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5)

법륜스님 1_3.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Buddhastudy 2015. 7. 30. 22:00

법륜스님이 제안하는 곱게 늙는법 [한겨레談 1-1]

 

 

죽음이 요체는 아니고요, 두려움이 요체라고 생각합니다. 두려움. 결국 죽음이라는 것이 나에게 두려움을 주게 되고, 이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다시 말하면 내세에도 나오는 거 아니냐? 죽으면 끝이 아니고, 더 계속된다든가, 더 좋은데 간다든가, 이런 생각을 하면 죽음이 좀 덜 두려울 거 아니겠어요. 그런 성격으로 보죠. 내세가 있고 없고는 있나? 없나? 가 핵심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죽음에 대한 극복은 죽고 안 죽고의 문제가 아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게 중요하거든요.

 

그럼 죽음에 대해서 왜 두려워하느냐? 이런 문제죠. 죽고 나면 없어진다든지, 자꾸 이런 생각을 하니까, 타인에 대해서도 아쉬움이 일어나고, 자기에 대해서도 아쉬움이 지나쳐서 두려움이 되는 거 아니냐? 우리가 사물을 관찰해보면, 사물에는 변화가 있지 않습니까? 얼음으로 만든 구슬이 있다면, 어린아이는 그 구슬을 갖고 놀다가, 밖에 가서 놀다가 들어왔을 때 물이 되어있다면, 그 아이의 인식은 이렇거든요. 구슬이 없어졌다. 이렇게 말한단 말이오. 물이 생겼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러면 물이 생겼다, 구슬이 없어졌다는 게 생멸 아닙니까? 그죠?

 

그러면 존재의 생멸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생멸이라는 것은 우리의 인식이라는 거죠. 존재는 그냥 변화만 있다는 거죠. 그 전체의 변화를 다 관찰하면 변화했다라고 올바르게 인식하는데, 바깥에 가서 놀다 한 측면, 결국 편견이거나 단견인데, 한 측면만 보니까, 없어졌다. 또는 생겼다라고 하는 인식상의 오류가 생긴 거다. 그러니까 생멸은 인식상의 오류지, 존재가 생멸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존재는 변화한다는 거죠. 다만 변화할 뿐이라는 것들을 올바르게 바라보고 있으면, 거기에는 두려움도 없고 아쉬움도 없을 텐데.

 

이제 그것을 올바르게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잘못인식하게 되니까, 그러니까 구슬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니까, 구슬에 대한 아쉬움이 생겨난 거 아닌가? 또 없어질까 봐 두려움이 생기는 거고, , 그런데서 저는 물질뿐만 아니라, 우리가 나뭇잎을 관찰하든, 하나의 실물을 관찰하든, 결국은 물질들이 일정한 설계도에 따라서 조립이 되어서 형성되고, 유지되다가 또 해체되고, 또 다시 조립이 되고, 이런 하나의 변화죠. 바다의 파도가 출렁거릴 때, 파도 하나하나를 관찰하면 파도가 생기고 없어지고 생기고 없어진다고 관찰되지만, 바다 전체를 관찰하면 그냥 물이 출렁거리는 거죠.

 

총체적 관찰, 또는 실제의 모습은 생멸이 아니라, 변화만 있다는 거죠. 우리가 변화를 여실하게 꿰뚫어 볼 수만 있다면 두려움은 없다는 거죠. 변화에 따른 두려움은 없다는 거죠. 그것이 올바르게 알아차려지지 않고, 그것이 생멸로 인식이 되니까, 기쁨이나 슬픔, 이런 두려움 같은 게 반복되는 게 아닌가? 그런데서 막상 너한테 똑같은 일이 닥치면 어떻게 하느냐? 이럴 때도 충분히 내가 깨어만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을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일 텐데, 과거에 살아온 방어본능, 생존의 본능이 그 순간에 자기를 못 깨어 있고 하니까, 똑같이 두려움이 생기죠. 어린아이처럼.

 

그러나 두려움이 생기지만 다시 돌이켜서 여실히 살피면 두려움은 잦아들고, 하나의 변화로서 바라볼 수 있지 않느냐. 그런데서 생사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즉 생겨난 것들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 영생이 아니라, 본래 생겨남과 사라짐이라는 것이 없다는 거죠. 인식상의 오류지, 실제의 존재는 다만 변할 뿐이라는 거죠. 이것이 우리가 생이라 하지만, 생이 아니고, 멸이라 하지만 멸이 아니다. 그게 불생불멸이거든요. 불생불멸은 영원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불생불멸이라는 말은 생이라는 인식, 멸이라는 인식이 오류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존재는 변화만 있다. 그래서 초기의 교설에 있어서의 제행무상과, 대승교설에 있어서의 불생불멸은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동일한 개념이라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