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콘텐츠 주제에 대해서 말씀드릴게요.
단념과 포기에 대한 이야기예요.
한 어머니가 자식의 a라는 대기업에 입사하게 해달라고
매일매일 교회며 저리며 다니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녀는 입사 면접에서 낙방하고 말았어요.
또 어떤 어머니는 딸내미가
이 b라는 명문대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매일매일 물 떠놓고 기도하면서
예수님 부처님 조상님 찾으면서 간절히 기도한 거죠.
그런데 아쉽게도 그분 자녀는 입학에 실패합니다.
어떤 아버지는 노총각 아들이 이번에는 꼭 장가 가게 해달라고
부적 쓰고, 굿까지 벌여가며 정성을 기울였어요.
자, 결국 아들은 이번에도 결혼에 실패했습니다.
주변에서 많이들 목격했죠?
이것은 정말 흔히 일어나는 일이에요.
즉 우리들의 일상적인 이야기들입니다.
그때 그 부모님들의 반응은 어떨까요?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그때부터 이불 뒤집어쓰고 누워버립니다.
밥도 안 먹고, 제대로 씻지도 않습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요.
심한 경우에 말 그대로 앓아눕죠.
열심히 다니던 교회며 절이며 안 나가기 시작합니다.
습관처럼 아니면 체면 때문에
나간다고 해도 건성이 되죠.
멍하니 그냥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다가 뭐 울 뿐이에요.
멍하니 중간중간에 온갖 생각이 또 맴돕니다.
/정말 하느님은 살아계신 걸까?
정말 부처님, 신령님 조상님은 우리를 돕는 걸까?
살아계시다면 왜 그토록 열심히 기도했는데, 소망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을까?
살아 계시다면 나에게 왜 이렇게 하실까?
내 기도가 뭐 그리 잘못된 부탁이라고 이렇게 매몰차게 거절하실까?
남들은 로또 1등까지 당첨되게 해 주시면서 왜 나한테는 이럴 수 있을까?
내가 잘못 산 건 아닐까?
아니 분명히 성경 같은 데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두드여라. 그리하면 너에게 열릴 것이리라” 하지 않으셨던가?
예수님이 거짓말하신 건가?
부처님이 뻥 치신 건가?
신령님들은 뭐 해요?
조상님들은 제삿밥만 얻어먹고 생가는 양아치들인가?/
별의별 생각이 드는 겁니다.
더 심한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나 같은 거는 그냥 신의 안중에도 없는 것 아닐까?
나한테는 관심이 없는 것 아닐까?/
시크릿 할 때도 마찬가지죠.
/시크릿 이거 그렇게 열렬히 진심으로 믿으면서 소망했는데 되는 게 없어
이거 전부 다 거짓말 아닐까?
만약에 나만 안 되는 거라면은 나는 그렇게 재수 없는 사람인가?
자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계속 신을 믿고 의지하며 산다는 말인가?
시크릿도 어떻게 계속한다는 말인가
뭘 보고 내 자식들한테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무슨 낯짝으로 지인들에게 의심 없이 뭐 믿으라고 말하겠는가?
황당하고 짐 빠지고 어이없다.
내가 다시는 뭐 기도하나 봐라.
무언가를 소망하나 봐라.
시크릿 뭐 하나 봐라 믿나 봐라./
별별 생각에 파묻힌 채
자신도 괴롭히고 자식도 괴롭히고 주변 사람들 다 괴롭히고
하느님 부처님 신령님들 괴롭힙니다.
그런데 우리 솔직해져 봅시다.
살아오면서 과연 우리의 기도가 하나도 빠짐없이
혹은 나의 소망이 하나도 빠짐없이 응답받았나요?
그러니까 이루어졌나요?
아니죠, 응답된 것 이루어진 것도 많지만
응답받지 못한 것도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볼게요.
나의 모든 소망은, 기도는
반드시, 그리고 예외 없이, 무조건 용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마음속에서 ‘적어도 내 기도는 그래야 한다’
혹은 ‘그랬으면 좋겠네’ 생각이 올라올 수 있어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방향을 바꿔서 다시 한번 자문해 볼게요.
나 말고 다른 사람, 아니 모든 인간들의 기도도
하나도 빠짐없이 응답되어야 하는가?
모든 인간들의 소망도 빠짐없이 이루어져야 하는가?
어때요?
이번엔 아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보다 ‘그럴 수 없다’라고 여기는 분들이 더 많을 거예요.
이게 뭐예요?
그러니까 나는 되고, 다른 사람은 안 되는 거네요.
한국하고 일본이 축구 시합을 합니다.
절대로 질 수 없는 한일전이죠.
이때 한국 선수는 그의 신에게, 한국이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일본 선수는 그의 신에게 일본이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당연하죠.
나의 신, 남의 신, 나누고는 있지만
편의상 모든 것의 공통적인 근원을 신이라고 칠게요.
