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2

[비이원시크릿] 좋은 감정이 반드시 좋은 현실을 창조하지 않는다

Buddhastudy 2025. 3. 4. 19:17

 

 

감정이 현실을 끌어당기는 원리에 대한

콘텐츠 에필로그입니다.

 

사실 이게 에필로그라기보다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당부입니다.

일종의 노파심 때문에 그래요.

 

지난 영상들에서 이 감정이 무엇이고

그다음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떻게 현실을 끌어당길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 그럼 이보다 더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의식을 통한 현실 창조나 이 자기 계발을 공부하시는 분들 대부분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사실 잘못 알고 있다라기보다는요.

이거는 그냥 포장한 거고요, 보기 좋게.

 

이게 아니라 실제로는 보다 큰 진실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내가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들으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하나의 오해가 있어요.

 

대중들에게 전해지는 이 의식을 통한 현실 창조의 대부분이

대부분의 방편들이

좋은 마음을 인풋 하면 좋은 현실이 출력된다

나쁜 마음을 인풋 하면 나쁜 현실이 출력

이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옛말에도 있는 콩 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라는 이 말이

또 이런 믿음에 한 팔을 거들기도 하죠.

 

그래서 좋은 감정을 유지하면

어떻게 무조건 좋은 현실이 창조된다고 이야기가 됩니다.

이게 이미 하나의 공식처럼 되어서

대중에게 유행하고 있지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진실을 말씀드리면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라이프 루시딩에서는

관념을 분석하고

그렇게 분석된 관념의 허용과 재규정을 핵심으로

자기 계발 쪽의 커리큘럼을 짜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삶을 지배해 온 핵심 관념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의 [승화, 그리고 재규정]을 통해서

[현실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설명하다 보니까

어떤 관점이 생겨났냐 하면

좋은 감정이 그대로 좋은 현실이 된다라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모든 관념을 제대로 재규정하고 나면

오직 좋은 일만 일어나야 한다, 혹은 꽃길만 걸을 것이다라는

관점이 생겨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장 큰 오해입니다.

 

이 마음 자체에

이 세상의 기본적 틀인

상대성을 무시해 버리는 어리석음이 들어 있는 거예요.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현실은

상대적인 방식으로밖에 존재할 수가 없어요.

따라서 내 삶에서

부정적인 것을 없애버리면

동시에 이 긍정적인 것 또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꽃길만 걷고 싶은 마음 때문에

[가시밭길]을 내 삶에서 없애버린다면

[꽃길] 또한 같이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만약 항상 좋은 생각과 감정을 유지하는 경지에 오르고

모든 관념을 다 정화해서

완벽한 업장 소멸에 오르고자 하는 마음이

이와 같은 생각,

내 현실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생각과 감정들만 쏙 남겨놓고

꽃길과 같은 현실만 걸어야지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 마음 자체가 가장 지독한 [탐진치]의 마음이에요.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좋은 감정이 항상 좋은 현실만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현실의 모습은

얼마든지 안 좋은 현실일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우리의 감정이 끌어당기고

그다음에 상징하고자 하는 이 의미와 가치는요

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통해

[좋다 혹은 나쁘다]로 분별할 만한 얄팍한 것이 아니에요.

이보다 훨씬 [깊은 수준의 의미와 가치]가 필요해서

현실을 만들어야 할 경우에는

얼마든지 이 겉으로 보기에는

고단한 현실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좋은 일이 나타나더라도

이거를 극복을 하고 승화시켜서

새롭게 깨닫게 되는

한 차원 더 깊은 단계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에요.

 

진짜로 성숙해진 감정이란

이와 같은 상태에서도 자신의 그 고결함, 그 숭고함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걸 이해하셔야 됩니다.

