통분이다. 이렇게 불러요.

 

그래서 크게 3등분으로 나눈다. 첫째를 뭐라고? 서분, 두 번째를 정종분, 세 번째를 유통분. 그러면 경이 짧으면 비율이 큰 차이가 없는데, 경이 길면 정종분이 아주 길겠죠. 서분이 짧고, 정종분은 아주 길고, 유통분이 다시 짧게. 이렇게 우리가 분석을 하는 거요. 부처님이 이렇게 설법한 게 아니라, 우리가 그 기록을 보고 이렇게 분류를 한다. 그럼 이 반야심경은 서분이 생략되었으니까, 어디에서 설해졌는지, 누가 설했는지, 누가 질문을 했는지, 이 법문을 듣고 누가 기뻐했는지, 이런 기록이 없어요. 서분도 없고, 유통분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다시 광분을 보면,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됩니다. “저는 이렇게 들었다.” 할 때, 이 저는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 할 때 나는 누구에요? 아난존자에요. 부처님을 25년간 시봉한 아난존자가 부처님 열반에 드신 뒤에 이 부처님의 말씀을 모을 때, 결집할 때, 그때 이 경에 대한 것은 아난존자가 초안을 냈고, 율에 대한 것, 행동지침, 삶의 지침에 대한 것은 우파리존자가 초안을 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경에 대한 것은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할 때 그 나는” “저는그것은 아난존자를 말한다.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하고 아난존자가 대중들 모인 자리에서 자기 들은 바를 드러내는 거요. 그러면 그때 오백아라한, 깨달은이 500명이 이 아난존자의 얘기를 듣고 다 동의를 합니다. “, 그래. 나도 그렇게 들었어. 맞아.” 이렇게 하면 끝이 나고, “아니야, 어느 부분이 틀렸어.” 이러면 수정을 하겠죠. “어느 부분이 빠졌어.” 이러면 보안을 하는 거요.

 

이렇게 다 해서 그 부처님의 말씀을 완성을 시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우리가 결집이라고 그래요. 첫 번째 결집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왕사성 칠엽굴에서 있었습니다. 마하가섭존자가 상수제자가 되고, 즉 사회를 봅니다. 아난존자하고 우파리존자가 초안을 내고, 오백비구들이 오백아라한들이 심사를 해서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다 결집을 했다. 그 초안을 낼 때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해서 여시아문으로 시작이 되는 거요.

 

그러면 이 반야심경은 그 들은 자, 아난존자가 기록에 의하면, 어디에서 설해졌다? 왕사성기사굴 산중에서 설해졌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가사굴산이 어느 산이냐? 이게 그리드라쿠타. 그리드라쿠타의 음역입니다. 이것을 번역하면 영축산이에요. 그러니까 마가다국의 서울인 왕사성, 그 성 밖에 있는 영축산에서 부처님이 대비구, 큰 스님들과 그리고 대보살들 앞에서 설하신 거다. 여기서 대비구, 큰 스님, 할 때 큰스님의 뜻은 뭐에요? 출가하시고 오래되셔서 수행이 아주 높은 분들을 말합니다. 으흠. 거기에서 법을 설했어요.

 

그런데 이 법을 누가 설했느냐? 우리가 생각할 때 당연히 부처님이 설했다. 이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이 반야심경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영축산에서 부처님과 대중들이 다 깊은 명상에 들어있었을 때, 그 부처님의 위신력의 힘을 얻어서 사리부트라, 지혜제일인 사리부트라 존자가 거기 모여 있는 대중들이 깊은 명상에 들어있는 것을 보니까, 그 가운데, 관자재보살, 관세음보살님의 그 수행력이 너무너무 높아. 그 지혜가 너무 크고, 그 자비심이 너무 넓은 거요. 그래서 부처님이 선정에 들어있는 광대신심삼매에 들어있는 그 상태에서, 부처님은 선정에 들어계시고, 그런 상태에서 사리부트라, 사리불존자가 관세음보살님께 질문을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관세음보살님께서 역시 부처님의 위신력의 힘을 빌어서 이 질문에 대답을 하는 거요. 그러니까 질문자는 사리부트라, , 사리자 존자고, 대답자는 누구라고? 관자재보살, 관세음보살이에요. 그러면 여기에 이것을 증명하는 분이 계십니다. 이 문답을 선정에 들어서 지켜보고, 문답이 끝난 뒤에 대답을 한 관자재보살도, 질문을 한 사리부트라도, 거기에 모여 있는 대중들에게도, 다 이 주고받은 문답이 다 진실하다. 진리 그대로다.

 

현실적으로는 사리부트라가 질문을 하고, 관자재보살이 대답을 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어떠냐? 질문자도 부처의 위신력을 빌었어요. 응답자도 대답하는 분도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어서 문답이 오고갔기 때문에 이것은 부처님이 대답한 거와 아무 차이가 없다. 그것은 진리 그대로를 말하는 거다. 이것을 부처님께서 삼매에 깨어나셔서 증명을 해 주신다. 이 말이오. 그러니 이것은 조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경전과 다르다.

 

그래서 여기 증명이 있습니다. 누가 증명이라고? 부처님께서 증명하시고, 사리부트라가 질문을 하고, 관자재보살이 대답을 했다. 질문 내용은 성문연각을 대표한 사리부트라가 대승보살을 대표한 관자재보살에게 그 대승의 사상, 가장 핵심 사상인 공사상에 대해서 질문을 했고, 관자재보살은 그 공사상에 대해서 대답을 한, 이런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반야심경의 체제는 그렇게 되어있다, 이 말이오. 이것이 역사성으로 얼마나 정확하냐? 이것은 학문적인 논쟁이고, 이 경전체계는 이렇게 형성이 되어 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지금 수지독송을 하고 있습니다. 첫날 강의는 여기까지 하고, 또 계속해서 강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