이 양쪽의 기도를 듣는 신의 입장에 한번 서 보실래요
그의 입장에서 보면
이 기도 저 기도 모두가 응답되려면
한국이 일본한테 이기고, 동시에 일본이 한국을 이겨야 돼요.
이게 말이 됩니까?
만약에 내가 기도하는 신이 진짜 신이라면
내가 나의 소망 성취를 위해서
믿는 법칙이 진짜 절대적인 법칙이라면
나의 신은 동시에 남의 신이기도 할 거예요. 그렇죠?
나의 시크릿은 동시에 남의 시크릿과도 같은 것이겠죠.
그런데 신은 모두한테 공평해야 하잖아요.
결국 가장 공평한 길은 뭘까요?
결국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은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시크릿도 마찬가지죠.
무언가를 청할 때
나의 입장만이 아니라, 신의 입장도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그러면 비록 믿음을 가지고 기도한다고 해도
거절될 수 있다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보통 신을 일컬어서 주님이라고 불러요.
아니면 궁극의 실재, 세상의 법칙, 유일한 법칙, 많은 이름으로 부르지만
보통 주님이라고 부르죠.
자 그렇다면 이 신은 어떻게 우리의 주님이 되는가?
첫 번째는
신은 우리의 어떤 기도를 어떤 소망을 들어주심으로써
우리의 주님이 되는 거죠.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한테 기도해야 되는 거죠?
주 하느님, 나의 주이신 대상의 법칙, 나의 주이신 초월적인 궁극의 신에게
기도를 해야 될 겁니다.
그런데 때로 신은 우리의 어떤 기도를 거절하심으로써
또한 우리의 주님이 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주님이라는 말 자체가 무슨 뜻이에요?
[주체] 혹은 [주권자]라는 뜻이에요. [결정자]라는 뜻이에요.
즉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뭡니까?
허락하는 능동자라는 뜻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이 또한 진실이에요.
기도를 들어주기 때문에 주님이고
기도를 또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소망을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도 주님인 거예요.
왜?
신은 주권자이기 때문에
기도를, 소망을
들어주기도 할 수 있고, 안 들어주기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기도하는 족족, 소망하는 족족
모두 성취되기만 한다면 그건 뭐예요?
우리가 주님이고 신은 뭐예요?
전능한 소망성취 자판기 정도에 불과할 것이에요.
아이와 부모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보통 우리가 신을 부모라고 이야기들을 많이 하죠.
왜 그러냐?
부모는 부모이기 때문에 아이가 해달라고 하는 것을 들어주죠.
“엄마 아빠 나 뭐 해줘, 뭐 해줘”
“그래, 그래” 해주죠.
이게 뭐예요?
부모의 역할의 핵심이죠.
안 그래요?
그런데 동시에 부모는 부모이기 때문에
때로는 아이가 청하는 것을, 해달라고 하는 것을, 안 들어줍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
거절할 수 있어야 또한 부모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소망과 기도에 대한
하늘의 응답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
동시에
하늘의 거절을 겸손하게, 그리고 깨끗하게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도저히 그 소원의 포기가 안 돼요.
그래서 병이 나고 앓아눕죠.
그럼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신을 해야 하는가?
오늘은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다윗 왕의 사례를 통해서 한번 알아볼게요.
자신과 부하의 아내 사이에서 불륜으로 아이를 하나 가졌습니다, 다윗이.
그런데 이 아이가 죽어가고 있어요.
다윗은 그 아이를 살려달라고 식음을 전폐하고 단식기도를 시작을 해요.
자지도 않고 맨 땅에서 엎드려서 밤을 지새우면서
하느님한테 매달려 울면서 기도합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식음을 전폐하고 매달렸어요.
그러다가 아이가 결국 숨을 거둡니다.
이때 주변의 신하들은 차마 다윗에게 그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어요.
혹시라도 그 충격에 쓰러질까 봐 염려되었던 거죠.
자 그런데 결국 다윗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다윗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모든 이의 예상처럼 까무러쳤을까요?
그렇지 않았어요.
누워 있던 바닥에서 일어나더니 엎드려 있던 땅바닥에서 일어나더니
목욕을 깨끗하게 하고 몸을 정갈하게 단장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느님을 경배합니다.
그리고 다시 궁으로 돌아와서
이제 그때부터 식사를 하고 기운 차리고 일상으로 돌아갔어요.
복귀했어요.
이때 다윗이 신하들에게 말을 합니다.
“아이가 살아있을 때 내가 금식하면서 운 것은
혹시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서
그 아이를 살려주실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이가 죽었는데
뭐 때문에 내가 계속 금식하겠는가?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겠나? 상황은 끝났지
나는 장차 죽어서 그 아이에게로 갈 수 있지만
그 아이는 나에게 올 수가 없다. 이미 끝났다.”
다윗은 아이가 죽기 전에는 쓰러져서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지만
막상 아이가 죽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했어요?