 

문제는 현실의 가치에 대한 분별을

단순히 [나에게 [유리]한 것과 나에게 [불리]한 것으로 이분을 해서

내게 유리하면 [좋은 것]이고

나한테 불리하면 [안 좋은 것]이다라고 판단해 버리는

이 어린 마음에 있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한 방에 와닿을 만한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좋은 마음에서 반드시 좋은 현실이 나와야 한다면

부처님과 예수님의 삶은 왜 그 모양이었어요?

 

이 영상을 보고 계신 분들 중에서

부처님과 예수님만큼 오롯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 계실까요?

그분들을 능가할 만한 깨달음과 사랑에 도달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부처님과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깨달음과 사랑에 도달했다고 여겨지는 분들입니다.

인류 역사상 쌍벽을 이루는 종교

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시조가 되신 분들이에요.

한 분은 무려 부처요,

한 분은 무려 그리스도라고 받아들여집니다.

 

그럼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셨을 텐데 이분들은

우리가 믿는 현실 창조 공식에 따른다면

마음이 완벽하게 정화된 그분들의 삶은

완벽한 꽃길로만 채워져야 했을 것입니다. 안 그래요?

어디 걷기만 하면

앞에 그냥 레드카펫이 쭈르륵 깔렸어야 된다라는 이야기예요, 자동적으로.

기적이 일어나면서

 

그런데 과연 그랬어요?

부처님은 깨달음 이후에 40여 년을 떠돌아다니시면서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셨습니다.

구걸로 연명하시면서

구걸 얻어먹으셨어요.

그 와중에 얼마나 많은 모함을 당하셨겠습니까?

이후의 삶을 길 위에서 살다가 길 위에서 끝마치셨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객사하신 거예요.

독살을 당하셨다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어땠나요?

온전한 사랑의 삶을 사셨던 그분은 살해당하셨습니다.

그것도 정치범이나 흉악범들에게나 선고되던

십자가형을 받아 돌아가셨어요, 배신당하시고.

 

비유가 너무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말의 초점은

이 감정을 정화하고 관념을 재규정해서

꽃길만 걸어야겠다라는 마음을 느낀다면

그리고 그 마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좋은 감정은 반드시 내 입맛에 맞는 좋은 현실을 출력해내야 해라는 믿음이 있다면

마음 자체가 내 삶의 보다 깊은 의미와 가치를 볼 수 없게 만들고 있음을

자각하시라는 이야기입니다.

 

또 한 가지 부분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앞에 벌어진 이 현실에 대해서요.

결과가 좋다, 혹은 나쁘다라는 판단을 쉽사리 내리지 마세요.

 

이게 왜 그러냐 들어보세요.

하나의 결과는

나타나는 그 즉시 결과로 영원히 남는 게 아닙니다.

나타나는 그 즉시 또 다른 결과의 과정으로 편입돼 버려요.

 

그렇다면 내가 내린 결과에 대한 판단은

무엇에 대한 판단이 되겠습니까?

 

보통 무언가를 목표를 할 때

그 목표 한 사건이 이루어지죠.

<이루어지는 그 순간>[결과]라고 인식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루어지는 순간만을 바라고 나아가죠.

 

하지만 영원한 결과 [절대적인 결과]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 고정불변의 현재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식의 맹점이죠.

 

그러니 섣부르게 좋은 결과 나쁜 결과를 판단하지 마세요.

내가 나쁜 결과라고 판단한 그 [순간]

오히려 이후에 다가올 더 좋은 결과의 [과정]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좋은 결과라고 판단한 그 [순간] 또한

이후에 다가올 더 나쁜 결과의 [과정]일 수도 있겠죠.

 

진정으로 성숙해진 감정이란

이 현실의 모습이 어떻더라도 상관이 없이

항상 [감사하고 기쁜 마음 상태]를 뜻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마음이

각자의 [고유한 삶]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을 거예요.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채널에 대한 구독을 끊거나

더 이상 시청을 안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한 게 아니거든요.

내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한 게 아니거든요.

 

하지만 이 채널하고 손절하시기 전에

내가 혹시 지금 당장

내 마음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골라 들으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만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에요.