상황이 끝난 다음에는 자리에서 일어났죠.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눕지 않았어요.
툭툭 털고 일상으로 돌아온 거죠.
많은 이들의 예상하고는 정반대였습니다.
분명히 다윗의 기도는 어땠어요?
거절당했어요.
그런데 그는 신과 자신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기도를 거절하신 그분께
새삼스럽게 예를 갖추면서 경배합니다.
신의 거절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돌이킨 거죠.
아니 지금까지 자신을 지배하고 있었던
그 마음, 그 생각을 끊어내버렸다 함이 맞을 것입니다.
집착을 뭐 한 거예요?
벗어버린 겁니다.
이렇게 마음과 생각을 끊어내고 돌이키는 것
이것을 [단념]이라고 부르죠.
그런데 이 단념은 포기하는 것, 즉 체념과는 다릅니다.
많은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보면
포기하지 말라고 하지 단념하지 말라고는 안 합니다.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 이만 단념할 것을 권하기도 합니다.
그럼 포기와 단념은 어떻게 다른가?
포기는요 체념이에요.
희망을 버리고 중간에 그만두는 것이죠.
중간에 그냥 와르르 무너져서 주저앉아버리는 게
이 포기, 체념이에요.
그런데 다윗은 중간에 체념하고 기도를 포기한 게 아닙니다.
결과가 어떻든 뭡니까?
일단 끝을 맺습니다.
다윗은 결과를 확인하고 나서 금식기도를 그만뒀죠. 포기가 아닙니다.
이 일을 뭐 한 거예요?
마무리한 거죠.
이것이 바로 단념입니다.
단념이라는 것은 마음속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고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그 생각과 행동을 중단하는 것이 단념이에요.
이것은 수동적인 포기가 아니죠. 그게 뭡니까?
능동적인 태도인 거예요.
결정이에요.
물론 우리는 중도에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 끈질긴 그 마음, 그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인류의 모든 스승님들께서 이 부분을 강조하셨죠.
믿으라고.
그런데 나의 믿음이 외골수로 부리는 고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믿음이라고 믿고 있지만.
혹은 전체성의 순환 안에서
악영향을 일으킬 만한 이기심이 될 수도 있어요.
뭐가? 나의 소망이.
내 소망이 이루어진다 해도
그것이 진짜로 나에게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자 그래서 때로는 이렇게 깨끗이 단념하는 믿음도 배워야 해요.
이 자세도
지금 내 [고집에 대한 내려놓음]
이 [단념] 또한 하나의 [믿음]일 수 있습니다.
충격으로 무너지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단념은 훌륭한 믿음입니다.
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내 소망에 대한 응답이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분명한 거절로 나타났다 하더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결과를 또 다른 하늘의 응답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마음은 결코 그 집착을 놓지 못할 것입니다.
집착을 놓지 못하니까 계속 회한에 붙잡혀 지옥을 살아가는 거예요.
신은 내 소망을, 기도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거절과 외면은 다른 것입니다.
이 세상의 법칙은, 혹은 신은
우리의 기도와 소망을 거절하는 것이지
결코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두 개는 다른 거예요.
수없이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며
다양한 신앙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결국 신은 절대 궁극의 실재를 의미를 하죠.
이 궁극 실재의 모든 움직임은, 모든 행사는
다 그럴 만한 뜻이 있습니다.
이 무한한 전체성의 깊은 뜻을 제한된 개체의식의
좁은 마음으로 다 헤아릴 수가 없다라는 이야기예요.
우주 삼라만상 이 대자연의 운행을
한낱 인간의 입장에서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경우에 인간의 소망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입장만을 대변합니다.
그마저도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한테 유리한 것만을 이루고자 합니다.
결핍에 기인한 방어 기제가
원동력이 된 소망을 진정으로 나에게 필요한 것
반드시 필요한 것
이것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느님,
즉 공급 실재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아요.
우리 각각의 개인들이 원하는 것, 간절해 보이는 것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내 간절한 기도가, 내 소망이
하늘로부터 거절당한다 해도 좌절할 이유도 없고요.
버려졌다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어요.
내 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또한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 실패를 통해서
내가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얻을 수 있었던 일시적인 이익보다
더 큰 이득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성장해서 결국 더욱 큰일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하늘의 거절은
무언가 더 큰 성장을 위해 마련된 더 좋은 하늘의 선물을 위해 준비된
[잠시 잠깐의 거절]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우리는 결코 외면받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가 신의 현현이기 때문이에요.
절대성의 현현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거절]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거절이 [버림받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잠시 잠깐의 거절을
보다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쳐 쓰러지지 않고
다시 새로운 길을 걸어가게 되는 거죠.
여러분 새롭게 받아들이세요.
내가 청하는 것에 대한 하늘의 [거절]은
하늘이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깊은 또 다른 차원의 [응답]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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